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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허신행을 읽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7

이 세상 만유가 펼치는 겉모습의 허망함, 즉 무아無我에 접하게 되면, 남는 것은 오로지 이 세상 모든 사물과 현상의 본체인 진아眞我뿐이다. 진아는 불교에서 체體 또는 진여眞如로 불리고, 그 특성에 대해서는 이미 반야심경에서 설명했듯이 팔불八不 또는 팔부중도八不中道로 표현되어 있다.

 

진아는 새로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진아는 늘거나 줄지도 않으며, 오거나 가지도 않는다. 진아는 끊어지거나 항상하지도 않으며, 부분도 아니요 전체도 아니다. 진아는 또 더럽거나 깨끗하지도 않고, 양이나 질도 갖지 않는다. 그러면 진아는 무엇인가?

철학에서도 이 진아를 ‘실체’라 하여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우선 천태만상으로 나타난 현상 세계의 근원이 되는 실체는 수량에 있어서 ‘하나’라고 하는 단원론單元論을 비롯하여 다원론多元論 그리고 이 둘의 통합과 조화를 이룬 단다론單多論으로 나누고 있다.

 

실체에 대한 질적 고찰에서는 그 실체가 물질적 존재라고 보는 유물론唯物論과 다른 한편 정신 현상으로 보는 유심론唯心論 그리고 물질과 정신의 혼합으로 보는 이원론二元論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유물론은 정신을 놓치고 유심론은 물질을 놓치게 되며, 이원론은 절충적이어서, 이번에는 일원론一元論이 제기되기에 이른다. 즉, 궁극적인 실체는 따로 있고, 밖으로 표출되는 모양과 작용에 있어서 하나는 물질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정신으로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심지어 이 일원론적 실체를 질적인 측면에서 정적이냐 동적이냐로, 또 나누어 정적 일원론과 동적 일원론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헤겔은 이 궁극적인 실체를 이理(Logos) 또는 이념(Idea)이라 부르고, 이를 ‘세계정신’ 또는 ‘절대정신’으로 보면서 물질과 정신은 이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의 소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제각각 일면적이어서 실체에 대한 진상을 전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이원론 역시 절충적이어서 철저하지 못하며, 일원론은 철저하긴 하나 일원에서 어떻게 다원의 세계가 생성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학자들은 또다시 물심론物心論을 들고 나왔다.

 

물질과 정신은 제각각 별개이면서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으므로, 물질 있는 곳에 정신이 있고 정신 있는 곳에 물질이 있다 하여, 물질과 정신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이라고 보게 된 것 같다. 물심론 역시 참으로 그럴 듯해 보이지만, 소아小我나 대아大我적인 현상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정론正論이랄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철학에서 논하고 있는 이들 다섯 가지 이론은 모두가 현상계를 통한 접근방식이요,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소위 상相과 용用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설명코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실체란 불교철학에서는 체體 또는 진여眞如라 하여 반야심경에서 그 특성에 대하여 이미 팔불八不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말하는 실체는 직관이나 깨달음의 영역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분석이나 체험 또는 설명의 대상은 될 수 없다고 본다. 이를 알고자 물리학을 연구한 숱한 수재들도 결국 그 실체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양자역학, 즉 소립자들의 연결망에 대해서 주로 논하고 있지 않은가. 철학에서도 실체에 대해서 ‘불변’, ‘초경험적’, ‘무한의 절대자’ 등으로 규정해놓고, 변화무쌍한 물질이나 정신을 탐구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만유의 근본인 실체가 없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 근본에 의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이 생겨난 것이므로, 그 실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비유적인 예를 들어보면, 우선 금으로 만든 모든 제품을 연상해보자. 금반지, 금목걸이, 금시계, 금수저, 금젓가락, 금테안경 등 숱한 금제품을 대할 때, 우리는 통상 제품의 모양이나 활용도 내지 그 가치에 관심을 쏟게 된다. 그렇지만 모든 금붙이 제품은 오직 금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만유의 근본인 실체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금붙이 제품들을 모두 고열로 녹이면, 그 모양은 다 없어지고 남는 것은 오직 순금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여름 바닷가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았다든지 또는 한겨울에 얼음조각들로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모래성의 모습과 얼음조각의 모양에 끌려 그 예술성이나 가치에 대해서 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모양이나 예술성은 모두 다 아침이슬과 같은 것이고, 그 실체는 모래와 얼음일 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주의 만유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갓 모래성이나 얼음조각과 다를 바 없으며, 그 실체는 모래와 얼음이나 물처럼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 파도가 모래성을 덮치거나 온도가 높아져서 얼음이 녹으면, 이들 모양은 다 없어지고 모래와 물만 남게 되듯이, 우주의 만유도 어떤 자연변화로 그 모양을 잃으면, 남는 것은 오로지 실체뿐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예를 든 금이나 모래, 얼음이나 물 등은 모두가 만유의 근본인 그 실체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인간의 오감五感으로는 그 실체를 포착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그에 대해서 상상하거나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실체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생각의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실체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직면直面할 수도 있다. 금붙이 제품들이나 모래성 및 얼음조각들을 대할 때, 그들의 모양을 보지 않고 순금과 모래 그리고 얼음을 직관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실체인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승려들이 수도승들 앞에서 “너도 진여와 하나이고, 깨달으면 부처다”라고 말하는 연유가 이런 데 있는 것이다. 겉모습에만 이끌리지 않고 실체에 막바로 직관할 수 있는 근기와 지혜력을 가지면, 실체는 이 우주에 충만돼 있다. 그렇게 보면 만유가 실체, 즉 진아眞我 아닌 것이 없다.

 

- 허신행 <<한몸사회>>(범우사) 전집 2권 <깨달음 기반 한몸사회 탐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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