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小我, 즉 작은 나가 완전한 독립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우리 인간은 물론, 모든 생명체가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하이젠베르크Werner K. Heisenberg(1901∼1976)의 ‘부분과 전체’를 구태여 인용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추리해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홀로가 아니다. ‘객체란 현상세계의 부분’이라든가 ‘현상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조직’이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역설은 불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의 세계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당연하게 믿었던 정설로 그 맥이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불교에서 선문답禪問答 등을 운문韻文형태로 정리해둔 벽암록碧巖錄 제40칙則에 보면,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이요,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라 하였다. 하늘과 땅 그리고 내가 한 뿌리, 즉 하나이고, 만물과 내가 한몸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3세기 말 중국의 진晉 나라 승조僧肇의 《조론肇論》이라는 저서에 실린 내용이다. 성씨가 조肇라고 하는 이 법사法師는 당시 ‘구마라습’ 문하의 4대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철학에서는 만물이 하나요 우주가 하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기독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신약전서의 요한복음 10:30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했다. 요한복음 14:11에는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하고 다짐까지 해두고 있다. 에베소서 4:6에는 더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萬有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못박고 있다.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아버지와 하나님 그리고 만유는 같은 것이다. 이들은 서로간에 표현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만물과 내가 하나’라고 하는 사상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종교사상이 과학적인 증명과 일치할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도 의심하거나 주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찍이 물리학자로서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과 자연과학 분야에도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카프라Fritjof Capra(1939∼ )는 최근 《생명의 그물The Web of Life》이라는 책을 통해 전체론적 패러다임과 시스템적 사고에 대해서 방대한 논문과 저서들을 정리하여 ‘만유가 하나’라고 하는 믿음과 확신을 더해주고 있어서 화제에 오르고 있다.
카프라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방대한 정리작업을 벌였다. 이 작업을 통해, 역사적으로 또 학문의 발전과정과 맥을 찾아 알기 쉽게 정리하였던 것이다. 그의 역작에 따르면, 일찍이 서양과학의 세계를 지배해왔던 데카르트의 분석적 환원주의적 또는 원자론적 사고방식과 뉴턴의 기계론적 대종합방식이 최근에 전일론적·생태학적·시스템적 사고 내지 유기체론적인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데카르트의 자연관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 가운데 생물을 포함한 물질적 우주 전체는 하나의 기계이고, 그 기계는 가장 작은 부분으로 완전히 분해시킴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사고와 접근방식은 뉴턴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 대자연이라는 기계는 정확한 수학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또 모두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칸트와 괴테·훔볼트·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를 비롯하여 일련의 생물학자·의학자·지질학자는 물론 양자역학을 다루는 물리학자들까지도 전체를 부분의 합으로 보지 않았고, 또 생물도 기계처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어, 칸트Immanuel Kant(1724~1804)는 생물은 기계와 달리 자기 재생적이면서 자기를 조직하는 전체라고 주장하였다. 기계의 경우 각자의 부분은 서로를 ‘위해서’, 즉 기능적인 전체 속에서 서로를 떠받치고 있을 뿐이지만, 생물체의 경우에는 각 부분은 서로를 만들어갈 뿐만 아니라 서로 의존하면서 생존해가기 때문에, 기계와 생물체는 엄연히 다르다고 했다.
독일의 발생학자 드리쉬Hans Driesch(1867∼1941)는 성게의 알에 대한 실험을 통해 기계론적 생물학에 대한 반론의 포문을 연 바 있다. 발생 초기의 2-세포 단계에서 배胚의 세포들 중 하나를 파괴시키자, 남아 있는 하나의 세포는 반 쪽자리 성게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크기는 작지만 온전한 하나의 성게로 자랐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의 무엇이고, 전체의 성질 역시 그 부분들의 단순한 합과는 항상 다르다는 사실에 점차 눈을 뜨게 된 것이다.
1920년 그 유명한 양자론이 수립되자, 물리학자들의 생각마저 바뀌기 시작하였다. 모든 물리현상은 분명하고 확실한 물질입자들의 특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어왔던 고전 물리학 개념이 바뀐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원자 이하 수준의 소립자들은 개별적인 실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으며, 상호 연관성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소립자들은 사물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양자론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하이젠베르크는 이 세상을 가리켜 만유가 서로 얽히고 설킨 복잡한 그물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세상은 고전 물리학에서 보았듯이 모든 부분의 특성과 움직임이 전체를 결정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양자역학에서 말하듯, 전체가 부분의 움직임을 결정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1920년대부터 생태학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학자들은 ‘생태학적 집단들이 먹이관계를 통해 연결망의 형태로 서로 엮어진 생물들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1940년대부터 ‘시스템적 사고’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공학과 경영분야에까지 널리 확산되기에 이른다.
1970년대 말엽에는 살아 있는 시스템들의 ‘자기 조직화’라는 강력한 새로운 개념까지 출현하게 된다. 살아 있는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이 스스로 연결망을 제작하고, 다시 그들 연결망은 또 자체 구성요소들을 제작한다는 것이 ‘자기 조직화’인데, 이는 살아 있는 시스템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런 자기 조직화는 간단한 박테리아로부터 동식물의 세포로, 인체는 물론 심지어 행성인 지구로까지 확대적용되기에 이른다. 대기 화학자였던 러브록James Lovelock(1919∼ )은 충격적인 ‘가이아’이론을 발표, 행성 지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자기조직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나서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지구 행성의 신진대사는 무기물을 유기물로, 이 유기물을 생물로, 생물은 다시 흙과 물 및 공기로 변환시키면서 이루어진다. 대기의 경계를 포함하여 가이아 연결망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들은 그 연결망 내의 과정들에 의해 생산된다. 실제로, 지구 내의 생물 시스템과 무생물 시스템이 하나의 단일한 그물을 이루며 복잡하게 짜여 있다.
나무의 껍질이 내부의 활성적인 조직을 외부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듯이, 지구의 대기권도 생물층을 자외선과 그밖의 유해한 영향으로부터 보호해준다. 나무 내부의 목질이 활성적인 조직을 떠받치고 있듯이, 지구의 내부 지층도 생물층을 떠받치고 있다. 이 때 나무의 껍질과 내부 목질은 국부적으로 보면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식물이라고 하는 유기체이듯이, 지구 역시 대기권과 내부 지층이 국부적으로 보면 무생물처럼 보이나, 전체적으로 보면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라는 것이다.
인체의 기본단위이자 살아 있는 시스템 중 가장 간단한 세포를 보면, 생명체의 ‘자기제작’ 내지 ‘스스로 만들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식물세포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비교적 투명한 세포막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내부에는 세포핵을 비롯하여 저장낭(골지체)·재생 센터(리소좀)·발전소(미토콘드리아)·태양공장(엽록체) 등이 들어 있다. 이들 세포기관을 보면, 식물 및 동물체의 기관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포막은 먹이를 끌어들이고 노폐물을 배출한다. 태양 에너지와 이산화탄소 그리고 물은 엽록체라고 하는 태양공장에서 당과 산소로 바뀐다. 당은 발전소로 옮겨지고, 거기에서 에너지가 생성된다. 에너지는 저장낭으로 옮겨지고, 당을 지속적으로 보충하기 위해 다양한 영양분과 원소를 뿌리와 잎을 통해 흡수해들인다. 이들 세포 구성요소들의 정교한 연결망과 복잡한 신진대사를 보노라면, 60조의 세포가 모여 이룬 인체 각 기관들의 연결망과 신진대사를 연상케 된다.
마찬가지로 지구라는 하나의 거대한 통합체를 인체와 같은 유기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본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해답과 자세한 설명이 바로 러브록의 《가이아: A New Look at Life on Earth》와 《가이아: The Practical Science of Planetary Medicine》이다. 두 권 다 한국어판으로 번역되어 있다.
전생대(46∼37억 년 전)에는 화산활동이 격렬하게 일어나 공기 중의 탄산가스 비율이 엄청나게 높았으며, 암석과 바닷물이 맹렬한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많은 양의 수소가스가 생기게 되었다.
시생대(37∼25억 년 전)에는 초기의 박테리아가 생겨났으며, 질소가 많고 탄산가스와 메탄가스의 비율이 각각 0.1∼1퍼센트 사이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산소는 환원성 물질에 빨려들고 있어서 대기 중에는 별로 없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생대(25∼7억 년 전)에는 대기의 성분이 환원성 위주에서 산화성 위주로 바뀌고, 아직도 박테리아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약간의 진핵세포가 발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생대(7억 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에 들어서 비로소 동물과 식물이 진화하였고, 대기 중의 산소비율이 21퍼센트까지 늘어났다. 탄산가스는 생명조직에 계속 흡수되어 지금의 0.03퍼센트 수준까지 떨어지게 됨으로써, 전생대부터 떨어져 있던 태양광선의 강도가 25퍼센트 이상 높아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구가 이처럼 오랜 세월 진화과정을 거쳐오는 사이에 흙과 암석, 공기와 물, 박테리아와 동식물들이 신진대사 과정의 복잡한 그물망을 통해 대기의 온도와 화학적 조성을 조절해 나옴으로써, 우리 인간처럼 고등한 동물들이 살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지구의 온도가 높거나 낮아지면 자동적으로 조절하여 균형으로 끌어들이고, 산소나 먹이 등의 양에 불균형이 생겨도 먹이사슬의 자기조절에 의해 균형으로 회귀돼가는 신비한 세계가 바로 지구라고 하는 유기체인 것이다. 이런 자기조절 내지 조직화는 복잡한 수학과 모의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지구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큰 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면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나 우주는 어떨까? 우주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자기를 조직하고 조절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되거나 논의된 적은 없다. 그러나 불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만유萬有란 지구상의 현상계만을 지칭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주 전체를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므로, 만물일체萬物一體라고 할 때에는 우주의 모든 현상계를 한몸으로 간주한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불교철학에서는 이 만물인 ‘나’를 곧 대아大我라고 부른다.
- 허신행 <<한몸사회>>(범우사) 전집 2권 <깨달음 기반 한몸사회 탐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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