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하다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 그들의 후손은 다른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다만 '최부자'가 상징하는 지주로서의 가치가 없어졌다는 의미다.
휴가 차 경주에 갔다가 경주 최부잣집 고택을 둘러보았다.
경주 교동, 찌는 듯한 물더위와 살갗을 파고드는 강렬한 자외선을 뚫고 비틀 걸음으로 찾아간 고택은 의외로 넓고 크지 않았다.
사진 감상하시라. 저 뒤에 몇 자 적겠다.
* 최부자 : 최 부자로 떼어 쓰지 않고 이처럼 붙여쓴 것은 고유명사가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왼쪽 숲이 계림이고, 멀리 첨성대가 보인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교동이고, 거기 최부잣집 고택이 있다.
이 너른 평야가 아마도 최씨 문중 소유였을 것이다.
- 여기가 곳간인데, 천석을 쌓아둘만한 공간은 아닌 것같다. 차곡차곡 쌓으면 2-3백석은 쌓일 듯하다.
어쨌든 최부잣집의 인심은 여기서 흘러나갔다.
- 밖에서 본 곳간.
- 안채. 여기에 최 부자들이 살았다.
- 이 집 저 안채에 현판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둔차이고, 또 하나는 대우헌이다. 鈍은 쇠가 날카롭지 않아 뭉퉁한 것으로, 사람으로 비유하면 미련하다는 의미다. 次는 으뜸이 못된다는 의미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부친 최준식의 아호란다. 즉 둔하여서 으뜸이 되지 못한 사람이란 의미의 겸허한 호다. 다른 현판에 나오는 愚는 어리석다는 뜻이니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겸허한 당호이다. 최준의 증조부 최세린의 아호다. 호 하나에서도 최부잣집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 대청마루. 뒷문이 열려 있어 통풍이 잘 된다. 잠시만 앉아 있어도 땀이 식는다.
- 후원으로, 저 앞에 이댁 '여성'들이 살던 별당이 보인다.
- 후원 대나무밭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다. 옆에 보이는 집은 경주법가라는 술을 빚는 도가다.
최부잣집을 둘러보고 가장 먼저 품어본 의문은 "이 집 자손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까"였다. 왜냐하면 최부잣집의 '10대 만석 신화'는 대략 300년간 이어진 셈이니 당연히 그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기네스북에라도 올라가야 한다. 왕조라도 300년 태평성대를 누리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최부자의 시조랄 수 있는 최국선(崔國璿)이 1631년에 태어나 1682년에 사망했으니 그 생애의 반을 따져 1660년부터라고 치면 1960년까지 약 300년간 만석 부자의 기운을 떨쳤다고 볼 수 있다.
최씨 일가가 만석부를 이토록 오랜 기간 10대에 걸쳐 이룬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 글이 많으니 나는 생략하고, 왜 10대에서 끝났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최부자의 전설이 왜 최국선부터 시작했을까 생각해보면 그 부가 끝난 이유도 알 수 있다.
최국선의 부친 최진립은 병자호란에 참전했다 전사했다. 이처럼 국가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변란이 생기면 국부 유지도 힘들지만 개인의 부는 그야말로 신기루에 불과하다. 오뉴월의 아침이슬이다.
그러니 최부자 시대 300년간 조선에 전쟁이 없었다는 말과 맞아떨어져야 한다. 실제로 병자호란 이후 300년간 큰 전쟁이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 부자 최준에 이르러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는 국변이 일어나고,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에 휘말려들었다. 병자호란보다 더 큰 세계대전에 휘말려든 것이다.
이 정도 국가적 변란 앞에서 만석지기를 유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일제에 아첨하여 그 부를 당분간 유지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완용 등 일가가 일제 36년간은 더없이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해방 후 꼬리를 감춘 것과 같은 이치다.
특히 최부잣집은 <육연과 육훈>으로 후손 교육에 철저했던 터라 나라를 빼앗기자 지체없이 가지고 있던 부를 임시정부로 송금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준의 아우 최윤은 일제 하 중추원 참의로 있었는데, 최윤은 최준이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세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보호하고, 이 자금이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되도록 비밀리에 도왔다.
이러한 최씨 마지막 만석꾼 최준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시정부는 조국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미군이 떨어뜨린 원자탄 두 발로 일본이 패망하기에 이르렀다. 조국 해방에 기여하지 못한 임시정부는 전승국 미군 세력에 밀려 건국 과정에서 밀리고, 이러면서 최준의 노력도 크게 평가받지 못했다.
임시정부에 가장 많은 독립자금을 대준 최준은 도리어 아우 최윤이 일제치하에서 벼슬했다는 이유로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아야만 했고, 서류를 갖춰 독립자금을 대기 위한 것이었음을 해명해야만 했다.
이 형제는 해방된 조국에서 무죄판결을 얻었을 뿐이었다.
최준은 마침내 마지막 재산을 끌어모아 대구대학을 설립하였다. 그게 1947년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1년 전이다. 승전국 미국이 임시통치를 하던 시절인만큼 친미세력들이 기세등등한 시절, 해방에 공을 세우지 못한 임시정부 세력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최준이 마지막 재산을 털어 세운 이 대학마저도 일본군 장교를 지낸 박정희 소장에게 빼앗겨 이름도 영남대가 되었다.
물론 그의 후손들은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최준의 아들 최염 인터뷰 내용 보기>
국가에 변란이 생기면 개인의 부는 유지하기가 어렵다. 최준을 마지막으로 최씨일가의 10대 연속 만석꾼 부자의 신화가 끝을 맺기는 했지만, 이 가문이 세운 전설적인 기록은 전무후무할 것이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불변의 교훈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는 국가가 있고 나서 가문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조선 말기 수많은 명문가들이 나라보다 가문을 앞세우다 일제 앞에서 무기력하게 망해버렸다. 나라는 망해도 가문은 살아남는다는 헛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부귀도 얼마 가지 못했다. 안동김씨, 여흥민씨, 왕실 전주이씨 들이 나라 말아먹는 데 크게 일조하고, 일제에 부역하는 데 골몰했다.
오늘날 삼성, 현대 등이 엄청난 수익을 올리면서도 그 부의 원천이 된 대한민국 소비자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깔보는 것을 보면, 그들의 부가 몇 대나 더 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삼성, 현대 망하라는 저주가 인터넷 댓글로 끓어넘친다.
삼성 3대 이재용은 옴니아폰 들고 아이폰 막겠다고 나섰다가 크게 망신당했다. 2대 이건희가 황급히 돌아와 갤럭시S로 막고 있다. 현대 2대 정몽구는 치열한 형제 다툼 끝에 자동차 왕국을 이룩했다. 하지만 아들에게 그 많은 돈을 통째로 물려주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다 감옥에 가고, 빨리 나와보려고 수천억 기부한다고 떠들더니 용서해준다니까 기부는 없던 일로 해버렸다. 이건희도 그의 부를 아들 이재용에게 세금없이 넘기려다 걸려 억지 기부금으로 징역살이를 면했다. 하여튼 지켜볼 일이다. 삼성, 현대를 지켜볼 국민은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고, 나라가 있는 한 이 땅에서 계속 노려볼 것이다.
10대로써 명예롭게 만석지기의 전설을 마감한 최준에게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그 아름다운 부를 지켜주지 못한 대한민국의 일인으로 죄송하다는 말씀드린다.
- 최준은 상해임시정부를 위해 자신의 부를 썼지만 조국독립을 보지 못한 채 나라가 미군에 점령되는 걸 바라보아야만 했다.
- 최준은 남은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을 설립했지만 일본군 소위 출신 박정희 소장이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 군부정권에 빼앗겼다. 박정희가 죽은 뒤 박근혜는 최태민의 마수에 걸렸으며, 180년 3월부터 박정희의 큰딸 박근혜가 갖고 있다.
* 최태민 아들 조순제가 실세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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