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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애견일기1 - 도담 도란 도조 도롱

귀족개와 평민개

귀족개와 평민개

서양인들은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여 사람이 제일 귀하다고 하지만, 동양에서는 삼라만상이 모두 귀하다고 가르쳐 왔다. 그래서 한낱 미물까지도 생명이 있는 것이면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생명은 귀하게 취급당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이럴 때는 어떤 생명은 귀하게 태어나고 어떤 생명은 천하게 태어난 게 아닌가 하는 운명적인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한다.
사람도 그렇지만 개의 경우는 그 운명이 아주 극과 극으로 갈라지는 걸 늘 목격한다.
어떤 개는 사람과 한 가족처럼 지내며 분에 넘칠 정도로 호의호식하는데, 어떤 개는 잡아먹힐 날만 기다리며 좁은 데 묶여 지내니 같은 품종의 동물로서 이렇게 운명이 다른 경우가 또 어디 있을까.

우리 ‘아이’들 넷, 도담이와 도롱이, 도란이, 도리를 시골 마을에서 키우다 보니 자주 이런 물음에 봉착해서 심경이 착잡해지곤 한다.
우리가 함께 살던 집의 주인댁에도 개가 세 마리 있었다. 세 마리 다 조상을 알 수 없는 잡종이었다. 한 마리는 창고 옆에 묶여 살고, 한 마리는 바깥마당에 매여 살고, 또 한 마리는 변소 옆이 거처였다.
이 녀석들은 다 식용견이었다. 시골 마을에서 흔히 심심풀이 부업삼아, 아니면 음식 찌꺼기 처치하기 위해 키우는 개였다. 그야말로 개 취급을 받으며 개처럼 살고 있는 개 같은 인생이었다.
그 주인집 아저씨 아주머니는 마을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심성이 착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개를 대하는 걸 보면, 개를 키우는 우리로서는 정나미가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먹을 것도 제대로 안 주어서 그 집 개들은 그야말로 비루먹은 강아지란 표현이 꼭 어울렸다. 음식물이 많이 남는 날이면 많이 주고, 남는 음식이 없으면 아예 안 주었다. 음식물이 남을 때도 한동안 모았다가 주기 때문에 시큼하게 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방주사 한 대 안 놓아주니, 새끼를 낳더라도 성견이 되도록 자라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부분이 배탈을 앓아 설사를 하다가 시름시름 죽어 갔다. 그러면 아무런 미련없이 쓰레기장에다 휙 갖다 버렸다.

세 녀석 가운데 특히 바깥 마당에 사는 녀석이 불쌍했다. 개집도 없이, 비나 햇볕을 피할 그늘도 없이 맨땅에서 지냈다. 그 혹한의 겨울에도 맨 마당에서 그냥 자야 했다. 눈이 오고 그 눈이 녹아 빙판이 졌어도 그 위에서 그냥 살게 했다.
“아저씨, 오늘 밤엔 영하 20도로 내려간답니다. 짚더미라도 깔아주어야지요?”
녀석이 얼어죽을까봐 너무도 걱정이 된 우리가 조심스레 말했으나 아저씨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염려 놓으시우. 개란 짐승은 본래 저렇게 사는 거니까.”
생각 같아서는 우리가 덮고 자는 이불이라도 내다 깔아 주었으면 좋으련만, 개 주인이 이렇게 말하는데 나설 수도 없었다. 우리로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불가항력이라는 말이 이런 때 어울릴 것이다.
날씨가 너무 추운 날 밤을 지내고 나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가기가 두려웠다. 바깥마당에 매인 녀석이 얼어 죽어서 뻣뻣하게 굳어 있으면 어떡하나 하고 지레 겁이 났다.
그런데 녀석은 그 추운 겨울을 맨 바닥에서 아무 탈 없이 보냈다. 아저씨의 말대로 개란 짐승은 본래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모양이었다.
주인집 개 세 녀석은 이렇게 차별받으면서 한많은 견생을 꾸려 나가는 한편 우리 집 개들은 우리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견생을 살아 나갔다.

인간한테 사랑받는 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우리 집 개들은 지들이 개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다른 집 개들이 오면 “웬 개?” 하는 반응을 보였다. 자기들과 다른 개들과는 전혀 다른 족속인 걸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다른 개들은 주인이 아는 척도 안해주는데, 우리는 신주단지 모시듯 위해주니까 말이다. 그러니 날이 갈수록 거만해져서 꼴이 가관이었다.
주인집 개들은 그런 우리 개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자기들은 묶여 있고, 우리 개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니 그럴 만도 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개들과 친해질까 머리를 쓰는 게 보이기도 했다. 꼬리를 치고 반기기도 하고, 자기 먹이에 가까이 가도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집 개 가운데 변소 앞에서 사는 녀석은 우리 개들을 몹시 못마땅해 했다. 반골적인 기질이 있는 녀석이었다.
우리가 아침 산책을 다녀오면 녀석은 우리 ‘아이들’을 향해 맹렬하게 짖어댔다. 기분 나쁘다는 것이었다. 이를 허옇게 드러내놓고 짖었다.
그러면 도담이가 쫓아가서 마구 혼을 내주었다. 녀석의 턱 앞에 대고 맞짖는 것이다. 그 뒤를 도롱이가 쫓아가 도담이보다 한 발쯤 뒤에 서서 녀석을 향해 짖었다. 도롱이는 늘 앞장서지 않고 도롱이 뒤만 따라다녔다.
이렇게 둘이 합세해서 짖어대면 녀석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그 시샘하는 게 하도 심해서 인간인 나로서는 늘 그 녀석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들’은 어딜 가나 자신만만하다. 사랑을 받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다른 집 개들, 그러니까 일반 식용견으로 크고 있는 개들은 그렇질 못하다. 우선 경계심이 많고, 세상 모든 것에 적대감이 드는 듯 증오심을 드러낸다.

이런 개들을 만나면 가슴이 아프다.
식용견의 운명으로 크고 있는 개들은 대개 덩치가 크고 잡종이다. 그러나 이들도 유심히 보면 혈통 있고 족보 있다는 고급 애완견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녀석들도 애완견 못지않은 지능이 있고 사람을 좋아하고 희노애락을 느끼고 시새움도 할 줄 안다.
그런 녀석들을 죽여서 먹다니, 인간이란 참 죄를 많이도 짓는구나 싶다. 하긴, 이런 생각 뻗쳐 나가다 보면 소나 돼지나 닭이나 다 고기로 먹는다는 게 죄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스님들처럼 고기 안 먹고 살 수도 없는 일이고...

불교에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한다. 남편과 나는 둘다 불교 신자이다. 같은 대학 같은 과 1년 선후배지간이기도 했지만, 불교학생회에서 만난 인연으로 오늘까지 함께 지내고 있다. 절에 자주 나가는 독실한 신자는 못되지만, 불교에서 가르치는 법은 따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살생의 개념은 폭이 아주 넓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도 살생이지만, 쓸 수 있는 물건을 쓰지 않는 것도 살생이다. 농부가 소에게 먹이려고 꼴(풀)을 베는 것은 살생이 아니지만, 길 가다가 무심코 풀을 잡아 뜯는 것은 살생이다.
이러한 불교적 불살생의 도리를 지키면 지구 자원을 함부로 쓰고 버려서 생기는 환경 문제도 해결되고, 동물을 마구 잡는다든가 학대하는 등의 문제도 해결되고, 전쟁 등 인류가 스스로를 해치는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다시 동물 얘기, 개 얘기로 돌아가자면, 개는 우리가 일상 육식품으로 먹는 소나 닭 돼지와는 다르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아이큐가 높아 상황 인식을 잘 하고, 감정이 풍부해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을 감지할 줄 아는 짐승이라는 게 제일 마음에 걸린다.
한 번은 남편과 마을 길을 걷는데, 어떤 집에서 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깨갱깽 하고 완전히 죽어 가는 소리였다.
그 집 마당을 들여다 보니, 주인이 자기 집 개를 시멘트 바닥에 잔인하게 패대기치고 있었다. 평소에 마음 착해 보이던 분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남편이 놀라서 묻자, 주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 녀석이 하두 짖어서 시끄러워 살 수가 있어야지. 탕이나 끓여 먹으려구.”
그 집 주인은 시멘트 바닥에 던지는 것 갖고는 개가 쉽게 죽어주지 않자, 아들한테 각목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러더니 마구 팼다. 개는 원망어린 눈으로 비명을 지르고...
우리는 차마 더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서 그 자리를 황망히 떴다.
그 집 개는 그렇게 무참히 죽었다. 짖자고 태어난 견생이 짖었다고 주인 손에 살해당한 것이다.
앞서 말한 주인집 개 세 마리도 그 해 여름에 차례차례 없어졌다.
한 마리 없어질 때마다 녀석들의 순박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마음이 쓰렸다. 개를 사랑하면서도 이웃집 개는 어쩌지 못하는 무력감에 뼈속 깊이 스며들었으나, 앞서도 말한 것처럼 불가항력이었다. 그렇다고 온 동네 개를 다 사서 기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리 마을 사람들은 예전 시골 마을 풍습 그대로라서 친목계니 동창회니 할 때마다 귀한 음식으로 보신탕 잔치를 한다. 자기 집 개를 직접 죽이기 꺼려지면 자기 집 개는 친구 집에 보내 죽이고 대신 친구 집 개를 데려와 죽이고 털을 끄슬려서 맛나게 끓여 먹는다.
얼마 전에는 천리안 OO 동호회 사람들이 우리 옆집에 놀러 왔는데, 커다란 솥을 빌려 달란다. 우리 집엔 큰 게 없어서 옆집 가서 빌려 주었더니 그걸 산으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몇 명이 합세해서 읍내 가서 개고기 한 마리를 사 와서 산에서 탕을 끓여 먹는 것이었다.
개 먹는 게 보편적인 정서인데 먹는 것 갖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저녁 내내 기분이 착잡하고 씁쓸했다.

몇 년 전인가 어떤 고급 여성지에 개를 사랑한다는 사람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그 사람은 시골 어느 마을에선가 개를 꽤 많이 기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여성지 기자가 아니라, 다른 스포츠 신문에 다니는 기자가 취재를 해서 기고한 것인데, 그 글을 읽고 분노했었다.
개 기르는 사람이, 개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서 자기가 실제 겪은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돈을 많이 주고 고급견 두 마리를 쌍으로 샀댄다. 그런데 암컷이 성견이 되어서도 새끼를 못 낳더란다. 불임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친구들한테 그 암컷을 잡아먹으라고 했고, 친구들은 남편인 수컷이 있는 데서 암컷을 잡았단다. 그랬더니 수컷이 그 이후로 밥을 안먹더란다. 결국 그 수컷은 단식으로 굶어 죽었단다. 그때 그 사람은 개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양 떠벌였다.

이 글을 읽고 무척 화가 났다. 어찌 이런 사람을 애견가라고 취재했단 말인가. 그는 개를 그냥 하나의 공업제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좋은 제품 내서 파는...
취재에 응한 사람이나, 취재한 사람이나, 그걸 실은 잡지나 참으로 한심했다.
너무도 화가 나서 그걸 쓴 스포츠 신문 기자한테 항의했다. 그런 사람을 애견가라고 쓴 당신의 양식이 의심스럽다고... 기자는 변명을 마구 해댔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동물 사랑의 수준이 그 정도라는 걸 알고 절망했던 적이 있다.

개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아주 최소한으로 바라는 것은, 잡아먹을 땐 잡아먹더라도, 그저 기르는 동안만큼은 먹이 양껏 주고 학대하지 말고, 죽일 때 고통없이 죽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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