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하는 말이지만 말은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지난 19세기말부터 불어닥친 과학 기술의 갑작스런 발달로 새로운 말이 엄청나게 쏟아져나왔다. 그럴 때마다 말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사이에 나온 수많은 새로운 말들은 일본어를 거쳐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받아쓸 수 있었다. 일본 정부 관료나 학자들이 일본어로 번역해 놓으면 우린 그냥 갖다가 우리 식으로 읽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얼마나 많은 어휘가 일본식인지 가늠조차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 이를 고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며칠 전부터 돼지 인풀루엔자, 돼지 독감이란 말이 쏟아져나오면서 어디서는 SI라고도 하고, 또 누군 멕시코 인풀루엔자 혹은 줄여서 MI라고도 한다. 정신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있으면 으레 '관계부처 회의라는 곳에서 공무원들이 정해버리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부는 지난 26일 긴급 관계부처 회의에서 이번에 발병한 바이러스를 ‘돼지 인플루엔자’(Swine Influenza)로 부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돼지 독감’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자칫 양돈산업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이렇게 정리했다는 것이다. 조류 인플루엔자를 ‘에이아이’(AI:Avian Influenza)로 줄여 부르는 것처럼, ‘에스아이’(SI:Swine Influenza)라는 약어를 쓰는 것도 검토했지만 ‘계절성 독감’(Seasonal Influenza)과 혼동을 일으킬 수 있어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는 설명까지 있다.
이나마 재빨리 용어를 정리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칭찬할 만하다. 지난 번 허베이스프릿호 사건 때처럼 용어 정리가 안되어 태안기름유출사건이라는 이름을 퍼지고, 이때문에 태안 주민들에게 또다른 상처를 준 것에 비하면 이번에는 꽤 빠른 셈이다.
하지만 정부가 그렇게 정했다고 해서 민간 언론과 방송이 의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벌써 여기저기서 혼란이 생긴다.
물론 정부공식 용어를 돼지 인풀루엔자라고 하는 것이지 저마다 생각이 있으면 그 생각대로 말을 만들 수 있다. 벌써 국제수역사무국은 북미인풀루엔자로 정해 줄임말은 NI로 부르기로 하고, 국제보건기구에서는 SI라 하여 우리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정부 방침과 달리 이를 따르고, 돼지란 용어에 민감한 농수산부는 멕시코 인풀루엔자로 하면서 MI로 공식 명칭하겠다고 나섰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안타까운 것은, 왜 정부 마음대로 말을 지어내려 하는지 참 마음에 안든다. 여기서 정부란 곧 고위급 공무원들인데, 이들을 포함하여 우리말 전문가들이 함께 토론하는 기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긴급하게 만들어지는 시사용어에 대해 이 기구에서 충분히 토론하여 발표하는 식으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야 한다. 공무원들이 말을 만들면 갓길을 노견으로, 도로 확장은 확포장으로, 쓰레기 함부로 버리기는 투기로 바뀐다. 어떻게든 어려운 한자를 갖다 억지로 꿰어맞추려 하는 오랜 관습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아니면 일본 자료를 뒤져 일본은 뭐라고 하나 봐서 그걸 갖다 그냥 쓰려고 한다.
그러니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개념이 생길 때마다 이를 다룰 기구가 있어 이런 데서 충분히 토론하여 정했으면 좋겠다. 국립국어원 같은 좋은 기구를 두고도 활용도 안하고, 물어볼 생각도 안하니 참 답답한 일이다. 국립국어원 같은 좋은 기구를 홀대하면 안된다. 공무원들은 어떻게든 국립국어원의 지위를 끌어올려 말에 관한 한 이들이 나서도록 비켜서야 한다. 서로 전문성을 존중해야지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모든 분야를 돌아가며 북치고 장구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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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 돼지 인플루엔자(SI)가 사실상 돼지와 관련성이 없음이 역학조사 결과 밝혀짐에 따라 세계보건기구(WHO)가 SI의 명칭을 '인플루엔자 A형(H1N1)'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WHO는 30일 자체 웹사이트(www.who.int)에 게재한 긴급공지를 통해 "오늘부터 WHO는 신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인플루엔자 A(H1N1)로 부르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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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나라 방송에서는 '인플루엔자 A형'이란 발음이 어려워서 그런지 느닷없이 '신종 인풀루엔자'로 하겠다면서 줄여 '신종 플루'로 부르겠다고 한다. 심히 수상해서 왜 그런가 알아보았더니 역시 일본 사람들이 먼저 '신형 인플루엔자'로 부른 모양이다. 일본 따라가면 쉽기야 참 쉽지. 아래 글은 중앙일보가 '신종플루'라고 하겠다며 적은 이유다.
- (중앙일보) 전염병예방법에 신종 인플루엔자라는 이름이 있고, 일본이 신형 인플루엔자로 부르고 있는 점을 감안해 신종 인플루엔자를 같이 쓰기로 했다. 보건복지가족부 출입기자단은 (5월 1일) 1일 회의를 열어 ‘신종 플루’로 줄여 쓰기로 결정했다.
이 글을 보니 더 실망스럽다. 기자단이 토론한 것만으로 이 질병의 명칭이 정해지다니... 보건복지부 출입기자단이 무슨 자격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이 명칭은 크게 잘못됐다. 우선 플루야 인풀루엔자의 줄임말이니 넘어가고, 신종이니 일본식으로 신형이니 하는 건 정말 잘못된 것이다. 해마다 새로운 인풀루엔자가 출현하고, 인풀루엔자의 변형이 일어나는데 그럼 내년이나 그후에 생길 인풀루엔자는 어떻게 부른단 말인가. 좀 생각해 보면서 이름을 지었으면 좋겠다. 이 기자단이라는 자들이 작년에 일어난 허베이스프릿호사건을 태안기름유출사건이라고 이름지어 태안주민들을 더 고통스럽게 한 자들 아닌가. 좀더 전문가들의 뜻을 모아 이름을 지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전문가라면 우리말 전문가를 비롯해 질병관리본부 쪽 전문가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전문가 무시하고 아마추어가 날뛰면 일이 틀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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