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이야기 | 2007/05/19 (토) 23:06
쓸쓸한 가을
전원 생활을 하는 즐거움을 가장 실하게 느낄 수 있는 계절이라면 아무래도 가을을 꼽아야 할 것같다. 봄에는 만화방창한 꽃을 즐길 수 있어 그 나름대로 즐겁지만, 가을은 국화 같은 가을꽃 말고도 오색단풍과 더불어 실과(實果)를 거두는 특별한 행복이 하나 더 있다. 잘 익은 대추를 턴다든가, 밤을 줍는다든가, 나뭇가지째 꺾어내리는 감, 잣 따위로 괜시리 마음이 풍족해진다.
그런데 전원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마추어라든가, 혹은 측은지심이 너무 강해서 농약을 쓰지 않는 집에서는 거둘 게 별로 없다. 가을이면 마땅히 즐겨야 할 오색단풍마저 벌레가 숭숭 먹고, 아무렇게나 칙칙하게 물들어 차라리 장대를 휘둘러 한꺼번에 털어버리고 싶을 때가 더 많다.
실과도 그렇다. 농약 안치고 딸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배 같은 경우 처음부터 봉지를 씌워 기르면 그래도 온전히 딸 수 있다지만, 배가 자라는 걸 감상하지 못한다는 단점 때문에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사과같은 건 거의 병이 들어 곰보처럼 썩어간다. 모과는 그래도 생명력이 강해서 웬만한 해충에 잘 견디는 편이지만, 주변 상황이 너무 나쁘면 잘 익질 못한다. 잣같은 경우에는 숫제 청설모가 주인이다. 그놈이 먹다 남으면 인간에게도 기회가 오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 까먹은 빈 껍질만 마당에 굴러다닌다. 꽃사과도 놀이동산에 열린 것처럼 주렁주렁, 붉게 익었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을 때가 많다. 오미자나 산수유 정도가 그래도 잘 버티는 축에 속한다.
사실 논밭이 바라다보이고, 산을 등진 웬만한 전원주택의 경우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논밭에서 쫓겨난 해충이 기껏 도망친다는 게 전원주택 마당이나 텃밭이기 때문이다.
농약을 쳐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마당에 잡초가 무성해질 때마다 그걸 뽑느니 제초제를 쳐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잘 핀 장미가 시들시들해질 때, 막 피려는 꽃봉오리마다 진딧물이 시커멓게, 혹은 새하얗게 붙어 있을 때면 살충제라도 뿌리고 싶은 욕구가 치민다.
나 역시 몇 번이나 약을 쳐보았다. 그런데 나무 밑에 수북이 떨어져내린 진딧물이나 각종 벌레를 보면 측은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제초제를 쓸 때는 땅속에 사는 지렁이며 개미, 땅강아지, 달팽이 따위까지 깡그리 죽는다. 장미꽃에 약을 주면 진딧물만 죽어야 하는데, 그 천적인 개미까지도 죽고, 나비도 죽고, 땅속의 지렁이도 죽는다. 하등 관련없는 생명들까지 예외없이 죽는 것이다.
마당 하나 건사하려면 약을 칠 때마다 수 만 마리의 생명을 죽여야 한다. 개미 같은 경우는 그들의 왕국 하나를 파괴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아니 겨울철의 파리까지 죽여야 할 곤충 따위를 헤아려 보면 수백만 마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수백만의 생명을 죽이지 않고는 견디기 힘이 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이 문제를 고민해 보았다. 저희들이나 나나 한 세상 왔다 가는 것인데, 길지도 않은 생명, 내가 좀 귀찮다고 중간에 툭 잘라버리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선택한 것은 농약은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초제도 물론이다. 다만 집안에는 소독을 철저히 해서 우리 가족의 건강만은 침해받지 않겠다는 쪽으로 정리를 해보았다. 함께 사는 장모가 이상한 벌레에 물려 두어 달 병원 신세를 진 뒤로는, 또 우리집 최연장견(犬)께서 모기에 물려 심장사상충인가 하는 병에 걸려 큰 고생을 한 뒤로는, 적어도 방어권은 가져야 한다고 결심했다. 또 딸이 혹시나 뇌염모기에 물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입장에서 밤중에만 해충퇴치기를 특정구역에 한해 가동하기로 했다. 이 모기를 잡지 못하면 대낮에도 아이를 마구 물어대기 때문에 이 점만은 타협이 어려웠다.
해충퇴치기의 대상은 대부분 모기나 하루살이다. 이따금 매미도 달라붙는데, 어쨌든 벌레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선택 사항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이 사는 데는 일단 불편한 게 줄었지만, 열무 따위의 소출은 형편이 없게 되었다. 그래도 해충에 강한 옥수수, 상추, 무, 오이 따위는 그런대로 괜찮다. 또 씀바귀, 고들빼기 등 야생 출신 소채들은 해충에 거의 피해를 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약을 치지 않은 지 몇 년 되다 보니 이상하게도 벌레가 줄어들었다. 물론 벌레가 잘 타는 특별한 채소, 이를 테면 열무 같은 것은 여전히 벌레 투성이지만, 생태적인 먹이사슬이 이루어져 그런 지 큰 손실은 없다. 물론 천적 관계에 있는 벌레들끼리 치열한 전쟁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얼마나 많은 전쟁이 우리집 마당에서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우리 식구들이 사는 거주 공간만은 철저히 지키고, 마당이나 텃밭에 관해서는 그곳에 사는 곤충들이며 채소들에게 자율권을 준 것 뿐이다. 이 세상이 또한 그렇지 않은가. 화(和), 더불어 함께 사는 수밖에 없다. 썩은 사과를 보면서, 빌어먹을 놈들, 배불리 먹었군, 너라도 배불렀으면 됐지 하면서 웃을 수밖에 없다. 전원에서는 이웃사람을 사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처럼 동물, 식물도 사귀고, 심지어 해충까지 잘 알고지내야 재미있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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