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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허신행을 읽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2

필자 개인에 대한 주말 선원의 체험과 그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겠다. 전국에는 이보다 더 큰 선원이나 명상 센터·수련원 등이 많고, 어느 곳에 가더라도 이런 유형의 선문답禪問答식 대화는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이같은 대화가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웬 이유에서일까? 필자 개인의 고정관념과 착각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요, 우리가 그 동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고 살아왔던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나’란 누구이며,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이런 노력은 이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인류의 문명이 시작될 때부터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기 자신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고, 또 알려는 노력을 부단하게 전개해왔다고 봐야 한다. 흩어진 기록만 살펴보더라도 그런 흔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인류 문명의 발생지로 널리 알려진 바빌로니아·이집트·희랍·인도·중국 등지의 고대 문화사를 들춰보더라도 인간 자체에 대해 알려고 했던 노력의 흔적은 많다.

 

예를 들면,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 384∼BC 322)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규정하였다. 인간은 동물의 일종이긴 하지만, 다른 동물들처럼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논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거나 사물을 판단할 줄 아는 고등동물이란 뜻이다. 이것은 인간성품의 한 단면을 드러낸 것일 뿐, 인간 그 자체를 정의하거나 ‘나’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 데 반해서 흄David Hume(1711∼1776)은 말하기를,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지배되는 동물”이라 설정하고, 인간을 감정의 노예로까지 혹평한 바 있다.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을 한마디로 뒤집는 이면성裏面性을 들춰냈다. 물론 두 철학자는 인간 그 자체의 본질보다는 성품에 대해 말하고자 했겠지만, 성품 역시 인간을 모르고서는 밝혀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를 파괴시킨 니체Friedrich W. Nietzsche(1844∼1900)는 “인간은 동물과 초인超人 사이에 놓인 밧줄”이라고 말했다. 동물과 초인이 있고, 그 가운데 인간이 있다면, 인간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 그대로일 뿐이다.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말과 별 차이가 없다.

 

플라톤Platon(BC 427?∼BC 347?)은 “어둠 속에서 빛을 추구하는 인간”이라 보았고,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는 “죄를 지을수록 더 많은 죄를 짓게 되는 인간”이라 말하여, 이들 역시 인간행위의 관찰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각자의 독특한 관심과 연구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집요하게 추구해본 흔적들이 역력하다는 점이다. 몇 사람의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진화론에 깊숙이 빠져든 다윈Charles R. Darwin(1809∼1882)은 “인간은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진화론적 산물”이란 정의를 내렸다. 인간의 발전과정이란 차원에서는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만, 그것이 곧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은 그 무엇이지 결코 진화의 과정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경제 분야의 변천과정을 끈질기게 탐구해온 마르크스Karl H. Marx(1818∼1883)는 인간을 “사회환경 조건의 산물”로 단정지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인간의 내면세계와 행위를 관찰하면, 그런 면은 돋보이게 드러난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사회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인간행위의 한 단면일 뿐, 결코 인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해답은 못된다.

 

정신분석학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는 인간을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나누고, 무의식에 의한 인간의 본능에서 여러 가지 의문의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인간의 본능 역시 인간의 의식 및 행위의 한 단면일 뿐, 그것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수학에 밝았던 갈릴레이Galileo Galilei(1564∼1642)는 인간을 “있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의 절정에 도달한 동물”로 보았다. 동물 가운데 인간이 가장 많은 지식을 축적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식의 척도로 사람의 실체를 저울질할 수는 없다. 지식이란 인간의식 활동의 소산으로서 인간 그 자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홉스Thomas Hobbes(1588∼1679)는 부단한 고뇌 끝에 말하기를 “인간은 단순히 살아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에게 보편적인 속성이 없다고 단정짓다시피 말하였다. 그의 결론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기계’라고 말한 대목이다. 우리 인간이 만일 기계와 같다면, 인간의 독자적인 실존 내지 그런 실체는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불교에서 강조하듯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전적으로 매달리다보면, 예외 없는 인因과 연緣은 허무주의적 기계론적 사고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산업사회를 맞이하여 미국의 실용주의 노선에 따른 나머지 인간을 하나의 단순한 기계처럼 보았다면, 그것 역시 인간의 창의적인 영성靈性을 무시한 처사라고밖에 볼 수 없다. 어느 쪽이 되었건 간에 이 기계론은 이론적인 설명 차원에서 그럴듯해 보이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이처럼 천재성이 돋보인 사람들 역시 제각각 자기 학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의 다양한 견해와 주장을 결합하거나 통합할 수도 없다. 또 서로 다른 분야의 내면에 흐르는 보편적·과학적 원리마저 찾기 힘들다. 오히려 인간학에 대한 혼란만 가중시킨다. 그래서 셸러Max Scheler(1874∼1928)는 “각 분야의 특수과학이 늘어남에 따라 인간학에 대한 혼란과 모호성만 더해간다”고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인간학은 시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축적되는 것도 아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에 대한 깨달음은 별 진전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주제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도출된 흔적마저 엿보이지 않는다. 인간을 이해하기란 그만큼 어려운 과제라고 본다. 자신을 알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어쩌면 무모한 짓인지도 모른다.

 

밀폐된 유체(액체·기체)의 일부에 압력을 가하면, 그 압력이 유체 내의 모든 곳에 같은 크기로 전달된다고 하는 파스칼의 원리를 발견한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이 오죽했으면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을까. 이런 주제에 평생을 바쳐온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 역시 얼마나 많이 고뇌했으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독백처럼 내뱉었겠는가. 그렇지만 생각한다고 다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꿈 속에서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깨어나고 보면 모두 사라지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

 

- 허신행 <<한몸사회>>(범우사) 전집 2권 <깨달음 기반 한몸사회 탐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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