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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전원 이야기

전원과 겨울 세시

전원 이야기 | 2007/05/19 (토) 23:02

 

전원과 겨울 세시


전원생활을 하면서 일어나는 변화 중에 가장 큰 것은 세시(歲時)에 민감해진다는 것이다. 입춘이 언제인지, 우수가 언제인지, 혹은 동지가 언제인지 아파트 같은 공동 생활을 할 때는 체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요즘에는 세시를 말하는 것도, 세시 풍속을 즐기는 것도 시들해졌지만 전원에 살다보면 그런 것들이 갑자기 그리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전원에서는 걱정할 게 없다. 세시를 모르고는 사는 재미가 반으로 줄기 때문에 저절로 자연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

특히 겨울에 만나는 세시 풍속 때는 더더욱 그렇다. 동지(冬至)에 동지팥죽을 쑤어 이걸 장독대에, 베란다에, 정원수 큰놈 밑에, 대문 곁에, 차고에 한 그릇씩 갖다놓고 정성을 들이는 것도 전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붉은 팥죽이 식어 차디차게 굳을 무렵 그걸 걷으러 나가보면 하늘에서는 푸른 별빛이 쏟아지고, 아들딸을 내보내 한 해 소원을 빌게 하는 것도 가슴 벅찬 일이다.

팥죽 쑬 줄을 모르면 가게에 가서 사다가 전자레인지에 데워 써도 되기는 하지만, 감동이 덜해질 수밖에 없다. 팥죽 한 그릇에 종교와 이념을 뛰어넘는 순진무구한 자연성이 숨어 있잖은가.


한 해 열심히 과일을 생산한 유실수 나무들에 초겨울 밑거름을 넣어주고, 짚을 싸주고, 큰 나무 밑에 막걸리 한 병을 부어주는 것도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화(和)를 느끼게 해준다.


마당 한 켠을 파서 독을 묻어두고 겨우내 김장김치를 꺼내먹는 맛은 귀찮기는 하지만 어디 비할 바 없는 미각을 얻을 수 있다. 김치냉장고가 원형 그대로 신선하게는 보존해 준다지만, 흙의 기운을 받으며 숙성된 김치하고는 차이가 있다. 그 맛없는 듯하면서도 깊은 맛 같은 것이 가슴을 저미도록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한 일년 묵은 장독 김치맛을 아시는지들.


가을에 심어둔 배추를 뽑지 말고 비닐을 덮어놓고는 겨우내 한 포기씩 뽑아 겉절이를 해먹거나 쌈으로 먹는 것도 좋다. 또 추녀에 무우청을 묶어 매달아놓았다가 우거지국을 끓여먹는 것도 좋다.


겨울철에 느낄 수 있는 세시 풍속으로는 메주를 쑤어 매달았다가 띄우는 일이 있고, 음력 1월쯤 하여 간장 된장을 담는 일이 있다. 겨울, 추녀에 매달려 햇빛을 받으며 노랗게 익어가는 메주를 보면 그 자체가 감동이다. 어떤 인테리어 기술로도 이 기품을 따라갈 수가 없다.

장 담그는 기술이 없다면 남 만들 때 거들면서 서너 개만 만들어 매달아 두는 것도 좋다. 그 정도면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어렵지 않게 간장도 뽑고 된장도 만들 수 있다.


아, 또 일이 있다. 경기도에서는 겨울을 나기 힘든 석류, 천리향, 만리향, 동백, 귤, 차(茶) 같은 화초를 방안으로 들여놓는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전원주택은 아파트와 달리 습도가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추운 겨울철에는 건조하다. 이럴 때에 집안에 들여놓은 화분은 저희들이 알아서 습도 조절을 해준다. 산소를 생산해주는 것도 기특하지만, 귤이나 금귤 같은 노란 열매를 달기 시작해주면 어찌나 앙증맞은지 애완동물만큼이나 귀여워 보인다.


재작년에 아는 스님이 새끼 차나무를 한 스무 그루 보내와서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화분을 끌어모아다가 심어 여러 집에 분양했다. 그런 것이 올 초겨울에 첫 꽃이 피었는데, 그 기품과 향이 어찌나 고고한지 적어도 열흘은 행복했다고들 한다. 이처럼 겨울에 꽃이 피거나 열매가 달린 화초라면 더더욱 실내용으로 그만이다. 좀 장난을 부리자면 진달래나 철쭉 같은 것을 덜 추운 날 밖에 내놓았다가 들여놓고 잘 관리하면 한겨울에 그 풍성한 꽃을 구경할 수 있다. 자세한 기술은 전원이면 어디나 있는 화원에 가 슬쩍 물어봐도 된다.


창밖으로 참새떼 수십 마리가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휘리리 모여들었다가 느닷없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그러고는 금세 언덕너머로 사라진다. 영문을 모르는 개들은 신이 나서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닭장에서는 알을 낳았다고 자랑하는 암탉의 울음소리가 겨울 하늘을 가른다. 이때쯤 유자차나 보이차를 한 잔 손에 들고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아니면 커피라도.


펑펑 눈이 와서 하루쯤 고립되는 것도 전원만의 여유다. 요즘은 제설장비가 발달하여 강원도 아닌 다음에야 하루 이상 눈이 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하루쯤 설원(雪原)에 묻히는 행운이 이따금 찾아온다. 그러다가 전봇대에 눈이 너무 내려 정전이라도 되고, 전화선이 불통되어 인터넷도 안되면 그때부터 몇 시간은 신선처럼 촛불을 켜놓고 사색을 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휴대폰은 잘 안꺼져 그게 좀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다.

겨울의 전원 생활, 한 마디로 여유(餘裕)를 느끼는 때요, 인생의 여백(餘白) 같은 계절이다. 쉼표가 필요한 사람한테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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