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이 몸뚱이를 ‘나’로 알고 산다. 이 몸뚱이가 ‘나’라고 하는 믿음에 실오라기 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은 채, 당연하게 여기면서 하루하루 희비애락喜悲哀樂에 젖어 사는 것이 대다수 우리 인생의 삶이다.
이 몸뚱이 안에 ‘나’라고 하는 주체가 있어서 홀로 생각하고, 홀로 행동하는 것으로 믿는다. 나 홀로 생각하고, 나 홀로 먹고, 나 홀로 자고, 나 홀로 일하는 것으로 믿는다. 나 홀로이기 때문에 때론 외롭고, 때론 슬프고, 때론 기쁘기도 하다고 믿는다.
이 몸뚱이를 나로 알고 홀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존본능에 강해지고, 그 결과 생존경쟁을 일삼게 된다. 나를 홀로인 존재라 믿기에 은밀한 행동을 자행하기도 한다. 인간의 모든 비행非行과 범죄행위 역시 이같은 ‘나 홀로’의 생각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아야 한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내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은밀한 나만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온갖 부조리와 비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속박하고 구속하게 될 비행을 감히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나 홀로’의 생각이 ‘나’라고 하는 개체의 완전한 독립성과 자의성을 전제로 삼는다는 데 있다. 그러나 ‘나’라고 하는 개체는 그렇게 완전 독립적이거나 자의적이지 못하다. ‘나’라고 하는 육체와 정신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먼저 육신肉身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나’라고 하는 개체는 우선 독자적인 창조물이 아니다. 생물학에서 이미 밝혀낸 대로 ‘나’라고 하는 개체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복제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23개의 염색체 다발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23개의 염색체 다발을 모두 합친 46개의 염색체라고 하는 그 설계정보에 따라 ‘나’라고 하는 개체는 물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염색체 속에 들어 있는 DNA는 암호문을 녹음한 자기磁氣와 같은 것이다. 하나의 DNA 속에는 옥스포드 영어사전 전질의 열 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정보량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 유전정보의 지시에 따라 신체의 각 기관·혈액세포·피부·콩팥·허파·신경세포·호르몬·대뇌 등 인간의 모든 조직이 형성된다. 그래서 DNA를 ‘생명의 문자’, ‘생명의 사전’, ‘생명의 지도’, ‘생명의 설계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DNA에 수록된 정보 내지 유전문자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같이 중요한 유전정보는 대부분 조상으로부터 전수된 것이다. 고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엄격한 의미에서 복제생명에 불과하다. 과학자들에 의한 실험실 안의 복제는 한 생명체의 단순한 기계적 복제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인간은 부모의 DNA 염색체 결합을 통해 절반씩 복제된 생명체인 셈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복제 역시 결과적으로는 복제에 불과하므로 인간의 종족번식은 순수한 창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복제에 의한 대代물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DNA는 과거·현재·미래의 정보를 대부분 동시에 갖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불교철학에서 과거·현재·미래가 동시同時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DNA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가진 DNA 정보량의 93퍼센트(학자에 따라 52퍼센트까지 주장하는 등 구성비에는 다소 차이가 있음)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정보에 해당된다고 한다. 나머지 7퍼센트 정도만이 탄생 후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진화를 위한 나머지 몫이라 생각된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DNA 정보량 가운데에는 복제된 생명체의 형성에 필요한 설계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행동양식과 본능 그리고 기타 수많은 정보가 포함돼 있다. 여기에는 4천 종 이상의 유전성 질환도 내포돼 있다. 그렇다면 분명히 육신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요, 또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기본의 대부분 역시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것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나’라고 하는 개체는 주변의 환경요인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립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순간순간 그렇게 귀중한 줄도 모르고 공짜로 마시는 공기 하나만 단 1~2분이라도 없어지면, 살아남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공기가 1시간 이상 없어진다면, 인간은 물론 이 세상에 살아남을 어떤 생명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기 없는 ‘나’를 상상도 할 수 없다.
물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 공기와 마찬가지로 물이 없어지면 살아남을 인간은 없다. 인간뿐이겠는가. 물이 없어지면, 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을 수 없다. 더욱이 인간의 육신은 70퍼센트 안팎이 수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유기체이다. 그러므로 물 없는 ‘나’를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음식물을 먹지 않아도 인간은 살아남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극한 상황에서 더러 단식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한 달 이상을 버티기는 힘들다. 인도의 힌두교를 비롯한 일부 종교서적에서 보면, 음식물을 먹지 않고도 오랜 기간 생존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하나, 보편적인 현상일 수는 없다. 설령 그런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공기 중의 필수원소마저 흡수하지 않는다면, 살아남기는 힘들 것이다.
햇볕이 없어지거나 온도 등의 기후변화가 심해져도 인간은 살아남기 힘들다. 겨울이면 추워서 얼어 죽는 사람, 여름에는 홍수로 떠내려가 죽는 사람, 가물어서 서서히 말라 죽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환경오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뿐만이 아니라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은 마치 물 속의 물고기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의존성 생명체임에 틀림이 없다. 물이 곧 물고기요, 물고기가 바로 물이나 다를 바가 없듯이, 우리 인간도 자연 그 자체인 셈이다. 그러므로 ‘나’라고 하는 개체는 완전히 독립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생각하는 의식작용이 선험先驗적이었건 본능적이었건, 그 대부분이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DNA정보에 기인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확증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이런 심증心證은 더욱 굳어진다.
거북이나 거미·연어·뻐꾹새와 같은 많은 동물들은 알이나 새끼를 낳은 다음에 어미가 새끼들을 돌보지 않는다. 그들은 새끼들에게 교육도 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끼들은 부모가 하는 생각과 행동을 거의 그대로 빼닮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DNA의 유전정보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연어가 부모들처럼 태어난 고향을 찾아 수만 리 길을 여행코자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나, 뻐꾹새가 어미처럼 남의 집에 알을 낳고자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등은 모두가 유전 정보에 따른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물론 순간순간의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동물들의 즉흥적인 의식이나 행동은 후천적이라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 기본적인 발상이나 거시적인 대응자세는 유전적이라 봐야 한다. 동물들의 이런 의식과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노라면, 과연 인간의 사고思考와 행동양식은 얼마나 후천적일 것인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앞선다.
인간의 의식활동이 후천적인 환경변화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 자체도 완전 독자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의식작용을 사물에 쏘고 시험하며, 시행착오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며 판단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의식 또는 정신이 인식대상에 닿고, 그 대상이 나의 의식 내지 정신활동에 투영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인식대상이 아무 것도 없으면, 의식작용은 본래 타고 난 것 이외에는 텅 빈 허공과 같을 것이다. 인식대상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나의 의식에 작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도 결코 완전 독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본적인 생각이나 정신활동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인 것이요, 후천적으로 생겨난 생각이나 정신작용도 주변의 환경변화와 직접 연결된 것이라면, 다른 무엇을 가리켜 나의 독창적인 생각이요, 독립적인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하여, 인간의 몸과 정신이 전적으로 주어진 것이요, 피동적이라 말할 수도 없다. 유전적으로 또는 환경적으로 주어진 기초나 여건 위에서 형성된 몸이요 정신이라 할지라도, 지금 일으키고 있는 생각과 행동이 이 몸뚱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모든 것을 다른 요인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대다수 인간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 몸과 정신이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같이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독립적이지 않은 개별적인 우리 인간을 가리켜 불교철학에서는 작은 나, 즉 소아小我라고 부른다. 좀더 심하게 말하면,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해 생긴 것이라 하여 가아假我 또는 망아妄我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불완전한 소아小我적인 ‘나’를 통해 관찰하고 연구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 인간에 대한 비밀을 완전히 열어헤치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참나’란 무엇인가?
- 허신행 <<한몸사회>>(범우사) 전집 2권 <깨달음 기반 한몸사회 탐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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