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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허신행을 읽다

산업사회 이후의 새로운 물결

산업사회 이후의 새로운 물결

 

전자공학은 대형기계 중심의 산업사회로부터 컴퓨터에 의해 작동하는 로봇의 무인無人공장화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였다. 컴퓨터는 정밀기계의 설계는 물론 자동차와 비행기 및 각종 소비제품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공장의 부품관리와 창고의 재고관리에도 컴퓨터는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컴퓨터 없이는 인공위성을 생각해낼 수도 없다. 모든 정보 및 자료의 저장과 가공, 송수신 그리고 그에 의해서 만들어진 고도의 정밀기계 등은 역시 컴퓨터의 몫이다. 이렇게 볼 때, 공장굴뚝 경제의 기본구조가 컴퓨터에 의해 뒤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 말까지 컴퓨터라는 신비의 기계는 그 어디에서고 찾아보기 힘들었다. 당시 유엔기구의 외국인들이 근무하는 곳엘 가보면 기껏해야 수동식 쇠뭉치 계산기를 놓고 손으로 소리를 내며 간단한 계산을 해보는 정도였다. 그것으로 간단한 1·2차 방정식을 겨우 풀어볼 때의 즐거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필자는 1970년대 초 텍사스인스트루먼트사社에서 생산한 단순 포켓용 전자계산기를 보고 신비하게 느꼈다. 그 시대의 공장생산은 대부분 쇠뭉치들의 기계와 힘센 근육노동자들에 의해서 반복적인 작업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도의 계산능력을 가진 컴퓨터가 출현하면서 생산양식과 작업공정, 제품의 디자인과 판매 등 일체의 과정에 혁신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컴퓨터에 의해서 생산성이 급속하게 향상되는데도 고용인력은 오히려 줄어드는 기이한 현상마저 속출하였다. 다양한 디자인이 컴퓨터에 의해서 손쉽게 행해짐에 따라 소량 다품목 생산이 가능해졌다. 제품 간의 차별화가 용이해지고, 아이디어에 포착된 상품의 제조도 손쉽게 되었다. 정보의 수집과 분산이 잘 됨으로써 소비자의 반응이 생산자에게 신속 정확하게 전달되고 제품의 적응이 빨라지게 되었다. 그 결과, 대량생산 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고 규격화와 집중화, 집단화, 극대화 등 산업사회의 원칙과 특징들이 하나하나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전자공학 분야의 눈부신 발전으로 모든 분야에서 차별화와 미세화, 세분화, 정밀화 현상이 돋보이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전자기기에 의한 자동화, 무인공장, 무인상점, 서류 없는 사무실, 무인 자판기, 전자주택, 자동통역기, 전자도서, 전자전쟁 등이 속출하고 있다. 비행기나 자동차도 컴퓨터로 움직이고, 환자의 진찰이나 치료까지도 컴퓨터에 의해서 자동화될 날이 오고 있다. 컴퓨터와 전자통신 장비의 발달로 재택在宅근무가 가능하게 되었고, 영상회의가 잦아지며 안방에 앉아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동통신에 의해 사람이 이동하는 곳마다 통화가 가능해지고 도심지의 복잡한 길거리나 깊은 산속의 오솔길을 걸으면서도 사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굳이 일정한 출퇴근 시간이 필요없게 된다.

 

더욱이 컴퓨터와 반도체산업, 오디오와 비디오 그리고 통신시설의 발전은 지식과 정보분야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든 정보와 자료가 소형 반도체 칩에 수록됨에 따라 도서관이나 영화관, 노래방, 백화점, 박물관, 시장 등의 대형건물이나 시설들이 서서히 사라질 단계에 이른 것 같다. 컴퓨터만 가동시키면 음악이나 필요한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영화관람이 가능해지며, 어떤 책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된다.

 

박물관의 진귀한 보물을 입체적으로 보게 되고 해설까지 곁들여 들을 수 있게 된다.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뿐만 아니라 세계의 구석구석에 쌓인 상품까지 컴퓨터를 통해 모두 한눈에 살피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버튼으로 주문하고 곧 배달받게 된다. 지불 역시 컴퓨터로 연결된 온라인 구좌로 지시하면 구차한 수속들이 모두 생략된다. 이처럼 대부분의 생활이나 경제활동, 직장인들이 안방의 컴퓨터를 통해서 이루어지면 사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사무실이 직장에서 가정으로 옮겨가면 윗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위계질서란 것이 필요없게 될지도 모른다. 권력이란 것도 별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교통지옥이나 러시 아워란 말도 사라질 것이고, 자동차의 숫자도 줄어들 것이다. 가정에서는 가족들이 하나의 작업팀처럼 유기적으로 상부상조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프로그램을 짜고 아내와 자녀들은 자료를 찾으면서 단순한 반복작업을 거들 수 있을 것이다. 서재에 놓인 조작타자의 화면을 통해 공장의 복잡한 공정을 보면서 남편과 아내가 교대로 감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토플러는 전자 대가족과 플렉스타임flextime의 시대를 예고해놓고 있다.

 

이와 같이 되면 산업사회를 대표하던 대기업들이 분화되고, 전깃불만 반짝거리는 무국적 통화가 춤추며, 덩치 큰 대형건물들은 특색을 갖춘 전문 전자점포로 변해갈지도 모른다. 권력구조가 바뀌고, 직장이나 회사의 조직마저 전면적으로 재편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집 밖의 활동은 대부분 셀프서비스 체제로 바뀔 것이고, 집에서 간단히 꾸밀 수 있는 조립식 상품이 많아지게 되면 ‘자기 일은 자기가 하는 DIY(Do It Yourself)’라는 신종 생활형태가 출현할지도 모른다. 컴퓨터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형의 의복이나 가구, 가전제품 등을 디자인하여 주문생산을 시키는 일종의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인 2인 동일역을 떠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틈이 좁아지고 시장이란 공간이 작아지게 된다.

그러면 점차 사회는 국가라는 개념마저 희미해지고 특성별 동질성에 따라 끼리끼리 모이는 다원화된 공동사회로 발전해가지 않을까 유추된다. 경제개발은 정주권 단위의 지방자치단체에 의해서 추진되고, 사회의 갈등과 마찰에 따라 발생하는 국지전이나 살상 및 파괴행위는 지구촌의 통합조정된 세계정부 또는 연합체에 의해서 제어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쯤 되면 기존의 가치는 모두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관과 정신체계가 형성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비록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분야라고 하여 변하지 않고 이전과 같을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의문은 왜 이처럼 엄청난 변화가 도처에서 일어나는가 하는 점이다. 앨빈 토플러 역시 그런 소박한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그가 시원한 해답이나 논리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변화를 믿고 싶어하지 않거나 거부한다. 변화에 순응 내지 적응하지 않으면 갈등과 마찰이 생기고, 경우에 따라서는 적응세력과 비적응세력 간에 투쟁과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에서 이런 유형의 싸움과 희생은 숱하게 있어왔다.

 

뉴턴의 관성의 법칙처럼 인간은 현 생활에 안주하기를 원하지 변화에 적응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변화에는 항상 위험이 따르고 불안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변화란 기득권의 포기를 의미할 때가 많다. 변화에 대한 적응은 통상 많은 비용을 수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물론 현실에 불만이 많고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변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어떤 경우가 되었건 변화는 정도의 차이일 뿐 우연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변화는 필연적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이 변화의 물결이 너무나 세차게 밀려오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렇다면 변화의 물결에 역류하며 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정면으로 도전하여 변화의 물결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만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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