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소년을 위한 칭기즈칸(전3권)>(예담출판사)에 쓴 글입니다. 이 글에 칭기즈칸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어 여기 옮겨봅니다.
- 이 소설을 읽는 청소년들에게
칭기즈칸은 아주 잔인한 정복자라고 합니다. 또 우리나라를 침략한 몽골군의 우두머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꼭 맞는 말은 아닙니다. 그가 정복자인 것은 맞지만 잔인한 면으로 보자면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등과 비슷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매우 잔인한 사람이라는 걸 널리 선전하는 심리전을 써서 적의 항복을 받아내는 작전을 즐겨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정복지의 백성들이 더 과장하여 기록을 남겼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성을 공격하면서 성내 백성을 어른이고 아이고 모조리 죽이고, 개나 양도 다 죽이고, 성벽을 무너뜨렸다고 하는 아랍쪽 기록이 있는데, 이건 누군가 상상해서 쓴 말일 뿐입니다. 다 죽었다면 누가 그 장면을 보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즈칸은 실제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세계를 정복한 인물이기는 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인물을 청소년들을 위해 소개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까닭이 있습니다.
칭기즈칸, 즉 테무친은 이름도 쓸 줄 모르고, 아버지가 죽은 뒤 부족에서 추방되어 들쥐를 잡아먹으며 어렵게 산 소년이었습니다. 몽골은 평균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척박한 고원 지대이기 때문에 풀이 한 뼘 정도밖에 자라지 못합니다. 이 가녀린 풀을 양과 말이 뜯어먹고 삽니다. 그러면 사람은 이 양을 잡아먹고 말젖을 짜먹습니다. 쌀이나 밀, 보리 같은 곡식은 나지 않고 사과나 배 같은 과일 역시 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잡초나 침엽수 따위만 가까스로 자랄 뿐입니다. 늘 먹을거리가 부족한 가난한 땅이지요. 너무 춥고 건조해서 곡식은 심어도 잘 자라지 못합니다. 이런 곳을 스텝지대라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배고픈 사람들은 이웃 부족으로 쳐들어가 양을 훔쳐 잡아먹고, 그러면 양을 도둑맞은 부족은 또다른 부족을 약탈하고, 이런 식으로 고원에는 약탈이 끊일 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몽골 인구는 3천년 전이나, 천년 전이나, 백년 전이나 늘 백만 명 정도밖에 되질 않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겨우 2백만 명이 넘었답니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 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고, 식구들만 고립된 채 가까스로 자라난 한 소년이 어떻게 그 많은 나라들을 정복했을까 궁금하지요?
더 궁금한 것은 군사만 백만 명이나 되던 초강대국 금나라가 어떻게 몽골에게 정복당했을까요? 금나라와 남송을 합친 중국 인구는 거의 1억 명에 가까웠다는데, 몽골군은 겨우 군사 10만 명으로 이 큰 나라를 정복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서쪽에 있던 호라즘이라는 나라 역시 군사가 백 만 명이나 되고, 인구가 수천만 명이나 되던 대국이었는데 역시 몽골군에게 졌습니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공화국, 키르키스공화국, 아제르바이잔공화국,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라크, 이란, 터키, 그루지야공화국, 투르크메니스탄공화국, 폴란드, 헝가리, 러시아 등이 그들에게 정복되었습니다.
도대체 몽골은 어떻게 이 많은 나라들을 이겼을까요? 칭기즈칸은 그토록 넓은 나라들을 정복하여 어떻게 다스렸을까요? 이런 의문을 갖고 소설을 읽어보세요.
또 한 가지, 몽골군이 고려에 쳐들어온 사실만 들어 그들을 침략자라고 비난하지만 말고 그때 우리 고려는 무슨 대비를 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고려의 국왕과 무신 정권이 한 일이라고는 물을 두려워하는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피신한 것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이야 몽골군에 잡혀 죽건말건 오로지 국왕과 무신 정권의 안위만 생각한 것입니다. 백성을 버린 고려 조정의 잘못도 마땅히 따져야 합니다.
우리 잘못을 반성하지 않은 채 침략자만 비난한다고 해서 얼룩진 과거사가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나무라는 한편 전쟁이 날 것을 알고도 나지 않는다고 선전한 무리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곧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수차례나 받고도 이를 무시한 국왕 선조의 책임을 따져야 합니다. 조총을 실제로 가져다가 보여줬는데도 국왕 선조와 대신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답니다.
이런 반성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일본은 또다시 쳐들어와 35년간 지배했습니다. 고종이나 명성왕후, 대원군 등 지도자와 대신들은 권력 싸움에나 골몰하면서 정작 나라를 지키는 일은 소홀히 했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죄를 성토하는 한편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미 일본에게 나라를 빠앗긴 뒤에 불쌍한 국민들이 친일을 했느니 안했느니 엄히 따지는 것은 그 이전에 나라를 망하도록 국사를 팽개친 국왕과 대신들을 더 엄히 따진 뒤에 할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칭기즈칸에게서는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첫째, 그는 남의 말을 아주 잘 들었습니다. 장사하러 온 대상(隊商 ; 낙타에 상품을 싣고 유라시아 대륙을 오가던 아랍 상인들)들에게 다른 나라의 사정이나 기술 같은 걸 자꾸만 물어 세상에 대한 안목을 높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하기 전에 적에 대해 철저히 공부했습니다. 적의 약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확실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만 공격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부상을 입거나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잖습니까? 칭기즈칸은 적이 꼭 그런 상황에 빠진 때를 골라 쳐들어가곤 했습니다.
둘째, 그는 끊임없이 공부했습니다. 칭기즈칸은 원래 글을 모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수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적군을 잡으면 다 죽이는 게 아니라 이중에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모조리 가려내서 다 살려줍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재주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사를 다투던 적이었어도 몽골인과 똑같이 대접해 줍니다. 심지어 뺨에 화살을 맞아 죽을 뻔하고서도 그 화살을 쏜 적장을 잡고는 그를 부하로 삼습니다. 활쏘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칭기즈칸은 뛰어난 기술과 실력을 가진 사람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금나라가 만든 비화조(세계 최초의 미사일) 기술을 잘 아는 금나라 출신 기술자들이 조국 금나라를 정복하는데 앞장서고, 호라즘 기술자들이 호라즘을 공격하는 전법을 만들어내곤 했답니다.
셋째, 그는 민족, 혈연, 지연, 신앙 따위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적으로 맞서 싸우던 사람이라도 일단 포로가 되어 충성을 맹세하면 일반 몽골 군사와 똑같이 대접했습니다. 포로 출신으로 몽골군 장수가 된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야율초재 같은 사람은 금나라가 함락될 때 잡혀온 포로지만 나중에 몽골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또 칭기즈칸은 누가 무슨 종교를 믿든 마음대로 하게 두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는 며느리가 있는가 하면 이슬람을 믿는 손자도 있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피정복지 백성들은 몽골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반겼답니다. 전에 왕이나 황제들이 폭정을 했던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구요.
이런 칭기즈칸이 우리의 적으로 나타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까지 해준다면 참 좋겠습니다.
오랑캐는 무식하고, 단순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랑캐라고 부르는 몽골은 중국에 원나라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 차가타이칸국, 이란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일칸국,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일대에 킵차크칸국을 세워 수백년간 지배한 민족입니다. 또 가장 가까운 여진족 역시 금나라를 세우고 나중에 청나라를 세운 민족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쪽바리라고 무시하고 드는 일본인은 동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를 장악한 적이 있으며, 오늘날 경제적으로 엄청난 대국이 되어 있고, 노벨상 수상자도 많습니다.
이웃 민족이란 무시한다고 해서 결코 무시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남을 알고 우리를 알아야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쥐새끼 같이 생겨먹은 도요토미는 결코 우리 조선을 침략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아무리 큰소리친들(일본에 정탐차 갔던 부사가 이렇게 보고했다지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랍니다.
이 소설을 읽는 청소년들은 칭기즈칸같은 국제적인 감각을 익히고, 세계적인 안목을 갖기 바랍니다.
원래 제가 쓴 소설 <천년영웅 칭기즈칸(해냄출판사, 1998년, 전8권)>은 칭기즈칸 사후 수백년 뒤 몽골의 여러 제국이 망할 때까지의 매우 방대한 내용이 들어 있고,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줄거리가 다소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포로를 학대하는 장면 등이 부적절한 편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읽어 보라고 권하지 못하다가 이 소설 <푸른태양 칭기즈칸>을 따로 지었습니다. 소설이 매우 순화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 자체가 순화될 순 없으니 전쟁에 대한 경각심까지 늦추지 않기 바랍니다. 전쟁을 막으려면 전쟁의 참모습을 보아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전쟁을 흥미롭게 보는 청소년이 있을까봐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저의 우려를 씻고 이 소설에서 부디 좋은 뜻을 취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5년 이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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