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열거한 대부분 학자들의 접근자세를 보면, 우리 인간을 일단 주어진 실존 내지 실체로 인정하고, 정의를 내리기 위해 실증적인 검증방법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에게선 인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와 진지한 의심이 엿보이지 않는다. 인간이란 정말로 실존인가? ‘나’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혹시 ‘나’는 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좀더 근원적인 접근과 고정관념의 파괴가 요구된다.
이런 노력들은 어느 한 지역이나 한 시대에 끝나지 않고 마치 상류의 물줄기처럼 이어지고 커져서 큰 시냇물과 바다를 이루듯이 도도하게 흘렀다. 이런 노력들의 일환을 철학사조라 부른다면, 현대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실존주의 사조가 유행되고, 미국에서는 실용주의가 그리고 영·미英美 계통에서는 과학적 실재론의 사조가 흐르고 있다. 구미歐美 여러 나라에서는 산발적이지만, 과학철학 내지 과학적 경험론의 사조가 유행하기도 한다.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동양사회에서는 신비주의적 종교, 즉 힌두교나 불교 그리고 유교 내지 도교 등의 종교철학이 큰 사조를 이루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아직까지 대다수 사람들이 ‘나’를 알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할 뿐만 아니라, 깊고도 넓은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나’를 알고자 철학을 한다는 사람들까지도 이 몸뚱이를 ‘유일한 나’로 알고, 독자적이지도 않은 의식활동과 주관적인 체험활동을 통해 숱한 말과 글을 쏟아내놓지만, 진정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나’를 알고 깨닫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사실 ‘나’를 알지 못하면, 이 세상 어떤 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나’ 하나쯤 모르는 것이야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알고자 원하는 모든 것이 불확실해질 뿐만 아니라, 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마저 흔들린다면, 문제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 만유萬有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것은 ‘나’요, 또 그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길도 ‘나’ 하나뿐이다. 그러기에 앎의 주체인 ‘나’를 알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나’를 알지 못하면, 이 순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마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도 허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게 된다. 더 나아가, 역사 이래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쌓아올린 모든 지식체계도 허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나’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할 뿐만 아니라, 모든 앎의 기본이자 출발일 수 있다. 그래서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BC 469∼BC 399) 같은 사람은 “너 자신을 알라”고 역설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BC 540∼BC 480)도 “인간의 비밀을 연구하지 않고서는 자연의 비밀을 열어헤칠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다.
심오한 불교에서도 수행자들이 선방禪房에 들어가면, ‘이 뭣고’라고 하는 화두話頭를 붙들고 ‘나’를 깨닫고자 안간힘을 쏟으면서 정진한다. 그러면 정말로 ‘나’란 무엇일까?
- 허신행 <<한몸사회>>(범우사) 전집 2권 <깨달음 기반 한몸사회 탐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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