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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허신행을 읽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6

그러면 큰 나, 즉 대아大我가 ‘나’의 존재요, 실체의 모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과학적 접근은 아직 눈에 띄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철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었다.

 

철학에서는 소아小我나 대아大我처럼 생멸하고 변화하는 현상에 대하여 실체로 보지는 않았다. 실체는 불변하고, 초경험적이며, 무한의 절대자이자 현상계의 원인을 이루는 근본으로 보았다. 그러기에 대아大我를 실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소아小我나 대아大我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현대철학의 중심과제 자체가 인식론에서 형이상학으로, 그리고 재래의 실체론에서 존재론으로 옮겨진 사실만 눈여겨 봐도 존재론의 비중을 감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현대의 존재는 자연적 물리적 존재이거나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표현적인 자연과 인간적인 존재 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우주란 무엇이냐, 세계란 무엇이냐, 인간이란 무엇이냐 하는 등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인간의 존재양식이나 그 존재성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 역시 대아大我란 무엇이냐, 그것이 곧 ‘나’인가 하는 본질적인 물음에는 해답을 주지 못한다.

 

아마도 이 물음에 대해서 가장 많은 관심과 연구를 집중시킨 집단은 불교계라고 믿어진다. 석가모니의 오랜 고행苦行과 깨달음 자체가 이 문제 때문이었다.

 

그래서 불교만큼 이 문제에 대하여 투철하게 설명해놓은 집단도 없다고 생각한다. 불교 사상가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소아小我 내지 대아大我에 대하여 깨달은 바를 가장 잘 압축시켜놓은 경전經典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전문 16행行 260자字로 구성된 아주 작은 경經이지만, 무려 600권에 달하는 대반야경大般若經의 정수精髓를 뽑아 압축시킨 것이요, 불교의 8만4천 법문을 요약해 만든 최고 상승上乘의 진리를 포함한 경전經典으로 인정받고 있는 귀중한 책이다.

 

반야심경 또는 심경心經이라고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의 약칭이다. 범어로는 ‘prajnaparamita-hrdaya-sutra’라고 하며, 그 1권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반야심경에는 대본大本과 소본小本의 두 종류가 있는데, 모두가 산스크리트 본本으로 전해져왔다. 대본은 앞뒤 서론과 결말의 문구가 들어 있을 뿐, 소본과 본문상의 차이는 없다.

 

반야심경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십여 종의 번역본으로 바뀌었는데, 동양권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은 당唐나라의 현장玄雲이 번역(서기 649년)한 것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의 핵심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한 마디로 비었고[空] 없다는[無] 내용이다. 그러니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고통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해탈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만유萬有가 비었고[空] 없다는[無] 이 엄청난 판단의 근거는 다름 아닌 부증불감不增不減, 즉 만유의 근본을 이루는 본체本體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과학으로 말하면, 이른바 ‘질량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물질이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생성되거나 소멸되더라도 전후 총 질량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이 언제나 같다’고 하는 내용이 질량 불변의 법칙이다. 모든 물체의 운동원이 되는 에너지 역시 마찬가지로 그 ‘형태를 바꾸거나 어떤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옮길 때에도 전체의 에너지 양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을 처음 알아낸 사람은 프랑스의 라브와지에Antoine L. Lavoisier(1743∼1794)라는 화학자이다. 화학실험을 통해 이 법칙을 입증한 사람은 란돌트Hans H. Landolt(1831∼1910)와 외트뵈시R뾩뇆d von E쉞v쉝(1848∼1919)라는 과학자이다. 라브와지에가 질량 불변의 법칙을 알아낸 것은 1774년이요, 후에 두 사람이 이를 입증해낸 것은 각각 1908년과 1909년이다. 또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확립된 것도 19세기 중엽 독일의 헬름홀츠Hermann L. F. Helmholtz(1821∼1894)와 마이어Julius R. Mayer(1814∼1878) 그리고 영국의 줄James P. Joule(1818∼1889) 등에 의해서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미 2천5백여 년 전부터 선각자들이 질량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확연히 깨달았고, 그 진리로부터 8만4천의 법문이 강물처럼 도도하게 행해져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세계에서는 18∼19세기에 와서 겨우 이 법칙을 알아내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깨달음의 진리와 과학의 증명이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지금까지 평행을 이루면서 대다수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종교는 종교, 과학은 과학이라는 인간의 고정관념의 벽이 얼마나 두꺼운 것인지를 실감케 하는 좋은 사례이다.

 

‘과학 없는 종교는 미신이요, 종교 없는 과학은 흉기’라고 한 어느 석학의 말이 떠오른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놓일 때,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주를 이루는 근본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본체本體 또는 체體라 부르지만, 현대과학에서는 질량 에너지라고 말한다. 물론 종교나 철학에서는 절대자·진여·한마음·하나님·신·영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 근본적인 진실이 다른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그 이름이 어떻든 간에 제법공상諸法空相한 본체에 대해서 반야심경은 좀더 자세하게 육불六不 또는 불이不二로 표현하고 있다. 이 불변의 본체는 불생不生 불멸不滅이고, 불구不垢 부정不淨하며, 부증不增 불감不減이라 하였다. 우주의 근본은 새로이 생겨나거나 없어지지도 않고, 더럽거나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이 부증불감 법문은 질량 에너지 보존의 법칙 그대로이다.

 

이 불변의 본체 또는 질량 에너지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밝혀둔 것은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인데, 이에 의하면 팔불八不 또는 팔부중도八不中道라 하였다. 팔부란 불생不生, 불멸不滅, 부단不斷, 불상不常, 불일不一, 불이不異, 불래不來, 불거不去를 말한다. 본체는 새롭게 생겨나거나 멸하지도 않고, 끊어지거나 항상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며, 오거나 가는 것도 아니다.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에서는 본체를 불유不有, 불무不無, 불일여不一如, 불이不異, 불생不生, 불멸不滅, 부증不增, 불감不減, 불청정不淸淨, 불부정不不淨이라고까지 덧붙이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현대과학에서는 질량 에너지에 대하여 부증不增 불감不減 정도로밖에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다. 더욱이 그것을 인간세계로까지 확대시켜 생각하거나 다른 측면에서 새로운 사실을 입증해보려 노력하지 않고 있다.

 

하여간 우주의 근본을 이룬 본체가 불변이라면, 그에 의해서 나타난 만유萬有는 항상하지 않고 수시로 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양과 작용은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듯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즉 꿈이나 허깨비 또는 물거품이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있다. 만유의 존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허망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반야심경에서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인간중심으로 다루었다. 삼라만상에 대하여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서 그것이 ‘어떻다’고 인식하는 주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식하는 주체가 없으면, 모든 사물과 현상은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삼라만상이 뭐라고 말하던가. 인간이 그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니까 삼라만상이요, 복잡한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삼라만상 자체는 물거품처럼 생멸을 거듭할 뿐, 영원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주체, 즉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것을 분해시켰을 것이다.

반야심경의 첫머리는 경전 전체의 압축이요, 결론적인 내용이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조견照見 오온개공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참지혜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수행할 때에 몸과 마음 모두가 비었다[空]는 것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통과 액난厄難을 벗어난다’고 했다.

이 가운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다. 오온은 몸[色]과 마음[受·想·行·識]인데, 이 모두가 비었다[空]고 했다. 비었다고 보는 논리적 기반은 바로 본체의 불변성, 즉 질량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있다. 색色이란 물질이요, 수受·상想·행行·식識은 정신활동이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과 정신적인 활동은 비었다고 보는 직관이다.

옛날 선현들과 현대 과학자들은 본체, 즉 질량 에너지의 불변성이라고 하는 하나의 진리를 발견하는 데에는 일치하였다. 그러나 현대 과학자들은 발견 자체에서 머무른 데 비하여, 옛날 선현들은 우주만유가 다 비었다[空]는 데에까지 인식의 영역을 넓혔던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반야심경은 이어서 진공眞空의 원리에 대하여 세부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사리자舍利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時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석가모니 부처가 사리자에게 말하기를 “물질이 빈 것과 다르지 않고, 빈 것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므로, 물질이 바로 빈 것이요, 빈 것이 곧 물질이며, 나머지 수·상·행·식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니라” 하였다.

 

진공의 원리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색·수·상·행·식과 공空의 동시성, 즉 동전의 앞뒤와 같다는 사실이다. 물질과 정신이 비었지만 동시에 빈 것이 바로 물질과 정신이라는 점, 빈 곳에서 물질과 정신이 나왔고, 그러기에 이들은 비었다는 사실이다.

물질을 기본원소로 분해시키면, 108개로 흩어지는데, 이들 원소는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 원소를 비었다고 말한다면, 모든 물질은 원소로 구성되었고 정신은 물질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물질과 정신이 비었고, 빈 것이 물질과 정신이라는 등식은 간단히 성립된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원소를 분해하고 또 분해하여 물질 이전의 본체로까지 가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色은 사람의 몸뿐만 아니라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을 가리킨다. 모든 동물과 식물, 산과 들, 천체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물질을 포함하는 것이 색이다. 보통사람의 눈에는 이들 물체가 비었다고 보기에는 사실 무리이다. 그러나 시간의 문제일 뿐, 이들 물체는 단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가 언제인가 우리들의 눈에서 사라진다. 불교에서는 이를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원리로 설명한다.

 

성成이란 어떤 물체가 여러 개의 원소로 구성되어 형성되는 것이고, 주住란 이 물체가 일정한 수명을 가지고 현상계에서 머무르는 것이며, 괴壞란 변화를 거듭하여 부서지는 것이고, 공空이란 그 물체가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눈에서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간을 빼버리면, 원소가 물질이요, 물질이 원소이고, 동시에 원소가 빈 것이요, 빈 것이 원소일 수밖에 없는 자명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어떤 것도 변한 적이 없는 질량 에너지 불변 그대로일 뿐이다. 마치 물이 수증기로 되고, 수증기가 물이 되더라도, H2O라고 하는 물분자 그 자체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듯이 말이다. 이런 사실이 2천5백여 년 전에 분명히 인식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질뿐만이 아니라 정신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작용을 수·상·행·식으로 표현하였다. 눈·귀·코·혀·몸의 다섯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여서[受], 생각하고[想], 생각한 바를 행동하며[行], 행한 다음에 판단하여 얻은 지식[識]의 순으로 정리한 이 모든 과정 역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법칙을 통해 결국 공空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생生이요, 그 생각이 잠시 머물러 있으면 주住이고, 다른 생각으로 바뀌면 이異이며, 처음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면 멸滅이다. 이런 과정을 밟지 않고 영원히 존속되는 생각이란 없다. 생각은 모두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연거푸 일어나는 것 또한 생각이다. 그러기에 정신이 비었고, 빈 것이 정신이라고 직관해도 무리는 없다. 여기까지 논리적으로 어떤 모순도 발견할 수 없다.

반야심경에서는 이 단계에 들어서 진공眞空의 실상實相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사리자私利子 시是 제법공상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사리자야 모든 법의 공空한 모양은 어떠한가? 그 모양은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라고 하였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이 대목이 불교철학의 핵심이요, 기초이며 논리전개의 기반인 셈이다.

다음에는 공중무상空中無相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시고是故 공중무색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無眼界 내지 무의식계無意識界

 

‘이런 고로 공空한 가운데에는 물질이 없고, 오감五感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생각·행동·인식 등 어떤 정신작용도 없으며, 눈·귀·코·혀·몸·의식의 어떤 감각기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들 여섯 개 감각기관의 활동대상인 물질이나 소리·향기·맛·촉감·법의 어떤 것도 없다. 또한 이들 감각기관과 활동대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여섯 가지의 인식경계[眼界·耳界·鼻界·舌界·身界·意界]도 없다’고 하였다. 이 모두가 물거품이나 아지랑이처럼 잠시 일어났다 꺼졌다 할 뿐, 영원한 불변의 실체가 아닌 것이다.

 

공중무법空中無法에 대해서는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내지 무노사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 하였다.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된 어리석음이 없고, 또한 그 어리석음이 다하였다는 것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 늙고 죽음이 다하였다는 것도 없으며, 고통·집착·없앰·도道라고 하는 사제법四諦法도 본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 역시 인간의 의식활동이 만들어놓은 뜬구름과 같은 일시적인 모양이거나 관념일 뿐, 영원히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절대인 공空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하였을까? ‘무지無智 역무득亦無得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절대인 공空을 깨닫고 보면, ‘깨달았다는 지혜도 없고, 깨달아 얻었다는 것까지도 없는데, 깨달아 얻을 연고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하였다.

그러니까 수도修道를 하여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아직도 진공眞空 속에 들어가지도 않았거니와 분별심 많은 무명無明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절대공絶對空에서는 공空도 또한 공空했고, 무無도 또한 무無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는 무한 자재의 해탈열반解脫涅槃이다.

 

이 단계가 되면 “시끄럽다. 차나 한잔 마시고 가거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말과 글 등 의식활동을 통해서는 결코 절대공에 접근할 수 없다.

반야심경은 구경열반究竟涅槃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보리살타菩提薩狎 의依 반야바라밀다고般若波羅蜜多故 심무가애心無溪巫 무가애고無溪巫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遠離 전도몽상顚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

‘보살이 깨달음으로 참지혜를 얻어 해탈열반의 저 언덕에 오르고 보니, 마음에 어떤 걸림도 없고, 걸림이 없으니 불안과 공포가 없어진다. 그리하여 뒤바뀐 꿈 속의 헛된 생각을 모두 끊어버린 후, 마지막 열반 또는 적멸寂滅에 도달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우주만유가 다 공空했다는 사실을 투철하게 깨달았으므로 어떤 경계에도 머무르지 않고 번뇌 그대로가 곧 보리菩提요, 생사生死 그대로가 곧 열반이어서, 마음에 걸릴 것도 없고, 시끄러울 것도 없는 큰 해탈의 도道를 성취하게 된다.

 

최후의 성불成佛에 대하여 반야심경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의依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고득故得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多羅三큷三菩提라 하였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통해 모든 부처께서 참지혜의 저 언덕에 도달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진리를 바르게 깨쳤다’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에서 아阿는 무無라는 뜻이고, 뇩다라多羅는 상上이라는 뜻이며, 삼三은 정正이요, 막큷은 등等, 보리菩提는 각覺이라는 뜻이니, 이를 다시 쓰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높고, 그 이상 더 위가 없는 진리를 바르게 깨우쳤다는 의미이다. 성불成佛은 바로 그런 뜻이다.

반야심경의 끝부분에는 주문呪文이 압축돼 있지만, 이것은 별 의미를 갖지 않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반야심경의 주요내용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우선 놀라운 사실은 본체의 불변성, 즉 질량 에너지 불변의 법칙으로부터 엄청난 지혜라고 할까, 이 우주의 만유를 통째로 한 손에 넣는 깨달음의 요체要諦 내지는 정수精髓를 깊숙이 맛보게 한다는 점이다.

 

이 불변의 실체로부터 이 세상의 만유가 출현하였고, 그 가운데 인간의 탄생과 함께 복잡한 삶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본체에서 보면 만유의 모양과 작용은 마치 꿈이나 허깨비처럼 나타나고 일어나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이 모든 것들을 인간의 물질적인 육신肉身[相]과 정신 작용[用]으로 압축시켜 한 마디로 공空과 무無로 얼음 쪼개듯 냉철하게 정리하고 있다.

 

인간의 눈·귀·코·혀·몸은 물론 그 대상과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각작용 일체를 실질적인 면에서 볼 때 비었고[空] 없는[無] 것으로 명쾌하게 단정짓고 있다. 여기에는 티끌 하나 붙을 자리가 없어진다. 반야심경은 어떤 철학이나 개념과 논쟁도 틈을 비집고 들어설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의 행복이나 고통 따위가 끼어들 틈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처럼 반야심경은 현대 과학자들마저 감히 넘나볼 수 없는 거의 무한대의 영역을 공空이나 무無로 간단하게 요리하여 인생의 고통과 액란을 벗어나 성불成佛의 경지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힘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불교를 과학이요 철학이라 말했겠지만, 사실은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부증불감不增不減을 깨달은 것이나 라브와지에가 질량 불변의 법칙을 알아낸 것, 또한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사실 자체는 서로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의 깊이와 폭이요, 제자들의 집대성 노력과 종교화일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현대인의 학문적 관점에서 생각하더라도 어떤 논리적 모순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고도로 압축된 판에 엄청난 스케일의 내용이 들어 있어서 보통사람들로서는 소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추상적인 경전으로 보일 수도 있다.

2천5백여 년 전에도 일반인들은 이런 법문法門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석가모니는 아함경阿含經을 12년간, 방등경方等經을 8년간 설하고 난 후, 21년간에 걸쳐서 반야경 6백 부를 설했다고 한다.

 

반야심경에서 말한 대로 인간이 본체의 불변성, 즉 질량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확실히 깨닫고 성불하여 있는 그대로 바르게 살아간다면, 인간사회에 어떤 갈등이나 마찰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의 진리가 성행한 사회에서는 갈등과 마찰이 비교적 적고, 또 인구가 많다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교와 유사한 힌두교가 성행한 인도에서도 인구가 많고 빈부의 격차가 심한 데도 계층 간에 별 마찰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먹을거리가 적은 데도 불구하고 인구가 많은 것 자체는 갈등과 싸움 그리고 전쟁이 그만큼 적게 일어났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교와 같은 깨달음의 종교가 결여된 서구사회는 부단한 경쟁과 투쟁으로 인구밀도가 낮게 형성되어 있다. 일반 동물의 세계처럼 먹을거리가 인구밀도를 결정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여간 현대 과학자들마저 질량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발견하고도 법칙 그 자체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과학의 틀 안에 고스란히 갇혀 있는 데 비해서, 일찍이 선각자들은 그런 틀 속에 갇히지 않고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처럼 상상의 세계를 무한히 펼쳐서 ‘인간이 무엇인가’하는 근원적인 물음까지 꿰뚫어내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현대문명의 한계가 보이고, 방향감각마저 상실한 채, 정처 없이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의 앞날을 위해서도, 고전과 종교 등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진리를 현대과학과 접목시킬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다.

 

그리하여 과학보다 더 분명하게 밝혀진 진리를 종교라는 고정 관념의 틀 속에 묶어두지 말고, 현대문명의 밝은 세계로 끌어내 과학의 세계를 믿듯이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의 정각正覺사회로 나와 고통과 번뇌를 벗어 던지고, 자유스럽고 평화로운 해탈의 경지에서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여간 분명해진 사실은 ‘큰 나’, 즉 대아大我는 물론 소아小我도 그 존재는 허망하여 무無이므로, 우리는 궁극적으로 ‘무아無我’에 접하게 된다.

 

- 허신행 <<한몸사회>>(범우사) 전집 2권 <깨달음 기반 한몸사회 탐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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