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본 춘성 스님
글 / 무애(無碍)
* 인터넷에서 구한 글임. 무애 스님, 글 게재를 원하지 않으시면 삭제할 것이니 혹시 보시거든 댓글을 달아주세요. 제목은 제가 달았습니다.
춘성(春城) 스님은 유명한 만해(萬海)의 유일한 상좌이다.
춘성 스님과 스승인 만해를 생각하면 나는 늘 두 가지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만해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시인이며, 기미독립선언문(己未獨立宣言文)을 초안하고,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엮고, 월간잡지 『불교』를 주간했으며 그의 문장은 지금도 명문(名文)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만해는 동서고금의 학문에 있어서도 남다른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같이 글과 지식과 학문에 있어서 가히 독보적인 세계를 지닌 만해가 그의 유일한 상좌인 춘성 스님에게 글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왜 글 공부를 못하게 했는지 그것이 의문의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만해 자신은 장가를 들어서 딸까지 두었음에도 상좌인 춘성 스님은 장가를 들지 못하게 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게 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승려의 결혼문제에 대한 만해의 주장 또한 유명하다.
만해는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에서 "어떻게 하면 장차 불교를 흥왕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승려들에게 금지하고 있는 결혼을 해제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라고 대답하겠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이 싫어서 집을 지을 때, 총독부를 등지고 북향(北向)으로 지을 정도로 항일정신(抗日精神)에 투철한 그가 승려의 결혼에 관한한 일제(日帝)의 통감부(統監府)에 승려가 장가드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탄원을 하고 있어서 모순을 느낀다.
이같이 이율배반을 하면서까지 승려의 결혼을 주장하는 만해가 어찌해서 상좌인 춘성 스님에게는 장가를 들지 못하게 했는가, 생각할수록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이 두 가지 의문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 때는 나의 은사(恩師)께서 총무원장을 맡아 계시면서 서울로 부르시어 잠시 조계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의 조계사에는 최근 헐어버린 정화회관 터와 이어서 한옥 요사채가 있고, 지금의 총무원 건물 자리에는 단층 일본식 건물이 있었으며 서문(西門)에 문간방이 있을 뿐이어서 대중이 잠잘 곳이 없었다.
때문에 낮에는 총무원과 조계사에서 일을 보던 스님들은 밤이면 선학원이나 대각사 등 가까운 절로 잠자리를 찾아가고는 하였다. 그러나 가까운 절을 찾아가도 잠자리가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본방(本坊) 스님들 불편하고 나 또한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여서 아예 조계사 대웅전에서 잠을 자는 것이 훨씬 편했다.
나만이 아니고 다른 스님들도 대웅전에서 잤고, 마땅히 찾아갈 만한 절이 없는 객승(客僧)들도 함께였다.
대웅전 마루바닥에 방석을 두세 개 깔고 누어서 방석 하나를 배 위에 올려 놓고 잤다. 그나마 늦어서 방석이 없으면 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발을 뻗은 채 졸기 예사였다.
이 무렵, 조계사 대웅전에서 밤을 보내는 스님 중에 춘성 스님이 계셨다.
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정진을 하기 때문이었다. 장좌불와란 눕지 않고 밤 새워 좌선(坐禪)하는 것을 일컫는다.
어느 날 밤, 스님과 나는 같은 기둥에 등을 대고서 밤을 지새게 되었다.
평소 가지고 있던 그 두 가지 의문을 이 기회에 스님에게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님, 만해 스님 자신은 글을 숭상하면서 상좌인 스님의 글공부는 왜 못하게 했습니까?"
"그거야 내가 하기 싫어서지. 하지 말란다고 하고 싶은 것 내가 안 하나."
"스님이 가지고 계신 조선어 독본을 빼앗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긴 했지. 어떤 궁녀가 내게 글을 배우라고 책을 주었지. 그것을 스님이 빼앗았지."
"그때, 무슨 말씀이 없었습니까."
"어설픈 글은 왜놈의 앞잡이 밖에 될 게 없다는 게야. 차라리 무식한 편이 이 왜놈 앞잡이도 피하고, 그 편이 낫다 이 말씀이야."
"글공부는 그렇다 하지만, 왜 장가드는 것은 막으셨습니까."
"우리 스님 말씀이, 무식한 놈이 권속은 무슨 재주로 먹여 살리느냐 이거야. 당신도 권속을 못 먹였으니 옳은 말씀이야."
그러나 이러한 대답으로는 내 의문이 가실 길이 없었다.
만해의 독단과 이율배반을 더 절실하게 느낄 뿐이었다.
춘성 스님은 무식해서 권속을 먹여 살릴 재주는 없었을지 모르나, 도리어 많은 스님들에게 보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스님은 남루한 옷을 입은 수좌를 보면 당신의 옷을 수좌의 남루한 옷과 으레 바꿔 입었다.
당신이 입은 옷이 방금 지은 새 옷일수록 남에게 벗어 주기를 좋아 하셨다.
옷을 지어준 시주를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벗어주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
"저 수좌는 옷을 지어 주는 시주가 없으니 내가 시주해야지. 나는 시주가 많아. 그래야 그 사람들이 새 옷을 또 지어 줄 것 아닌가."하고,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내가 옷 벗어 주는 것이 보살들 복 짓게 하는 게야.” 하면서 웃으신다.
어느 날, 스님께서 기둥에 등을 대고 두 다리를 뻗고 계시는데 양말이 짝짝이었다.
흰 것과 검은 것 짝짝이를 신고서 두 다리를 쭉 뻗고서 천연덕스럽게 앉아계시는 스님을 보면서 홍소를 금치 못하는 나에게 "별 놈 다 보겠구나, 따로따로 보지, 두 발을 함께 보고서 분별심을 내느냐." 하신다.
과연, 발 하나씩 따로 떼어서 보면 짝짝일 리 없는 것을 두 발을 함께 보니까 짝짝이 된다.
스님의 그 말씀에는 기성(旣成)의 관념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선기(禪機)가 숨어 있다.
그것은 일상적(日常的)인 관습의 껍질로부터 벗어나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각설하고, 그때 스님께서 신은 짝짝이 양말은 남이 신고서 버린 헌 양말이었다.
스님은 주지를 맡은 적이 별로 없으나 한때, 망월사 주지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때 스님은 불타버린 법당터에 돌로 법당을 짓고 있었다.
입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가 돌로 짓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돌로 짓는 것이 나무로 짓는 것보다 돈이 덜 든다는 이유로 돌로 지을 것을 고집하였다.
어느 날, 시주가 찾아와 법당 전면(前面)의 문짝 값을 두고 갔다.
마침 그때 병객(病客)수좌가 찾아와서 약값을 보태달라고 하였다.
스님은 아무 말없이, 그저 "성불하십시오."하고서 봉투째 내밀었다.
돈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헤아려 보지도 않고….
넓죽 큰절을 하고서 약값을 받아든 병객 수좌가 산을 내려간 뒤에 시주돈이 얼마인지나 살펴보시고 주어도 주셨어야 한다고 참견을 하자, 스님은 "돈을 세면 무엇하느냐. 아까운 생각만 들 것을." 하신다.
법당 지을 돈이 모자라 가뜩이나 어려운 때에 그렇게 하시면 되겠습니까 하는 말에, 스님은 "돌부처보다 생불(生佛)을 공양하는 것이 낫다." 하신다.
이러하니 법당 짓는 일은 자꾸 지연되고 자재값과 인건비는 밀리고 끝내는 빚쟁이에게 졸리다 못해 주지를 내놓고 마셨다.
대한불교신문사에 근무하던 시절, 어느 날, 신문사에서 일에 열중해 있는데 노신사 두 분이 내 앞에 말없이 다가와 섰다.
앉은 채 올려다보니 춘성 스님과 유담 스님 두 분이 나를 이상한 동물이라도 구경하듯이 내려다보고 계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두 분이 다 양복을 입고 계신 것이었다.
유담 스님은 워낙에 속가에 나가서 사시므로 평소에 양복을 자주 입으시지만 춘성 스님이 양복을 입으시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이날의 춘성 스님은,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귀한 영국제 양복을 입고 계시는 것이었다.
조끼를 받쳐입은 밤색 싱글에 나비 넥타이, 거기에다 카키 빛깔의 바바리 코드 차림에 챙이 짧은 회색 중절모를 쓰고 계셨다.
70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멋진 노신사가 그 희고 두꺼운 눈썹을 치켜세우고서 "내 모습이 어떠냐?"하신다.
나는 그저 "하, 멋집니다" 하였다.
그리고 "스님, 오늘은 웬일이십니까. 모양을 다 내시고" 물으니, "내가 입고 싶어서 누구에게 부탁을 했더니 해주더만" 하신다. 그리고 킬킬 웃으신다.
유담 스님은 부산에 사시는데 KBS TV에 출연하시기 위해서 서울에 오셨다고 한다. 유담 스님은 여러 가지 피리를 잘 부시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퉁소의 명인(名人)이셨다.
그래서 부산에서는 자주 방송국에 나가셔서 피리를 불고는 하셨는데 이번에는 서울 KBS TV에 출연하시게 되어 상경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분이 모처럼 만났으니 오늘 저녁에는 어디 기방(妓房)에 가서 걸직하게 한판 법석을 떨고 싶은데 두 분만 가시기는 멋쩍으니 젊은 친구를 한 사람 데리고 가기로 하고 그 젊은이로 내가 뽑혔다는 것이다.
두 분 노스님이 나를 어여삐 보시고 뽑아주신 것은 감사하나 돈 걱정이 앞섰다.
두 분에게 술값을 치루게 할 수는 없고 내가 감당하자니 호주머니가 빈약했다.
그거야 모른 척하고 있으면 노스님들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만, 젊은 사람이 어른을 모시고 가서 술값을 모르는 척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과는 달라서 젊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른을 대접하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다.
어른을 모시고 주석(酒席)을 함께 하거나 식사를 하게 되면, 단순히 음식을 먹는 일에 그치지 않고 담소(談笑)하는 사이에 그분들이 가진 체험을 통한 경세(經世)와 철학과 지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요즘 한창 회자되고 있는 산 교육을 받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스승에게 답례하듯이 대접을 하였다.
그 때문에 젊은이가 어른의 접대를 받으면 그것은 결례가 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돈이 없어서 어른에게서 접대를 받았다면 그것은 더욱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방 대신에 외상이 통하는 일식집에 모시기로 했다.
핑계인즉슨 당시 군사정권이 기방은 폐지했으므로 갈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갑종(甲種) 요정이 종로 일원에는 얼마든지 있었고 또 을종(乙種)이라고 하는 값이 많이 헐한 내국인용 요정도 많았다.
그것을 두 분 노스님께서 모를 리 없음에도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신 것은 돈 없는 내 자존심을 살피셨기 때문이었다.
그 날, 두 분 노스님을 모시고 간 곳은, 지금은 헐리고 다른 건물이 들어선 신신 백화점 안에 있는 신신 일식집이었다.
2층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술과 안주를 시키는데 두 분의 기호가 같지 않아서 유담 스님은 정종을, 춘성 스님은 맥주를 시켰다.
또 유담 스님은 장어구이를 즐기시고 춘성 스님은 맥주를 드실 때면 안주로 김이면 족했다.
그리고 두 분이 다 소식(小食)에다 취하도록 마시는 성미가 아니어서 시키는 술상도 값이 나가지를 않았다. 그러니 전혀 술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때, 이 신신 일식집에는 마담도 옥(玉)씨이고 지배인 남자도 옥씨였다.
초저녁에 2층 방을 차지한 노신사들이 시킨 안주가 값 나가는 것이 아니니 아래층에서 지배인 옥씨가 올라와 마담 옥씨와 주고받는 말이 주문을 잘못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마담 옥씨는 그렇지 않다 하고, 지배인 옥씨는 그럴 리 없다 하고, 끝내는 두 사람이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와서 확인하게 되었다.
그 때, 춘성 스님께서 두 남녀에게 "각씨들이 무슨 일인가" 하셨다.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스님께서 "옥(玉)이 둘이니 합하면 각(珏) 씨가 아닌가. 다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하신다.
그제야 두 남녀는 입을 막고 웃고, 마담은 "절더러 스님의 각씨라 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이 두 남녀를 옥씨라 부르지 않고 각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특히 마담 옥씨는 이로 인해서 다른 손님으로부터 오해를 사기도 했다.
헌데, 해프닝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춘성 스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벗어서 지배인에게 주면서 입으라고 하셨다.
영문을 몰라 망설이는 지배인에게 다가간 스님이 강제로 지배인의 검정색 바지를 벗기고 자신의 바지를 입혔다.
그리고 자기가 지배인의 바지를 입고, 나머지 저고리와 조끼를 지배인에게 안겨 주면서 가지라고 하셨다.
놀란 사람은 당사자인 지배인만이 아니었다.
그 때는 일식집 2층에는 술시중을 드는 여자들이 있고, 또 술과 안주를 나르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포함해서, 아래층에서 이 해프닝의 소식을 듣고 올라온 주인까지 놀라기도 하고 노스님이 젊은 사람을 놀리는 것으로 알았다.
내가 스님에게 "모처럼 부탁해서 해 입은 새 옷을 하룻만에 남을 주어서야 됩니까?" 하니, 스님께서 "입고 싶은 옷, 하루 입었으면 족하지, 평생 입을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루를 입든 이틀을 입든, 언젠가는 벗어야 할 껍데기다." 하신다.
그제서야 모두가 스님을 믿게 되었다.
지배인은 물론 백번 감사해 하고, 주인도 감사해 하고, 그 덕에 그 날의 저녁은 거저였다.
스님의 인기가 대단해진 것은 말할 것 없고 그러한 멋쟁이 스님과 작반을 한 나까지 덩달아서 인기가 상승한 것은 물론이다.
각설하고, 유담 스님 이야기가 나왔으니 퉁소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한다.
1958년이던가,
부산 금정사의 선방(禪房)을 새로 짓고 있었다.
그 때, 금정사 주지스님은 경월 스님이었다.
그 무렵 경월 스님은 유담 스님에게서 퉁소를 배워 실력이 상당하였다.
때때로 일주문 밖에 나가 퉁소를 불면 일주문 앞에 늘어선 판잣집 사창가 여자들이 몰려와 듣고는 했다.
한편, 이 사창가 앞에서는 때때로 기독교인들이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목사는 쉰 목소리로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다.
선방의 상량도 끝나고 개와를 올릴 차비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경월 스님에게서 날을 정해 금정사에 들르라는 전갈이 왔다.
이유는 선방을 낙성했을 때, 『선관책진(禪關策進)』을 번역해서 간행하여 법보시하기로 하고 그 일을 고 처사(高處士. 출가 전의 光德 스님 호칭)에게 맡겼으니 서로 만나 상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정해진 날에 금정사에 가니 고 처사와 효천 스님, 그리고 유담 스님이 와 계셨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일주문 밖에 나와 앉아서 유담 스님과 경월 스님이 퉁소를 합주하였다. 그러자 사창가의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때, 성경책을 옆구리에 낀 너댓사람의 남녀가 다가와서 사창가의 여자들에게 예배드릴 시간이니 교회에 가자고 이끌었다.
그러나 가슴을 에이는 퉁소소리에 매료된 그녀들은 아무도 가려고 하지를 않았다.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으니 이번에는 퉁소를 부는 두 분 스님에게 퉁소를 불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 때, 경월 스님께서 그들에게 "이 여자들을 데려다 무얼 하시게" 물었다.
그 중의 한 남자가 "예수를 믿게 해야지요" 했다.
경월 스님, "예수는 사생아 아닌가. 이들을 데려다 예수를 믿게 해서 사생아를 낳게 할 참인가. 당신의 딸이 사생아를 낳으면 그 사생아를 믿겠는가?"하셨다.
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하면서 물러갔다.
그리고 다시는 사창가를 찾아와 찬송가를 부르는 일이 없었다.
스님은 항상 사창가의 여자들에게 "너희는 전쟁과 가난이 낳은 사생아다. 절대로 너 이외의 사생아를 낳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 글쓴이 : 무애(無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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