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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

한자 발음, 그 첫 단추를 잘못 꿰다

이재운의 <우리말의 탄생과 진화>

- 한자 발음, 그 첫 단추를 잘못 꿰다

 

한자가 도입된 이후 우리말 어휘가 풍부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순우리말이 크게 위축되기도 했다. 이제 와서 한자어를 우리말에서 몰아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자 표기가 거의 사라져가는 지금 ‘의미 없는 발음’만 남은 한자어를 적극적으로 쓸 수도 없는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

한자를 적지 않은 ‘한자어 독음’은 당황스럽고 낯설다. 어떤 단체에서 내세우는 초아의 봉사란 게 뭔지, 법전에 나오는 몽리, 저치, 전촉, 결궤, 호창, 분마, 장리, 삭도, 정려를 외우는 고시생들은 무슨 비밀 전문을 보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한자어가 들어온 이후 우리말을 지키려는 노력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이두(吏讀), 반절(反切), 향명(鄕名), 각운(脚韻), 향찰(鄕札), 구결(口訣) 등 갖은 방법으로 우리말을 표기하려 노력했지만, 우리말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보니 결과적으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훈민정음이 공용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멸망할 지경이 돼서야 겨우 가능해졌다.

이런 가운데 큰 공을 세운 것이 이두로 표기한 향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살아남은 순우리말 동식물 어휘 중 대부분이 이 향명을 적는 기법으로 전해져온 것이다.

향명을 적는 기법 중에 훈독자(訓讀字)라는 것이 있는데 한자의 뜻을 이용하여 순우리말을 적는다. 즉 味를 ‘맛’으로, 月을 ‘달’로 읽는 것이다.

草 : 풀 母 : 어미 紛 : 가루 皮 : 껍질 畓 : 논 太 : 콩

그런데 한자어를 받아들일 때부터 중국 발음을 버리고 이처럼 우리말로 한자를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큰 혼란 없이 우리말을 지켜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경우에 따라 음독(音讀)을 하기도 하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면 훈독(訓讀)을 해 우리말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왕 한자어의 사성(四聲)을 버렸으면 훈독을 할 일이지 왜 중국식도 아니고 우리식도 아닌 어정쩡한 발음으로 읽어 오늘날 이같은 혼란을 일으켰는지 참 아쉽다.

예를 들어 朝日이라고 써놓고 아침해라고 읽는 것이 훈독이요, 조일이라고 읽는 것은 음독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향명 외에는 훈독을 하지 않고 오로지 음독만 해왔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말의 원형을 찾아보기가 대단히 어렵다. 훈독을 했더라면 오늘날 우리말 어휘는 굉장히 풍부해졌을지도 모른다. 한글 창제 이전이라도 우리말을 얼마든지 한자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鹽田이라고 적어놓고 ‘염전’이라고 읽으면 중국인들도 알아듣지 못하고, 우리말과도 전혀 상관이 없는 발음이 된다. 한자의 발음가가 한자 전래 시기의 중국음과 비슷할지는 몰라도 오늘날의 중국인들 발음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굳이 수천 년 전의 한자 발음을 우리가 지킬 이유가 없다. 그러니 쓰기는 鹽田이라고 해도 읽을 때 ‘소금밭’이라고 하면 어린 학생들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한자어를 읽을 때는 우리 뜻으로 읽고,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원래대로 발음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같다. 그러면 우리말과 한문의 문법이 달라 말 순서가 전혀 다른 어휘, 완전히 한자어 발음으로 굳어진 어휘 등을 빼도 절반쯤은 우리말로 한자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예를 들어보면 그것이 훈독자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大田 : 큰밭 家畜 : 집짐승 櫻花 : 앵두꽃 田畓 : 논밭

國語 : 나랏말 大路 : 큰길 鷄卵 : 달걀(닭알)

雨水 : 빗물 上水 : 윗물 下水 : 아랫물

雨期 : 장마철 桃園 : 복숭아밭 草原 : 풀들

雨水 : 빗물

 

힘들어도 노력해야 한다. 고사리, 솜다리 같은 우리 꽃, 우리 식물이 향명이란 이름으로 살아남은 게 바로 이같은 훈독 덕이었다. 한자어를 훈독하는 운동이 일어나 우리말이 우리말다워지는 날이 어서 오기 바란다.

 

이재운(소설가․『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대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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