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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애견일기1 - 도담 도란 도조 도롱

개들의 전생

개들의 전생(前生)

도리가 들어오기 전이었을 것이다. 도담이, 도롱이, 도란이 셋을 데리고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절에 놀러 갔었다. 규모가 아주 작은 절로, 거기엔 남편이 고등학교 적에 불교학생회 활동할 때 지도 법사였던 노스님이 홀로 기거하고 계셨다.
스님은 기골이 장대한 선승(禪僧)이었다. 스님은 공주 갑사에서 공부하다가 홀로 토굴을 파고 공부(工夫)했는데 이때 한소식(깨달음)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깨달은 그 경지에 매달려 더 높은 공부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큰절에서 축출되어 그 이후로 수십 년 간 홀로 지내왔다.
스님들이 참선을 하다 보면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분명 절에서 벽을 보고 앉아 있는데 절 아래 오솔길에서 신도가 쌀을 머리에 이고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아니면 어떤 신도가 아파서 죽어가는 모습이나, 큰 사고가 나는 장면 같은 게 눈앞에 펼쳐져 보이기도 한단다. 나중에 보면 그게 사실로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런 경지를 초월하여 바른 공부를 하라고 질책한다. 그러나 스님들 가운데는 이런 경험에 재미가 들려 그 재미를 탐닉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한다. 이른바 용한 스님, 점쟁이 같은 스님이 되는 것이다.
승가(僧家)에서는 이런 스님들을 철저히 배격한다. 깨달음으로 이르는 참된 공부가 아니라 삿된 길로 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주의 그 스님은 불가에서 말하는 삿된 재미에 빠져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일을 용하게 맞추기도 하고, 전생(前生)을 꿰뚫어보기도 하였다. 사상 또한 자유자재고 상상력도 대단한 분이어서 이분과 얘기를 하다 보면 시공을 초월하게 될 때가 많다.
불가에서는 내친 분이지만, 고등학교 때 지도 법사였고 그 거침없는 자유 사상을 흠모하는 내 남편은 이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끔 찾아뵈었다. 그날도 몇 년 만에 인사차 절에 들렀었다.
절에 개를 데려가는 것은 금기나 마찬가지이다. 개란 짐승이 워낙 정을 많이 느끼게 하므로, 세속의 정을 끊고자 입산한 스님들 곁에 개를 데리고 가면 또다른 정에 끄달리게 될까 저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에서는 고양이는 길러도 개는 기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스님의 성품이 워낙 호탕한 것을 잘 아는지라 우리는 전혀 거리낌없이 도담이, 도롱이, 도란이 셋을 차에 태워 함께 데리고 갔다.
“오랜만이여. 잘 지냈는감?”
스님을 처음 만난 게 대학 1학년 때라서 그런지 스님은 내가 부인네가 된 뒤에도 그때처럼 내 이름을 늘 불러주었다. 결혼하면 이름 불리는 일이 드문 게 우리나라 여자들 신세라, 어린 시절마냥 이름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어리광이 나오곤 하였다.
“예, 스님. 이제서야 ‘엄마’가 됐어요.”
“흐흐. ‘개엄마’ 됐다는 말은 들었어.”
스님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는 클클거리며 웃었다.
스님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며 불교 고승들 얘기, 그리고 옛 도인들 얘기, 윤회 얘기 등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던 우리는 지나가는 말처럼 여쭈었다.
“스님, 저 녀석들은 전생에 뭐였을까요?”
도담이 도롱이 도란이를 가리키며 묻자, 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세 녀석의 전생을 관조(觀照)라도 하는 듯이.
“세 녀석 다 사람이었었구만.”
스님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사람이었다구요? 그런데 왜 개로 태어났습니까?”
“그야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머리 어두운 짐승으로 환생한 게야.”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우리는 스님께 바싹 다가앉았다.
“저 털이 하얗고 덩치 큰 녀석, 저 녀석은 이름이 뭐라고 했지?”
스님은 도담이를 제일 먼저 가리켰다.
“도담이에요.”
“도담이라, 길 도(道) 자에 말할 담(談) 자를 쓴 건가?”
“예. 한자로 굳이 뜻을 따지자면요.”
“녀석. 이름 한번 과분한 걸 가졌군.”
“도담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우리가 답을 재촉하자 스님은 다시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저 녀석은 절간의 스님이었어. 큰소식 얻을 선승이었지. 그런데 재물에 집착이 강하고 여자를 탐해서 제 앞길을 망쳤어. 그 벌로 개로 태어난 게야.”
믿는 마음에서 물은 건 아니었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도담이의 성품에 미루어 수긍 가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도롱이의 전생 이야기도 재차 물었다.
“누런 놈이 도롱이라고? 하하. 저 녀석은 전생에 재산이 많은 장자(長者)였지. 그러나 재물을 아끼지 않고 탕진한 바람에 개의 탈을 쓰게 된 거지.”
스님은 이번에는 눈을 뜨고 도롱이를 넌지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도롱이에 대한 말도 뜨끔할 정도로 맞는 바가 있었다.
“도란이는요? 도란이는 아무 죄도 안 저질렀을 것 같은데요?”
“저 하얀 털 가진 암놈 말인가?”
“예.”
우리는 바짝 긴장하여 스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녀석은 재물을 횡령했구만. 남의 재산을 맡았는데, 그걸 빼돌렸단 말씀야.”
기가 막힌 일이었다. 도란이의 성품과도 맞아 떨어지는 게 있었다.

사실, 윤회라는 게 있는지조차 증명되지 않은 판국에 개들의 전생이 어땠는지, 또 그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개로 태어나게 되었는지까지 이야기한다는 것은 좀 허무맹랑한 짓이다. 설사 생명이 윤회를 한다고 해도, 그 스님한테 전생을 꿰뚫어볼 만한 신통력이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나 스님의 말을 그저 재미있자고 하는 우스개 소리로 듣기엔 세 녀석의 특성과 너무도 맞아 떨어져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스님은 우리 개들을 처음 대하고, 또 개들이 차에 갇혀 있어 제 성격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맞추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우연히 맞추었다고 보기엔 너무 잘 맞는 말이고 스님한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기엔 그동안 배워온 내 과학적 지식이 받아들이려 하질 않았다.

스님의 말대로 도담이는 재물, 아니 개들한테는 재물이 있을 리 없으니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자기 몫이 아닌 것을 탐하지는 않았지만 제 몫으로 할당된 것은 틀림없이 챙겼다. 모든 개들이 제 몫을 다른 개한테 빼앗기려 하지 않겠지만 도담이는 제 몫 챙기는 데는 사람 못지않았다.
도담이는 식빵을 좋아했다. 식빵을 한 조각 주면 그걸 먹지 않고 아끼고 아끼며 조금씩 떼어 먹었다. 어디 움직일 때마다 식빵을 입에 물고 다녔고, 도롱이나 도란이가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어떤 때는 하도 오랫동안 식빵을 물고 다녀서 우리가 일부러 뺏을 때도 있었다. 식빵 지키느라고 놀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그 식빵을 잘게 잘라 입에 넣어주어야만 다 먹지, 한 조각을 그 자리에서 냉큼 다 먹어치우는 경우가 없었다.
한번은, 그렇게 식빵을 좋아하니 실컷 먹어 보라고 봉지째 준 적이 있다. 그랬더니 도담이는 식빵 봉지 한 쪽에 구멍을 뚫고는 그리로 한 조각씩 빼서 먹었다. 제 몫이 많으니까 마음이 놓이는지 한 조각을 단번에 먹어치웠다. 그러면서 베개 만한 식빵 봉지를 계속 입에 물고 다녔다. 오줌 누러 가서도 입에 물고 있고, 똥을 눌 때는 잠시 내려 놓았다. 왜냐하면 도담이는 똥 누려면 똥 눌 자리를 뱅뱅뱅뱅 열 바퀴는 넘게 도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감시는 게을리 하지 않았다. 누가 접근이라도 하면 똥 누는 것까지 참고 식빵 봉지부터 챙기는 것이었다.
밤에 잘 때도 도담이는 식빵 봉지를 사수하다시피 했다. 배에 깔고 자거나 그 위에 턱을 척 올려 놓고, 베고 잤다.
도담이는 이렇게 나흘 동안을 식빵 봉지를 철저히 간수하며 한 조각씩 꺼내 먹었다. 도저히 ‘개’로 볼 수 없을 만한 행동이었다.
전생에 여자를 탐했다는 말도 일리가 있었다.
숫캐들은 다 암놈을 밝히지만, 도담이는 유난히 심했다. 어딜 가나 암놈만 보면 그 암놈이 발정기고 아니고 가리지 않고 마구 덤벼들어서 우리가 얼마나 무안했는지 모른다. 암놈 밝히는 증세가 나타난 시기도 아주 일렀다. 생후 서너 달쯤 되어서부터 수컷 성견 흉내를 냈었다.
봄이 되어 동네 개들이 거의 동시에 발정기가 되니까, 도담이는 무지무지하게 바빠졌다. 매일 이 집 저 집 드나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도담이가 ‘뼈대 있는 집 자손’이라고 생각했는지, 자기 집 암컷한테 접근해도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도담이는 맘껏 청춘을 불사르며, 온 동네 암캐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지냈다.
도담이는 통솔력도 있었다.
우리 마을에는 노인네들이 대부분이어서 어린애가 드물었다. 예전 같으면 골목마다 개구쟁이들 뛰노는 소리가 시끌벅적했을 텐데, 늘 한적했다. 아이들이 돌아다닐 그 길을 개들이 한 무리씩 떼지어 걸어가는 모습만 가끔 보일 뿐이다. 그것도 농사철에는 작물을 버릴까봐 개들을 풀어 놓지 않아 농한기에만 가끔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 개 무리를 이끄는 녀석이 바로 도담이었다. 도담이가 앞장서서 논길, 밭길을 가면 동네 개들이 길게 늘어서서 도담이 뒤를 따랐다.
도담이는 사교성도 높았다. 낯선 개를 만나도 전혀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가 냄새를 킁킁 맞고는 뭔가 의기투합을 했는지 곧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방향으로 사이 좋게 걸어가곤 했다. 그래서 모든 여성 개들한테도 그리 인기가 좋았는가 보다.
하여튼 도담이가 다른 개하고 싸우거나 다투는 걸 본 적이 없다. 앙숙 같은 동생인 도롱이하고는 자주 싸웠지만.

도롱이는 도담이와 정반대였다.
낯선 개를 만나면 일단 으르렁거리고 싸울 태세부터 갖추었다. 그러니 새 친구가 생길 리가 없었다. 도담이는 온 동네 개들과 어울려 온 들과 산을 싸돌아다녀도 도롱이는 집 앞마당만 뱅뱅 돌며 더이상 나아가지를 못했다.
암놈을 밝히는 건 도롱이도 마찬가지였지만, 마음만 앞설 뿐 동네 암캐 어떤 녀석하고도 제대로 인연을 맺지 못했다.
처음에 우리는 도롱이가 성질이 사나워서 다른 개들하고 잘 어울리지를 못하는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무섬증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무섬증 많은 녀석일수록 짖는 소리가 크고, 이빨을 드러내며 공격적인 자세를 자주 취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도롱이는 우리 집에서 덩치가 제일 크고 건장하고 생김새도 가장 씩씩한데, 왜 그리 몸을 사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도롱이도 식빵을 좋아했다. 그러나 도롱이는 먹는 걸 아끼는 법이 없었다. 주면 주는 대로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웠다. 다른 먹이도 마찬가지였다. 주는 즉시 후딱 먹어 버렸다. 재물을 탕진했다는 스님의 말이 도롱이의 이런 성격과 맞아떨지는 것이다.

도란이는 도담이 도롱이와 또 달랐다. 도란이는 먹을 것을 주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세 개는 물어다가 숨긴다.
우리가 세 녀석에게 먹을 것을 줄 때는 이건 도담이 거, 이건 도롱이 거, 이건 도란이 거 하면서 차례로 하나씩 주는데, 도란이는 자기 차례가 오면 먹을 것을 받아서 쏜살같이 다른 데로 가서 숨기고 온다. 이불 속이나 옷가지 속에다가 숨기고 발로 눌러 놓은 다음에 제 자리에 와 앉아서 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반드시 세 개까지 숨겨 놓은 다음에 네 개째부터 받아먹었다. 먹이가 동날 때까지 다 받아먹고 난 다음에야 도란이는 숨긴 장소로 가, 숨긴 순서대로 하나씩 꺼내서 먹었다.
도담이나 도롱이가 먹이 숨긴 장소에 가까이 갔다가는 도란이한테 혼쭐이 나곤 했다. 두 녀석은 도란이가 암놈이라고 봐주는지, 도란이가 숨겨 놓은 것을 건드리지 않았다.
한번은 도란이가 어떻게 하나 보려고 숨겨 놓은 것을 몰래 치운 적이 있다. 그랬더니 도란이는 그걸 찾느라 필사적으로 이불 속을 헤집었다. 어찌나 집요하게 그리고 필사적으로 찾는지 나중엔 숨이 다 가빠지는 것이었다. 헐떡거리며 찾는 모습을 보고 저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어서 치웠던 것을 다시 갖다 놓았다.
지가 숨겼던 것을 찾은 다음에야 도란이의 숨결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숨겨 놓는 도란이의 버릇과 전생에 횡령을 했다는 말이 묘하게 맞지 않는가.
아직도 도란이한테는 먹이만 주면 숨기는 버릇이 있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 건망증이 생겼는지 전처럼 숨겨 놓은 것을 다 찾아 먹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덕분에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우면 이불 속에서 별 이상한 것들이 다 발견되곤 한다. 뼈가 발끝에 닿기도 하고, 비스켓이 엉덩이 밑에서 부서지기도 하고, 베개 밑에 쵸코렛이 녹아 있어 낭패스러울 때도 있다.
오늘 밤엔 뭐가 들어 있을까?
조금 전에 오징어 다리를 주었으니 오징어 다리가 들어 있을 거다. 으으 찜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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