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의 법칙과 새로운 문명사회
우주의 모든 현상계는 부단하게 변한다. 삼라만상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나뭇잎이 파릇파릇 솟아나고 아름다운 색색의 꽃들이 피었다가 지고, 온갖 동물들이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늙어 죽곤 한다. 바위와 같은 무생물들도 비바람에 씻겨 변하고 또 변한다. 아니 그 자체가 인연화합이기 때문에 스스로 변한다. 물론 이 현상계를 이룬 근본 바탕, 즉 질량과 에너지는 불변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외로 접어둔다.
그런데 이 삼라만상의 변화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법칙 없는 변화란 있을 수 없다. 서양철학의 거두인 칸트는 어느 것 하나 우연히 생긴 것은 없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법칙 가운데 가장 단순한 것은 생生과 멸滅이다. 생멸법은 변화의 기본이다. 좀더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생·주·이·멸生住異滅로서 포물선 내지 물결과 같은 것이고, 동양철학에서는 윤회설로 통용되기도 한다.
사람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성장하여 늙고 병들어 죽는 과정은 하나의 물결이나 파도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사뿐만 아니라 모든 동·식물이 이와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자세히 통찰해보면, 무생물 역시 이러한 윤회의 과정을 거친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사회도 하나의 유기체처럼 부단하게 변하고, 그 변화의 법칙은 곧 윤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회나 시대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주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동양사람이 아닌 앨빈 토플러가 인간사회의 거대한 변화를 하나의 물결, 즉 윤회에 비유하여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동양철학을 몰랐다 하더라도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면 단순한 변화의 법칙을 포착 못할 이유가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법칙의 신빙성을 더 높여준 점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앨빈 토플러는 농경사회를 제1물결로, 산업사회를 제2물결로 그리고 다가오는 정보사회를 제3의 물결로 구분하여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사회변화를 설명하는 그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꼬집는다면 농경사회를 제1물결로 보기는 힘들고 제3의 물결을 정보사회로 지칭한 대목도 엄밀한 검토를 요구한다.
물결은 이 지구상에 물이 생기면서부터 일어났고, 사회는 인류가 출현하면서부터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농경사회 이전에 이미 원시사회가 있었으며, 거기에서부터 물결의 이름을 붙여야 옳다고 본다. 물론, 사회의 특징이 엄격하게 구별되느냐 하는 것과 애초부터 생긴 물결의 고유한 번호가 줄을 서듯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은 기본적인 물음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파도나 물결은 물이 움직이는 겉모습일 뿐 본질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로 그때그때의 생활모습이 나타날 뿐 물의 흐름처럼 시간과 공간을 두고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제1, 제2, 제3으로 이어지는 숫자는 단순한 배열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농경사회를 편의상 ‘제1물결’이라고 말하여 그릇될 것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절대적인 순위가 아니라 빈 이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이다.
다음에는 제3의 물결을 왜 하필이면 ‘정보사회’로 규정했느냐 하는 물음이다. 이것은 빈 이름이어서는 안된다. 한 사회의 변화와 특징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은 대단히 중요하고, 혹시 잘못 규정하면 인간의 사회활동을 오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산업사회 이후의 새로운 문명사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 특성과 이름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산업사회 이후를 ‘지식사회’로 규정하고,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산업혁명 이후 ‘지식’에 의해서 획기적인 생산성 혁명과 경영혁명이 잇따라 일어난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지식이 자본이나 노동보다 중요한 생산요소라는 것을 내세운다.
저명한 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다가오는 시대를 ‘기술전자공학시대(Technotronic Age)’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기술과 전자공학의 결합적 충격에 의해 경제 내지 문화적으로 변하고 있는 사회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브레진스키는 기술과 전자공학을 사회변화의 중심핵으로 본 것이다.
러시아의 미래학자들은 새로이 다가올 시대를 ‘과학기술혁명(Scientific-Technological Revolution; STR)’시대라 보고 있으며, 서구 과학자들도 ‘전자공학시대(Electronic Era)’라고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은 다가오는 새로운 문명사회를 ‘탈산업사회’라고 규정하였다. 캐나다의 문명비평가 마샬 맥루한은 교통과 통신의 급속한 발달로 인하여 세계가 지금 ‘지구촌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나라에 착륙한 시점부터 ‘우주시대’로 들어섰다고까지 성급한 개념규정과 함께 다양한 이름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보는 시각과 견해 그리고 평가기준 등에 따라 그 이름도 다양하지만 중요한 공통점은 대부분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견 내지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전의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의 변혁을 일으킨 주요 내용을 반추시켜볼 필요가 있다. 일맥상통한 평가기준이나 어떤 흐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의 중요한 생산요소는 토지였으며, 생산품은 농산물이었다. 산업사회의 중요한 생산요소는 자본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증기기관과 같은 대형기계였다. 기계중심의 자본에 의해서 생산된 것은 제조품, 즉 공산품이다. 이 제조업이 바로 산업사회를 이룬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산업사회 이후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전자공학의 중요성이다. 산업사회 말기에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만든 것은 전자공학이기 때문이다. 전자란 음전하陰電荷를 가진 질량으로서 아주 작은 입자이다. 이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 전자공업의 영역은 가정용 및 산업용 전자기기와 전자부품 등으로서 산업사회 이후 초기 물질문명의 핵을 이룬다. 이 가운데에서도 통신기기나 컴퓨터의 역할과 중요성은 점차 높아지는 추세에 있다.
그러면 전자공학에 의해서 문명사회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단계에서 정확한 윤곽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호미나 괭이 등으로 농업을 주로 하던 농경사회에서 기계를 주로 하여 공장을 돌리던 산업사회로 넘어갈 때,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무슨 상품들이 나타날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아니었다. 어느 누가 감히 자동차를 생각했으며, 어느 누가 감히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생각이나 했겠는가? 당시 컴퓨터 같은 첨단기계는 더더욱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업사회 이후의 새로운 문명사회는 ‘전자공학 시대이다’라고 성급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막연한 생각이다. 이 책을 쓰고 있는 1994년에 정보가 중요하고 그것이 통신수단을 포함한 전자기기에 의해서 더욱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만을 가지고 산업사회 이후의 새로운 문명사회를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정보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생산수단이거나 생산요소일 수는 없다.
농경사회에서는 생산요소로서 토지나 일손이 중요했고, 산업사회에서는 기계, 즉 자본과 노동력이 중요한 생산요소였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때, 산업사회 이후의 새로운 문명사회에서는 정보가 이들과 연결되는 중요한 생산요소이거나 혹은 새로운 문명을 일으킬 수 있는 핵심요소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보만 가지고 어디서 무엇을 생산할 수 있단 말인가? 정보는 정보에서 그칠 뿐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생산해낼 수가 없다.
다른 한편, 벌써 많은 연구기관에서 생명공학에 대한 연구가 불붙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으로 물과 빛 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비료와 농약이 없이도 농작물 생산을 배가시킬 수 있는 소위 ‘에너지 워터’를 찾아 멀고 험난한 길을 나섰다. 또한 UFO가 공기 중이나 빛 속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공중을 비행할 것이라는 설마저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 이것들이 전자공학과는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이며, 미래세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세상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해지고 있다. 1993년 12월 15일,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현장에서 필자는 온 지구촌을 뒤흔드는 벼락 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세상이 좁아지고, 다양한 인종들이 친근하게 느껴졌으며, 세계시장이 무섭게 터져 열리는 어떤 감동을 체험하였다.
직관적으로 느꼈던 것은, 산업사회는 간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사회가 열린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런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변화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 세상 만유는 변하고 또 변하며, 그것은 생→노→병→사요, 성→주→괴→공이라…… 산업사회를 전면적으로 대체시킬 수 있는 거대한 어떤 것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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