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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죽음에 대한 공포심

현대 지구상에 남아 있는 여러 종교 가운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미끼로 삼지 않는 게 없는 것같다. 없어진 종교들도 대개는 죽음을 이용했다.

 

기독교는 죽고난 뒤 지옥갈 거냐 천국갈 거냐로 사람들을 협박한다. 불신지옥이니 하는 슬로건을 붉게 칠해 들고다니는 신자들이 흔하다. 곳곳에 죽음의 공포를 자극하는 말이 아주 많다. 자기들이 겁나니까 남들까지 겁주는 거라고 본다.

 

또한 불교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불교는 죽음을 빼면 장사가 아예 안되는 종교다. 전생, 환생은 기본이고 죽어서 좋은 데 가기 위해 살아서 벼라별 의식을 다 치른다. 산 사람 재라는 예수재까지 시킨다. 죽은 이에게 경 읽어주게 하고, 음식 바치게 하고, 돈도 바치게 한다.

 

유교 역시 조상 귀신들이 편안하게 저승에서 사는 걸 미덕으로 여긴다. 여기도 지옥 비슷한 구천 개념을 만들어 사람들을 협박한다. 무덤 치장하고, 복잡한 제사 의식을 치르느라 애쓴다. 죽은 지 500년 넘은 사람 제사까지 해마다 성대하게 치러진다.

 

물론 천국과 지옥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인간의 두뇌로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찌 다 상상이나 하겠는가. 우주 바깥도 있다면 있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인간의 두뇌는 부하를 받아 다운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교란 본디 인간의 두뇌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두뇌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글을 써오면서 절대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두 가지 주제가 있다. 사랑과 죽음이다.

사랑이란 종이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 생존 수단에 불과하다고 배운 이래 내 이성만이라도 그런 것에 끌려다니지 말라는 뜻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종의 계속성만 아니라면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남녀가 사랑할 이유도 없고, 남남 녀녀 간의 사랑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남녀간에도 성접촉 없는 우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심지어 종 간에도 사랑이 넘칠 수 있다는 걸 십여 마리 이상의 개를 기르면서, 혹은 나무와 화초를 기르면서 나름대로 터득했다. 사랑의 대상은 무제한이다.

 

또 죽음을 다루지 않으려 했던 것은, 어설피 다루면 죽음 이용해 장사해먹는 교회와 절에 부화뇌동하는 것이라고 보아 일부러 참은 것이다. 종교가 아니어도 국가 같은 경우에도 죽음을 미화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나라마다 국가 중에 그런 가사가 많이 들어간다. 장렬한 전사를 부추기기 위해 일부러 죽음을 미화하는 글이며 노래 때문에 우쭐한 마음에 앞서나가다 죽은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난 그러기가 싫다.

 

그러다 최근 죽음을 건드리고 있다.

전에 내  딸이 다섯 살쯤 되었을 때 막 태어난 조카를 보고 "쟤는 좋겠다. 나보다 더 오래 살 거 아니야?"라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또 큰집 백부가 노환으로 오늘내일 하실 때 "나 무섭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니? 넌 책 많이 읽어 아는 게 있겠지?" 하고 물어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한 기억이 있다. 또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는 알지도 못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정신 놓지 마세요. 늘 부처님 생각하고, 하늘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 만날 준비나 하세요."라며 죽음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거짓말했다.

 

81세인 어머니는 지금도 아침마다 천수경을 외신다. 다 하늘 가서 잘 살아보시겠다는, 세상에 남는 자손들 복받아 잘 살라는 염원이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면 아는 체하며 살아온 내 인생이 부끄럽다. 생사의 문제 하나 제대로 풀지 못한 채 되지도 않는 이야기나 꾸며대어 책을 펴내고, 저 혼자 세상 다 아는 듯 목청 높여 강연이나 해온 지난 날이 한없이 부끄럽다.

 

난 사실 오래 전에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다. 내가 자식처럼 애지중지 기르던 말티즈 도담이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은 뒤 죽음에 대해 깊숙이 생각하고 공부하면서 해결했다. 하지만 그 해결법은 믿음이었지 과학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도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 때는 상층권에 피어오르는 말티즈 흰 털 같은 구름덩어리를 보면서 "죽으면 도담이를 만날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진짜 기뻤다.

 

이제 세월이 흘러 대략 이런저런 주제와 소재를 건드리고 보니 결국 죽음 문제만은 내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먹고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기 때문에, 또 죽음의 공포 때문에 교회 나가고 절에 나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진실을 규명하는 차원에서라도 더 연구해 보고 싶다.

나는 신념이 아닌 진실을 원한다.

 

올해 73세이신 천문학자께서 법회 때마다 "죽음 이후는 없다.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영혼? 물론 없다."는 식으로 단호하게 말씀하실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공포로 받아들이는지 목격했다. 우울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밤마다 이 공포로 불면에 시달린다고 한다. 죽음이 두려워 잠을 못이루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많다고 한다. 딸이 아플 때는 나 역시 죽음을 두려워했다. 내가 죽으면 여러 모로 모자란 딸은 어떻게 되나 하는 공포심 같은 것이다. 그래서 유서도 써놓았다. 

내 딸은 지금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면 나는 "아빠가 먼저 하늘에 가서 널 맞이할 준비를 할게. 이 세상에서도 아빠가 먼저 와서 네가 오기를 기다렸잖아?" 이러면서 위로한다. 그러나 위로일 뿐 나도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교회나 절에 가 자기 자신을 잠시 속여보지만 이런 주제는 궁극적으로 믿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칼 융 가라사대 "믿음은 자신이 믿는 현상을 증명할 수는 있으나 믿는 내용을 증명할 수는 없다."잖는가.

 

나는 주제를 잡았다. 그리고 칼을 들었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련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 때문에 잠 못이루고, 삶을 두려워하는 이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삶을 더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죽음 이론이 내 눈에 똑똑히 보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