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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애견일기1 - 도담 도란 도조 도롱

낙향기

낙향기(落鄕記) - 용수마을에서 1

1990년 11월 우리 집 식구 다섯 - 남편과 나, 도담이 도란이 부부, 그리고 도롱이 - 은 드디어 용인읍에서도 양지를 지나 한참 더 들어가는 시골 용수마을로 이사했다.
우리는 식구는 많지 않지만 짐이 많은 편이었다. 커다란 트럭 두 대가 필요했다. 이삿짐 가운데 대부분이 책과 책장이어서 운반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아파트 5층에서 짐을 내리고 다시 차에 싣고 하느라 출발에서부터 지체된 터라 용인읍을 지날 때는 벌써 어둑어둑했다.
“아저씨,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남편의 자동차에는 도담이, 도롱이, 도란이가 타고, 나는 트럭 조수석에 앉아 길을 안내했다.
“여기서도 더 간단 말예요?”
영동고속도로 용인 인터체인지를 지나면서 운전수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예, 한 20분만 더...”
“뭐라구요?”
트럭 운전수는 당장이라도 차를 세울 기세였다.
“여기선 얼마나 더 갑니까?”
양지 인터체인지로 들어서자 운전수가 차를 세워 놓고 물었다.
“한 10분 정도면 돼요.”
나는 시간을 줄여서 말했다. 운전수가 차를 서울로 되돌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도 10분을 더 간다구요?”
운전수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이었다. 차에서 내려 뒷차의 운전수와 뭐라고 상의를 하더니 다시 돌아왔다.
“수고비 두둑히 주셔야 합니다.”
운전수는 내 다짐을 받고서야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는 깜깜해서야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가 이사온다는 걸 알고 동네 사람 몇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짐부터 내려놓은 다음 트럭운전수들부터 돌려보냈다. 그들은 본래 약속한 금액보다 많은 돈을 주었는데도 이렇게 깡촌까지 이삿짐 날라보긴 처음이라며 툴툴거리며 돌아갔다.
우리가 이사간 집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 온 집이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고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있는 전형적인 경기도 농가였다.
“잘 이사왔어요. 이 집이 명당입니다. 부자되는 터예요.”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용인 제일 가는 부자가 살던 집입니다.”
“거기다 운수도 얼마나 좋은 터인지 말예요.”
마을 사람들은 지금 살고 있는 집 주인의 얘기를 해주었다.
우리에게 집을 판 분들은 자식이 딸 하나뿐이었다. 부인이 젊어서 자궁에 병을 앓아 더이상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 딸이 대학생이 된 어느 날 아주머니가 자꾸 체증이 생겨 내과에 갔다. 그때 아주머니의 나이 46세, 아저씨의 나이는 쉰하나였다.
“임신입니다. 아무 약이나 잡수시지 마십시오.”
의사의 말에 아주머니는 깔깔 웃었댄다.
“농담하슈? 이 나이에 임신이라니...”
그런데 진짜 임신이 된 것이고, 아주머니는 다음해 초봄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직도 아들 선호사상이 많은 시골 마을에서는 고목나무에 꽃 피었다고 다들 축하해 주었다.
아저씨 나이 쉰 넘어서 얻은 아이라 그 아이는 제 이름보다 ‘쉰동이’란 별명이 더 유명했다.

좋은 터, 부자가 되는 터라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고생문이 훤했다. 우선 주거 환경이 말이 아니었다.
집주인은 옛집을 팔고 바로 앞에 있는 밭에다 새 집을 지을 계획이었다. 귀하게 얻은 아들을 새 집에서 키우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집을 지을 동안 집주인은 우리와 함께 살아야 했다. 우리가 이사간 때가 11월, 겨울이라서 새 집 공사를 할 수가 없었다. 다음 해 3월은 돼야 날씨가 풀려 집을 짓기 시작할 것이고, 집 짓는 기간도 두세 달은 좋이 걸릴 터였다. 그렇다면 짧게 잡아 6개월은 두 집이 함께 살아야 했다. 불편하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주인집에는 식구가 넷이었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 그리고 늦게 얻은 아들. 딸은 수원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가끔 내려왔다.
할머니는 사랑채에 살고, 주인집 식구 셋은 안방에서 기거하고, 우리는 마루와 건넌방을 쓰고, 부엌은 함께 사용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마루에 살림살이를 들여 놓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집이 오래 되어 서까래가 낡자 베니어판으로 마루 천장을 해 달았는데, 그 천장이 너무 낮아 장농이니 책장 같은 게 들어가질 않았다. 그래서 그 밤중에 동네 사람들이 천장 뜯어내는 작업을 해주었다.
우리가 거주할 건넌방은 무척 좁았다. 책상과 컴퓨터 책상, 인쇄기 책상, 그리고 작은 간이 옷장 하나 넣으니까 두 사람이 겨우 잘 만한 공간만 남았다. 거기서 도담이 도롱이 도란이와 함께 다섯이 살아야 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시골이니까 개짖는 소리 갖고 뭐라 할 사람 없고, 또 마을길을 녀석들이 맘대로 뛰어다닐 걸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연고가 전혀 없는 머나먼 시골 땅에 외따로 떨어져 살게 됐지만 녀석들과 헤어져 사는 것보담은 백 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다섯 식구는 서로 꼭 붙어서 용인 시골 용수마을에서 첫밤을 지냈다.
도롱이는 평소에도 그랬듯이 이불 속으로 푹 파고 들어가 내 다리를 베고 잤고, 도란이는 어린아이처럼 남편의 품속에서 팔을 베고 잤다. 도담이는 내 머리 맡에서 내 베개를 함께 베고 잤다.

오랫동안 불을 지피지 않던 방이라 냉기가 남아 있었으나 도롱이의 따뜻한 체온이 이불 속에 퍼지면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적막 강산.
말 그대로였다.
마을 개들도 잠이 들었는지, 인적이 끊긴 시골 마을의 밤은 무서우리만치 적막했다.
도란이가 쌕쌕거리며 숨 쉬는 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왔다.
도담이가 베개 맡에서 푸푸 하며 잠 자는 소리도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도롱이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꼼짝도 않고 자고 있었다.
나도 어느 결에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 다섯 식구는 모처럼 참으로 평화로운 잠을, 행복하고 깊은 잠을 잤다.
용수마을은 용인 동남쪽 끝, 안성군과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용인이 도시 개발이니 땅 투기니 하고 전체적으로 들썩거려도 이 마을은 그런데 휩쓸리지 않았다. 워낙 외진 곳이라 그런 듯했다.
우리는 집을 고를 때 ‘아이’들 안전을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이 집이었던 것이다.
우선 시외버스가 지나다니는 큰 길에서 5리(2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서 우리 ‘아이’들한테는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찻소리도 들리지 않아 소리에 민감한 나한테도 적절한 마을이었다.
마을 뒷산 너머로 왕복 2차선의 곧게 벋은 아스팔트길이 있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건 마을 뒷쪽에 있는 정부 기관 건물로 나 있는 그 기관의 전용 도로여서 자동차 왕래가 적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듯했다.
용수마을의 가구 수는 40여 호. 자식들은 모두 서울이나 수원 등 도시에 나가 살고 노인 내외만 남아서 심심풀이로 농사 짓는 집이 대부분이고, 젊은 부부가 농어민 후계자가 되어 전문적인 농사꾼으로 농사를 집는 집도 열 집 정도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부유한 편이었다.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집도 꽤 됐고, 옛집이라도 겉만 허술하지 속은 다 입식으로 고쳐서 사는 데 불편함이 별로 없었다.
당시엔 적었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젊은 농군 집은 집집마다 트랙터 등 한 대에 4천여 만 원씩 하는 농기계가 갖추어져 있고 트럭 한 대, 자가용 한 대씩 있어서 웬만한 도시 가정보다 삶이 여유롭다.
트럭은 대개 남자가 몰고 다니고 자가용은 부인네가 몰고 다닌다. 부인네들은 바쁜 농사철이 지나면 읍내로 기타를 배우러 다니기도 하고, 난을 기르기도 하는 등 도시 여인 못지않게 문화 생활도 영위하고 있다.
용수 마을 젊은 부인네 가운데서 자동차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산 집은 워낙 오래 되어서 다 쓰러져 가고 있었다. 새로 지을 계획이라 개축도 안해서 부엌만 입식이지, 다른 데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아궁이에 나무를 때는 대신 연탄보일러로 바꾼 것밖에 개량된 게 없었다.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세면실이 따로 없고, 화장실이 재래식이란 것이었다.
봉당 한쪽 끝에 있는 수돗가가 세면실이었다. 겨울이라 비닐로 막을 쳐서 바람은 막았지만, 춥고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세수를 하려면 부엌에서 커다란 솥에 물을 데워다 자가수도에서 나오는 찬물과 섞어서 해야 했다. 그래서 머리를 한 번 감을라치면 큰 결심을 해야 할 정도였다.

화장실, 아니 이 말은 너무 고상해서 어울리지 않는다. 그 변소는 상기하기도 싫다. 예전의 ‘퍼세식’ 그대로로, 커다란 항아리를 묻어 놓고 그 위에 판자 두 개를 걸쳐 놓았는데, 판자가 흔들거려서 조금만 방심하면 빠지게 돼 있었다.
게다가 문짝도 덜렁거리고 잠그는 장치도 없어서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밖에서 누가 얼씬거리기라도 하면 “어흠”하고 옛사람들 방식대로 헛기침을 해서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야 했다.
으이구, 정말 악몽 같은 변소였다...

가장 큰 문제는 출퇴근이었다.
나는 그때 정부투자기관인 H공사 홍보실에 다니고 있었다. 회사가 서울 중구 다동, 그러니까 광교 사거리 조흥은행 본점 건너편에 있었다.
남편은 그해 가을에 원고 기획-집필 회사를 차렸는데, 대림동에 사무실이 있었다.
남편은 직접 운전을 하므로 좀 거리가 멀어도 좀 덜 힘들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고달펐다.
아침에 출근할 때는 남편과 함께 나와 서울 남부터미널 근처에서 내려서 3호선 전철을 타고 을지로 3가 역에서 2호선으로 바꾸어 탄 다음 을지로 입구 역에서 내려 회사로 갔다.
용수마을 우리 집에서 남부터미널까지 자동차로 거의 한 시간, 거기서 3호선 전철까지 걸어가고 3호선 타고 2호선으로 바꾸어 타고, 또 2호선에서 회사까지 걸어가고 그러는데 50분 가량. 출근하는 데만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퇴근할 때는 둘이 시간 맞추어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남부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혼자 내려왔다.
시외버스가 서는 면 소재지 마을에서 우리 집까지는 걸을 만한 처지가 못됐다. 걷는 거리가 길기도 하거니와 한적한 시골길을 여자 혼자 걷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별수없이 택시 또는 렌트카를 타야 했다.

지금도 혼자 집에 내려올 때는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오는데 교통비가 만만치 않다. 지금은 사당동이 사무실이어서 사당동서 남부터미널까지 택시를 타면 2000원, 남부터미널서 백암(우리 마을에서 제일 가까운 서울 왕복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2300원, 택시비 3000원. 편도에만 하루 7300원이 꼬박 든다.
이걸 왕복으로 치고 한달 25일을 출근한다고 치면 한달 교통비만 36만4천 원이 든다.
돈도 돈이지만 직장 생활하는 사람은 시간이 제일 귀중하다. 더구나 나의 경우엔 더욱 그러했다. 오고가는 데 드는 네 시간이 너무도 허무하고 아까웠다. 몸이 피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잠이 모자라서 늘 졸렸다. 그래서 시외버스만 타면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어떤 날인가, 흔들리는 차에서 졸다가 문득 깨어나 보니 차가 양지 골프장을 지나 좌전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좌전 고개는 서울에서 가까운 용인에도 이런 첩첩산중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높은 고개이고, 길도 꽤 꼬불꼬불하다. 명절 같은 때 고향 찾는 차들이 고속도로나 주요 국도를 꽉 메울 때면 한적한 이 길로 가라며 교통방송에서 안내를 해주곤 하는 17번 국도의 한 구간이다.
차가운 겨울달이 하늘 높이 떠 있었다. 하얀 달빛에 비친 바깥 풍경이 삭막했다. 겹겹이 겹쳐져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산봉우리,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 군데군데 버짐처럼 남아 있는 잔설.
조금 전 떠나온, 네온사인과 상점 진열장의 불빛이 따뜻하게 빛나는 서울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서울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다고 축제 분위기인데, 시골 산천은 황량하기만 했다.

졸린 눈으로 차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노라니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내가 어쩌다 이 먼 마을까지 흘러 왔는가, 이 버스에 흔들리며 그곳까지 힘들여 가야 하는가,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쓸쓸하고 슬펐다. 외로움이 사무치게 밀려들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과 헤어져 나 혼자 동떨어져 멀어져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절절한 소외감에 눈물이 계속 나왔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하루종일 저희들끼리 있던 도담이 도롱이 도란이가 반색을 하며 맞이해 주었다. 세 놈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몸을 비비고 핥고 끙끙거리고 환영식이 대단했다.
도담이는 펄쩍펄쩍 뛰며 온몸을 던져 오고, 도롱이는 시골 기생마냥 허리를 배배 꼬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도란이는 짧은 다리를 들어 안아달라고 응석을 부리고.
그런 ‘아이’들을 보자, 내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저절로 그쳤다. 함박웃음이 나왔다. 행복했다.
바보같이! 이 ‘아이들’을 위해 와 놓고선 외롭긴, 쓸쓸하긴...
즐거운 것도 잠시.
나는 다시 몸을 부지런히 놀려야 했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쓸고 닦아야 했다.
세 ‘아이’가 마루의 신문지 위에 싸 놓은 똥오줌부터 걷어 치우고, 방에 가득 날리고 있는 털을 쓸어내고 걸레질 치고, 다시 걸레 빨아서 닦고 치우고...
그러다 보면 저녁이 다 지나갔다. 남편이 늦는 날이면 오는 것도 모르고 노곤한 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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