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입니까?”
“서울에서 온 허신행입니다.”
“서울에서 오지 않고 허신행이라는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사용하면 당신이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서울대학을 나와 해외에서 공부하고, 현재는 농촌 관련 국책 연구기관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서울대학을 나오지 않고, 해외에서 공부도 하지 않았으며, 농촌 관련 국책 연구기관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지 않고 있다면 당신이 아닐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일까요?”
“김해 허許씨 가문의 필弼자 윤允자 아버지와 진양 정鄭씨 가문의 서瑞자 운云자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두 분 부모님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다른 부모로부터 태어났더라면 당신이 아닐까요?”
“…….”
“당신은 정말로 누구입니까?”
“…….”
물음은 계속되는데, 말문이 자물쇠처럼 잠겨버렸다. 필자가 1980년대 초 죽어가는 농촌의 살 길을 찾지 못하여 몸져누워 있을 때, 중학교 시절부터 불교를 공부해오던 아내의 권유로 찾은 곳은 인천시 부평 산간에 위치한 조그마한 초가 선원禪院의 노老스님이었고, 친견親見하자마자 스님의 질문은 폭포수처럼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필자 나름대로는 국내외의 이름 있는 대학에서 공부도 했고, 당시에는 국내 최고의 연구기관에서 선망받는 일을 하며 자부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터였는데, 학교에도 별로 가본 것 같지 않은 시골 할아버지 풍의 스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말문마저 막힌 채, 모든 상相과 권위가 한 순간에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화를 가장 많이 낸 것은 언제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오후, 돈을 주지 않는다 하여 깡패로부터 두들겨 맞았을 때, 화가 제일 많이 났던 것 같습니다.”
“그때 왜 화가 났습니까?”
“억울하게 두들겨 맞았는데 그럼 화가 안 났겠습니까?”
“얻어맞은 다음에 화를 내면 누구의 손해입니까?”
“제 손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화를 냈을까요?”
“…….”
할 말을 또 잊었다.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왜 화를 내는지도 모르고 살아왔으니……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보였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주지 않고 스님은 또 물었다.
“그러면 가장 슬펐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어렸을 적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왜 슬펐을까요?”
“저를 낳아주신 아버님을 영원히 뵐 수 없게 되었는데, 어찌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아버님이 어디로 가셨는데, 영원히 볼 수 없다고 속단하셨나요?”
“예! 그러면 우리 아버님을 다시 뵐 수 있는 길이라도 있단 말씀이십니까?”
“불생불사不生不死입니다. 중생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법입니다.”
“…….”
“…….”
“스님, 그러면 저도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허허,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지요, 부처가 따로 있나요.”
물론 이외에도 스님으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았고, 제대로 대답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박사면 무슨 소용인가. ‘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도 모르는 박사가 쓰러져가는 농촌경제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방법은 또 어떻게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허탈감에 빠진 필자는 그 동안 해오던 일을 일부 접어둔 채, ‘나’를 찾는 노력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스님이 머무르고 있는 초가삼간 선원을 찾아 2년간 묻고 또 물었다.
- 허신행 <<한몸사회>>(범우사) 전집 2권 <깨달음 기반 한몸사회 탐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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