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가족들과 태안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에 갔다.
자그마한 곳이라 그런지 해수욕을 하는 사람이 적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에 좋았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난 내가 쌍용차 사태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으로 평택까지 갔다가 잘못하여 아산을 거쳐 당진, 서산, 태안으로 가게 되었다. 태안반도라는 곳이 워낙 서쪽으로만 삐죽 나가 있어서 맨정신으로는 감을 잡기 어렵다. 지도를 봐야만 하는데, 멋대로 가다가 길이 잘못되었다.
그래서 길 잘못들어 당진 지나던 이야기를 하는데,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어머니는 시골집에서 당진까지 오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신기해 하시면서
"옛날에 네 고모하고 감 팔러 당진장까지 왔었다. 그땐 예산장이나 청양장이나 다 고만고만했는데 지금은 뭐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당진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는 옛날에 감팔러 왔던 당진이 놀랍도록 발전했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세 아들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다리 아파 잘 걷지 못하는 원인이 어머니 젊어서 너무 고생한 탓이라는 걸 다 알기 때문인데, 어머니가 또 그 시절 얘기를 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이다.
전에 듣기로 어머니는 감을 따다 우려서 청양장이나 신양장에 내다 팔았는데, 이게 안팔리거나 값이 맞지 않으면 예산장, 덕산장까지 나가 팔았다는 말은 들었다. 그런데 그 먼 당진장까지 가 감을 팔았다는 말은 이번이 처음이다.
"예산, 덕산에서 팔고말지 왜 당진장까지 가셨대요?"
"당진은 논농사만 짓는 땅이라 감이 없거든. 잘 팔리더라구."
"당진장이 감 잘 팔리는 건 어디서 듣고?"
"네 고모가 장마다 돌아다니는 장사꾼 아니었니? 그래, 당진장 가자고 해서 구경삼아 갔지."
돌아가신 우리 고모와 어머니는 경오생 동갑내기다. 광천에 살던 고모는 주업이 새우젓 등 젓갈류 판매였는데, 광천 주위의 여러 장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그런 길에 친정집에 숱하게 많은 감을 어느 장에 팔면 좋을까 나름대로 정보를 들어다 어머니께 드린 모양이다. 고모는 시골집이 있는 운곡장을 5일단위로 찾아와 장사를 하는데, 그럴 때면 하룻밤 꼭 묵어가곤 했다. 그러면서 당진장에 가보자고 어머니를 꼬드겼던 모양이다.
- 자식들이 놀고 있는 백사장을 홀로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
자료를 보니 운곡장은 1일, 6일장이고, 당진장은 5일, 10일장이다. 고모가 2일, 7일장인 청양장을 볼 때이니 겹치지도 않는다. 운곡장이나 청양장은 워낙 감이 많이 나는 곳이니 매력이 없고, 당진장에 가면 감이 귀해 잘 팔릴 것이라고 귀띔한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당진까지 가서 감을 팔아요? 감 팔아야 얼마나 된다고?"
"그래야 너희들 속옷이라도 깨끗한 걸로 사입히고, 추석이나 설에 새옷 사주지."
그 말을 들으니 초등학교 시절, 내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떡갈잎 따고 칡 줄기를 끊어온 기억이 나 얘기를 했다. 동생들은 내가 어머니 따라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며 칡 끊어 짊어지고 오는 게 늘 부러웠던지 저희도 간다고 따라나서곤 했다. 내가 5학년쯤 무렵이니 열두 살쯤 됐을 때고, 네째는 열 살, 막내는 일곱 살 때다. 그 나이에 칡다발을 등에 짊어져봐야 몇 개 지지도 못하기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지고, 네째라도 집에 남아 막내를 봐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동생들은 절대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낮에는 산에 가서 칡을 끊어 짊어지고 오는데, 오자마자 가마솥에 삶아 부엌칼이나 과도로 껍질을 벗기면 속에 남은 하얀 섬유질인 청홀치를 얻을 수 있다. 이걸 지름 2센티미터쯤 되게 다발로 묶으면 하얗게 빛나는 게 멋지게 보였다. 그걸 내다 팔면 제법 돈을 받았던 듯하다. 껍질 삶는 건 아버지 몫이었는데, 벗기는 작업은 온가족이 다 둘러앉아 했다. 주로 요즘같은 8월에 이 작업을 하는데, 형들이나 아버지는 낮에는 밭일을 해야 하므로 칡을 끊으러 다니지는 못하고 어머니와 나만 다니고, 그대신 밤이면 온가족이 이 일에 매달렸다. 동생들도 이 일은 즐거이 끼어서 해냈다.
"봄에는 떡갈잎 따다가 팔았잖아요?"
"일본에 수출한다고 해서 따다 삶아서 팔았지. 멍가잎도 따고."
일본 사람들이 모찌라는 떡을 좋아하는데, 이걸 쌀 때 맹가잎(충청도에서는 멍가라고 부른다)이나 떡갈잎을 쓴다. 일본에 맹가잎이나 떡갈잎이 없어서 우리나라에서 수입해간 게 아니라 노임 비싼 일본인들 대신 임금이 엄청나게 싼 우리나라 사람들 노동력을 활용한 것이다. 요즘 우리가 중국산을 쓰는 것처럼.
이런 기억이 있다보니 저기 저 블로그 대문의 글처럼 지금도 어딜 가다 쭉 뻗은 칡줄기를 보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걷고 싶다. 산길을 가다 이런 좋은 먹칡이 여러 개 있으면 "엄마, 여기 칡 많아!" 하고 소리치던 기억이 난다. 떡갈잎이나 맹가잎은 벌레가 먹기 쉬워서 온전한 걸 구하는 게 어렵다. 그래서 어쩌다 큰 떡갈나무에 좋은 잎이 많이 달려있는 걸 보면 무슨 노다지라도 만난 것처럼 즐거워했다. 지금도 등산 중에 벌레먹지 않은 깨끗한 떡갈잎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난 그때 너무 어려서 청홀치나 떡갈잎, 맹가잎이 얼마나 돈이 됐는지 잘 모른다. 삶은 떡갈잎이나 맹가잎은 같은 크기대로 50개씩 실로 묶어 중간업자에게 팔았는데, 면소재지 마을까지 걸어가서 내가 직접 판 기억도 있다. 돈을 받아다 드리기도 했는데, 돈에 대한 감각이 없어 얼마나 됐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쨌든 이런 노력으로 속옷이나 새옷을 사입는 데는 성공한 모양인데, 큰돈이 안되다보니 둘째형 중학교 입학하는 비용조차 대질 못했다. 그러니 그렇게 온산을 다 헤매다녀봤자 별 돈이 안되었던 모양이다. 둘째형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에 가지 못한 설움을 털어버리고, 더 부가가치가 높은 부업에 나섰는데, 약재를 캐거나 따오는 일이었다. 오배자니 뭐니 하는 것들을 따다 삶아 말린 뒤 내다파는데, 내가 중학교 다니는 비용에 보태진 것같다. 이런 중에 늦가을에는 밭가에 심은 감나무에서 감을 따다 멀리 내다 팔았던 것이다.
당시 감장수들이 트럭을 끌고 들어와 나무째 사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식구가 많은 우리집은 결코 그들에게 팔지 않고 직접 따고 우려서 장에 내다 팔았던 듯하다. 그래야 제값을 받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는 감의 인기가 시들해 팔리지도 않고, 사가는 사람도 없어 지금은 동네에 감나무가 많이 줄었다. 있는 나무도 잘 따질 않아 까치밥이 되곤 한다. 수입 과일이 워낙 다양하고, 단감이 나오면서 우려먹는 감은 감 축에 들지도 못한 것이다. 그래도 초겨울까지 매달려 있는 골감을 보면서 옛 생각을 하고, 그래서 일부러 나무를 베어버리지는 못한다. 돈이 되는 유실수에서 관상수가 되도록 참 곡절을 많이 겪었다.
기억나는대로 적어본 1960년대 후반 우리집 부업
- 봄 / 고사리 등 나물 따다 삶아 말려서 둥글게 뭉쳐 팔기(어머니)
창출 뿌리 캐다 팔기(어머니, 나)
관솔따기(용도가 뭐였는지 기억이 안난다)
- 늦봄 / 맹가잎, 떡갈잎 따다 쪄서 말린 뒤 팔기(어머니, 나)
- 여름 / 칡 끊어다 청홀치 만들어 팔기(어머니, 나)
반하 뿌리 캐서 말린 뒤 팔기(둘째형)
복사 따다 씨를 빼어 말려 팔기(둘째형)
- 가을 / 오배자, 하수오(해박쪼가리), 등 산약재 구해다 말려서 팔기(둘째형)
- 늦가을 / 감 따서 우린 뒤 장에 이고 가 팔기(어머니)
- 겨울 / 새끼 꼬고 가마니 치기(둘째형)
땔나무나 장작 만들어 팔기(둘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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