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이야기 | 2007/05/19 (토) 22:58
전원의 백미, 가을
가을은 쓰르라미가 우는 8월 중순부터 시작된다.
여름을 알리는 참매미라면 매앰매앰하고 우는데, 쓰름쓰름하고 우는 쓰르라미는 꼭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가을녘에 나타난다. 올해 그걸 구분해 들어보지 못했다면 내년에는 꼭 기억해 두었다가 들어보기 바란다. 풀벌레 소리를 구분해 듣는 것도 전원에 사는 즐거움이니까.
쓰르라미 울음소리로 시작되는 특별한 계절 가을.
전원에 살면서 가장 보람된 계절은 아마도 가을이 아닌가 싶다. 만화방창한 봄도 좋지만 잘 익은 단풍이나 지독하게 노란 국화꽃을 들여다보노라면 역시 가을맛은 깊이가 있어 좋다는 걸 알게 된다. 중년이나 노년의 아름다움처럼.
게다가 과실수라도 몇 그루 심어놓았다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특히 붉게 익어가는 대추를 바라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그걸 따서 입에 물었을 때 배어나오는 단맛이 작은 외로움쯤은 거뜬히 가시게 해줄 것이다. 사과나무나 배나무에 익은 열매를 감상하는 것도 좋다. 미리 봉지를 씌웠던 것이라도 햇빛이 좋은 가을에는 벗겨두는 게 좋다. 그래야 빛깔도 곱고 보기에도 좋다. 먹자고 기르는 게 아니니 오래도록 보고 또 보는 맛이 더 크다.
모과나무라면 그 맛을 초겨울까지 길게 즐길 수 있어 더 좋다. 다른 나무에 이파리가 다 져 몰골이 앙상할 때에도 모과만은 넉넉한 자태로 주렁주렁 열려 있을 테니 말이다. 굳이 먹고싶으면 사다 먹는 게 좋다. 아까워서라도 따기 어려울 것이다.
또 산수유의 그 붉디붉은 열매가 다닥다닥 달려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절로 난다. 산수유는 내버려두면 첫눈이 올 때까지도 자태를 잃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함박눈이 내리는 데도 붉게 빛나는 산수유 열매를. 그 아름다운 광경을 한번만이라도 보면 전원에 살길 참 잘했다고 자탄할 것이다.
석류가 익어 한 알씩 터지는 걸 보는 건 또 어떤가. 쩍 벌어진 석류가 보석같은 알갱이를 한껏 드러내면 그걸 바라보는 주인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석류는 중부지방 이하에서만 된다.) 여주 같은 열매가 멋을 드러내는 것도 이즈음이다.
배추나 무를 심어 놓고 그것들이 날마다 자라는 걸 지켜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배추나 무는 자라는 게 눈에 보인다. 장딴지만한 무우가 흙을 쳐들고 쑥 올라와 자라는 모습이나 터질 듯이 풍만한 자태로 자라오르는 배추를 보면 잔 걱정은 다 사라진다. 배추쯤은 뽑아먹지 않고 12월 중순까지 그대로 두어도 보기에 좋다.
무나 배추에 달팽이며 배추벌레, 그걸 먹겠다고 달려드는 사마귀 등이 제 세상이라고 붙어사는 걸 보면 우주가 집안 텃밭에 내려앉은 기분이 든다.
해바라기나 수수 같은 키 큰 작물을 서너 그루 심어놓으면 가을을 즐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늘 높이 자라 올라 사람 얼굴보다 더 크고 둥글넓적한 해바라기 열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어대는 수수이삭이라면 가을 맛을 훨씬 더 맛깔스럽게 해줄 것이다.
가을이 더 좋은 것은 여름 내내 찌부등하게 내려앉아 있던 습기를 모조리 거둬가기 때문이다. 목조주택의 경우 장마며 습기 높은 여름 날씨는 매우 치명적이다. 여름 내내 곰팡이가 슬고 눅눅하던 집이 가을 바람이 불면서부터 깨끗이 마르기 시작한다. 목재용 특수 페인트 따위를 칠하는 것도 이때가 좋다. 수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을의 기온이 여름보다 높을 리 없지만, 그래도 무얼 건조시키는 데는 가을바람이 그만이다. 그래서 가을에는 정원수며 텃밭에 더 물을 자주 주어야 한다. 며칠 비가 안오고 햇빛만 내리쬐면 여름보다 더 건조해지기 때문이다.
단풍가지고 자신의 집이 어떤 조건에 있는지 거꾸로 알아볼 수도 있다.
가을 단풍이 곱게 들었다면 그 집은 일교차가 비교적 큰 집이거나 고도가 높거나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습기가 많은 지역에서는 단풍이 곱게 들기 어렵다. 또 유난히 벌레먹은 이파리가 많은 것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습기가 너무 많아 곤충이 서식하기 좋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혹 배수가 잘 되고 있는지, 주변에 고인 물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고인 물은 도무지 도움이 안된다. 거기서 모기 등 온갖 나쁜 곤충이 서식하기 때문이다.
이런 집에서는 늦가을이 되어 창문을 열어놓지 않거나, 열어놓더라도 반드시 방충망을 해 놓아야 한다. 무당벌레를 비롯해서 겨울을 나려는 곤충들이 함께 겨울을 나자며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담을 콘크리트로 치지 않았다면, 독이 오른 뱀을 막기 위해 집 주변에 뭔가 해야 한다. 백반을 뿌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것도 아니란다.
이렇게 다 준비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하늘을 감상하자. 가을하늘은 여느 계절보다 아름답다. 천고마비(天高馬肥)한 이 계절에 옛날의 중국 사람들은 유목민들이 쳐들어올까봐 전전긍긍했다지만, 우리네는 그럴 까닭이 없다. 습기가 줄어든 하늘은 더 높아 보이고, 지상에서 빨려올라간 습기가 만들어낸 가을구름은 더 아름답다.
저녁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도 가을이다. 여름에는 습기가 너무 많고 부유먼지가 많아 노을이 맑질 못하고 누렇거나 벌걸 뿐인데, 가을 노을은 적당한 습기와 적당한 먼지로 찬란한 색감을 연출한다. 마른 구름이 약간 있고 날씨가 맑은 날, 의자를 내놓고 저녁노을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해보는 것도 아주 좋다. 그러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저밀 것이다. 좀 두꺼운 옷을 입어 온도가 뚝뚝 떨어지는 것에 대비하는 걸 잊지 말고.
전원의 가을은 이렇게 찾아서 즐겨야만 한다. 안그러면 이 쓸쓸한 가을을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나이든 부부들이 내려와 한적하게 사는 집이라면 더더욱 쓸쓸해 못견딘다. 그래서 가을은 공격적으로 즐겨야만 하는 것이다. 올해 혹 가을을 즐기는 데 실패했다면 내년에는 미리 준비해두었다가 백 퍼센트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