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 2007/11/20 (화) 21:23 |
| ||||
인터넷에 보면 <칭기즈칸의 편지>라는 글이 떠다니고 있다. 출처도 없이 그냥 칭기즈칸이 남긴 편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에 대해 몇 가지 해명한다.
이 글은 원래 김종래 씨의 <밀레니엄맨>(해냄출판사)이란 책에 들어 있었다. 칭기즈칸의 편지라는 제목은 누가 붙였는지 모르겠는데, 글은 김종래 씨의 부탁으로 내가 초고를 썼다. <밀레니엄맨>이란 책은 나중에 제목이 <밀레니엄맨 칭기스칸>으로 바뀌어 다시 출간되었다.
김종래 씨는 대단한 상상력의 소유자로 일찍부터 칭기즈칸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러다가 1998년 내가 대하소설 <천년영웅 칭기즈칸>(해냄출판사)을 발표하자 그가 마침내 칭기즈칸학에 대해 칼을 빼들었다. 당시 주간조선 편집부장을 맡았던 그는 특집란을 꾸며 칭기즈칸에 대한 다양한 기사를 실었다. 나도 여러 차례 글을 썼다. 그러다 그것도 양에 안차서 테무친이 어떻게 해서 칭기즈칸이 되었는지 학문적으로,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등등 할 수 있는 연구는 다해보자면서 그가 나섰다. 그러면서 당시 내가 소설을 쓰면서 가지고 있던 자료보다 더 방대한 자료를 전세계에서 모아들였다. 내가 보지 못한 자료도 구해왔다.
이렇게 해서 김종래 씨는 나와 몽골연구가 박원길 교수와 한 팀을 꾸렸다. 대부분의 실질적인 연구는 주로 박원길 교수가 맡았는데, 방향과 흐름은 김종래 씨가 정했다.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에는 그가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대하소설로 칭기즈칸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놀라운 직관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는 줄기를 제대로 잡아냈다. 그래서 그가 정한 목차에 따라 박원길 교수와 내가 글을 써나갔다. 물론 내가 맡은 분야는 팩트보다 소설 비슷하게 해석해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김종래 씨가 굵직굵직하게 제시한 틀에 따라 생각나는대로 적어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글을 쓰는 동안 김종래 씨는 용인의 우리 집에 와 묵기도 했다. 같이 토론하며, 같이 쓰기도 했다. 그이 집념이 워낙 대단해 내가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내 글이 아닌데도 그의 열정에 탄복해 나도 팔을 걷어부치고 도왔다.
나중에 초고가 완성된 다음에 김종래 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검토하여 더 넣을 게 있으면 더 넣고, 넘치는 건 덜어내는 작업을 했다. 사실 박원길 교수와 나는 칭기즈칸과 몽골에 대해 알기는 많이 알고 있었는데, 김종래 씨처럼 꿰뚫어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 두 사람은 공짜로 큰 공부를 했다. 헬기를 전세내어 몽골 동부 지방을 여행하는 기회도 얻었으니 여러 가지로 고마운 일이었다. 사실 박원길 교수도 그렇겠지만 우린 고생한 게 아니었다. 알고 있는 지식을 그의 포맷에 따라 내놓은 것뿐이라서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이 책에 내가 기여한 것 중 중요한 것은 대략 세 가지로 기억한다. 첫째는 머리말에 칭기즈칸의 편지 초고를 쓴 것이고, 둘째는 칭기즈칸의 출현을 태풍에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칭기즈칸의 고향을 다녀온 기행문이다.(이 글은 기명기사라서 내 글이 되었다. 파란태양 카테고리에 실려 있다.) 세 가지 다 내가 생각해서 쓴 것이 아니라 김종래 씨의 요구로 쓴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칭기즈칸이 만일 IMF 상황의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말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난 그렇게 썼다. 즉 난 내용은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편지 형식의 글을 써야할 아무런 동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건 온전히 김종래 씨의 몫이다. 태풍 이론도 그렇다. 그는 "칭기즈칸의 군대가 불과 10만 명이었다면 어떻게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 설명 가능한 이론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래서 태풍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그는 무진장한 양의 태풍 자료를 갖다 내게 내밀었다. 그제야 나는 태풍 이론을 써낼 수 있었다.
난 김종래 씨의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IMF시대를 극복하는 정신 무기가 되기를 원했는데, 당시에는 잘 되지 않았다. 김종래 씨는 크게 실망했던 듯하다. 도움이 되지 못해 나도 미안했다. 나는 소설가이니 한번 글을 쓰면 다음에는 다른 주제에 눈을 돌리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홈페이지를 구축하면서 더욱 더 깊이 연구를 해나갔다. 그러면서 내가 알지 못하던 중요한 사실을 상당히 많이 발견해냈다. 덕분에 나는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바쳐가며 이 연구에 인생을 걸다시피했다. 그렇게 애쓰는 걸 보면서도 그뒤로는 별로 도와주지 못했다. 내 일이 많기도 하지만, 한번 지나간 소재나 주제는 잘 들여다보지 않는 내 성격 탓이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밀레니엄맨 칭기스칸>을 읽어보지 못한 분은 꼭 한번 시간을 내어 읽어보기 바란다. 참 좋은 책이다. 김종래 씨 특유의 상상력이 아니고는 쓸 수 없는 책이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편지>를 퍼나를 때는 꼭 출전을 밝혀주기 바란다. 김종래 씨는 출전만 밝힌다면 누구나 퍼날라도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도 그러기를 원한다. '칭기즈칸의 편지, 김종래의 <밀레니엄 맨 칭기스칸>에서 발췌' 이 정도면 된다. 그럼 자동으로 내가 초고를 썼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그럼 내 초고 <칭기즈칸의 편지>를 선보인다. 김종래 씨는 이 중에서 자무카를 자모카로, 칭기즈칸을 칭기스칸으로 바꿔 표기했다. 또 뭐가 바뀌었는지는 모른다. 그뒤엔 내가 다른 소설을 쓰느라 바빠 읽어보지도 못했다. 인명이나 지명 표기가 내 글과 다른 것은 박원길 씨 주장으로 그렇게 됐는데, 나는 기왕의 소설에서 이미 외래어포기법을 따랐기 때문에 원칙대로 했다. 박원길 씨는 우리나라 외래어표기법 중 몽골어 표기가 실제 발음과 다르다고 주장해서 김종래 씨가 받아들인 결과다. 이에 대해 나는 음가가 실제와 다른 건 사실이지만 외래어표기법이 정식으로 바뀌기 전에는 원래대로 표기하겠다고 해서 내 글과 김종래 씨의 글에서 서로 표기가 달라졌다. 그래서 미안하게도 그의 책 말미에 붙은 내 글에는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표시해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고집부리지 말았어야 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
칭기즈칸의 편지 초고(인물 지명은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표기함)
- 앞에 사설이 이렇게 붙어 있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내용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읽기만 하고, 칭기즈칸의 편지를 복사하고 싶으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걸 하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진본이 아니라 초고다.
칭기즈칸이 돌아왔다.
8백년의 시공을 넘어 이 땅으로 왔다. 경제 위기로 온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는 IMF 체제의 이 시대로 왔다.
그가 돌아온 길은 고려-조선-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길이 아니다.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한국의 김포공항으로 이어지는 항공로도 아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들 핏줄이다. 그 붉은 핏줄을 타고 맥박치며 돌아왔다. 아니, 그는 지금 온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 핏줄 속에 와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아차렸을 따름이다. 이제야 칭기즈칸을 느꼈을 뿐이다.
그 칭기즈칸은 동서로 마음의 철벽을 쌓고, 남북으로 철조망을 친 오늘의 우리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런 누란지세(累卵之勢), 사상누각(沙上樓閣)의 허상을 붙잡고 희희낙락하다가 혼쭐나는 이 땅의 한국인을 향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오랑캐라고 멸시받다가 8백년만에야 겨우 한 핏줄로 대접받게 된 칭기즈칸이 우리 민족을 향하여 뭐라고 포효할 것인가. 넋을 잃고 하늘만 쳐다보는 거리의 실직자에게, 부도내고 파산한 기업가에게,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발이 부르트도록 돈을 구하러 다니는 사업가에게, 언제 해고당할지 불안해하는 월급장이들에게, 그리고 그런 남편을 둔 아내와 그런 아버지를 둔 자식들에게 뭐라고 위로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칭기즈칸은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지 않느냐? 몽골이란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일곱 배나 더 크잖느냐? 그에겐 천하무적의 푸른군대가 있었잖느냐? 그에겐 충성스런 부하들이 많이 있었잖느냐?
그러면서 이런 말로 자조할 것이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동서로 분열된 이 따위 작은 나라가지고는 칭기즈칸의 새끼발가락만큼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만났다 하면 싸움질이나 하는 정치인들 데리고, 돈만 보면 제 주머니로 쓸어담기 바쁜 기업인들 데리고, 걸핏하면 ‘決死’라고 적은 시뻘건 머리띠를 두르고 목청 높이는 근로자들 데리고, 투표 때마다 제 고향 사람인가 제 선후배인가따지는 백성을 데리고 어떻게 그런 무지막지한 꿈을 꿀 수 있느냐! 차라리 대국 미국에나 붙어 작은 주(州) 하나로 만족한다면 몰라도 그건 불가능한 꿈이다!
과연 그런가?
그토록 절망적인가?
정말 방법이 없단 말인가?
아니다. 칭기즈칸은 너무나 가소로워 한바탕 크게 웃어제끼거나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이렇게 우리를 꾸짖을 것이다. 붉은 피를 토하듯 이렇게 외칠 것이다.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어려서는 이복형제와 싸우면서 자랐고, 커서는 사촌과 육촌의 배신 속에서 두려워했다.
-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하고, 내가 살던 땅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비린내, 마른 나무마다 누린내만 났다. 천신만고끝에 부족장이 된 뒤에도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적진을 누비면서 먹을거리를 찾아다녔다. 나는 먹을거리를 훔치고 빼앗기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목숨을 건 전쟁터가 내 일터이고, 생사를 겨루는 전투가 내가 배운 유일한 기술이었다.
-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는 데서 나는 자랐다.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데 동원한 몽골인은 병사로는 고작 10만, 백성으로는 어린애․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말을 타고 달리기에 세상이 너무 좁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결코 내가 큰 것은 아니었다.
-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약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글이라고는 내 이름도 쓸 줄 모르고, 지혜로는 안다 자무카를 당할 수 없었고, 힘이라고는 내 동생 카사르한테도 졌다. 그 대신 나는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그런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나는 힘이 없기 때문에 평생 친구와 동지들을 많이 사귀었다. 그들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나를 위해 비가 오는 들판에서 밤새도록 비를 막아주고, 나를 위해 끼니를 굶었다. 나도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비고, 그들을 위해 의리를 지켰다. 나보다 더 오래산 동지와 친구가 있듯이 나는 다행히 살아남았을 뿐이다.
나는 비단 침대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죽었다. 동지들보다 내가 더 가진 것은 칸이라는 직책 밖에 없었다. 난 비단옷도 입지 않았고, 맛있는 것도 먹지 않았다. 전쟁터에서는 늙어서도 말을 타고 늙은 내 동무들과 똑같이 달렸다. 나는 내 동지와 처자식들이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빛나는 보석으로 치장하고, 진귀한 음식을 실컷 먹는 것을 꿈꾸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린 끝에 그 꿈을 이루었다. 아니, 그 꿈을 향해 달렸을 뿐이다.
-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땡볕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양털 속에 하루 종일 숨어 땀을 비오듯이 흘렸다.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친 적도 있었다. 적에게 포위되어 빗발치는 화살을 칼로 쳐내며, 어떤 것은 미처 막지 못해 내 부하들이 대신 몸으로 맞으면서 탈출한 적도 있다. 나는 전쟁을 할 때면 언제나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겼다.
-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극도의 절망감과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가? 나는 사랑하는 아내를 적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다. 내 눈앞에서 아내가 능욕당할 때도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숨죽이는 분노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적들은 알지 못했다.
전쟁에 져서 내 자식과 내 부하들이 뿔뿔이 흩어져 돌아오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속에서도 나는 절망하지 않고 더큰 복수를 결심했다. 단지 군사 백 명으로 적군 만 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나는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싸울 수 있다고 믿었을 뿐이다. 죽기도 전에 먼저 죽는 사람을 나는 경멸했다. 숨을 쉴 수 있는 한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포로가 되어서도 탈출하고 포위망에 걸려서도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흘러가 버린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철저히 개척해 나갔다.
알고 보니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자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
- 왼쪽이 1998년판, 오른쪽이 2005년판.
'이재운 작품 > 천년영웅 칭기즈칸 시리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칭기즈칸의 편지>에 관한 오해 (0) | 2016.11.03 |
---|---|
칭기즈칸 표기법 (0) | 2015.09.08 |
칭기즈칸을 알아야 하는 이유 (0) | 2008.12.10 |
서평 - 동아일보 (0) | 2008.12.10 |
서평 - 해냄 (0) | 2008.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