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롱이의 하극상(下剋上)
도담이, 도롱이가 우리 집에 온 건 각각 1889년 9월과 11월. 겨울이 지나고 봄이 가고 여름이 되자 녀석들은 제법 커서 청년티가 났다.
도담이는 이미 소형견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보통 말티스 성견의 크기를 훨씬 넘어서서 중개가 다 되었다. 몸무게도 엄청나서 안고 다니기가 무척 힘들었다. 기억이 정확치는 않으나 10킬로그램 정도 됐던 것 같다.
도롱이도 무럭무럭 자랐다. 도롱이는 본래 종자가 큰 잉글리쉬 코카스파니엘이라서 자라는 속도가 말티스인 도담이보다 빨랐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몸집이 도담이와 비슷해졌다.
이 무렵,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반상회 때마다 우리 집 얘기가 나왔다. 직장 생활에 바쁜 우리 대신 어머니가 참가했는데 아파트에서 개를 기른다고 다들 한마디씩 한다는 것이었다.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느니 냄새가 난다느니 별별 이야기가 다 오갔다.
우리는 개 짖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줄이기 위해 베란다에 두꺼운 유리 샷시를 하고, 현관도 유리 샷시를 설치해 이중으로 했다. 그래도 이웃 주민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휴일이라 집에 있는데 1층에 산다는 아주머니가 5층에 있는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잠깐만요, 좀 살펴볼 게 있어요.”
그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서서 우리 집 베란다로 갔다. 거기엔 작은 항아리 몇 개와 화분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네. 여기가 아닌가?”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일이신데요?”
내가 묻자 아주머니는 조금 미안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요. 이 댁에서 개를 기른다기에 혹시 그 똥오줌이 하수구를 통해 내려와서 냄새가 풍기는 게 아닌가 하구요.”
그 아주머니의 말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개 기르는 죄인이니까 말이다.
“이리로 와 보세요.”
나는 그 아주머니를 화장실 앞으로 이끌었다.
“보시다시피 여기 신문지가 깔려 있지요? 우리 개들은 여기에 용변을 보아요. 그러니까 베란다 냄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제야 아주머니는 의심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내려갔다.
도롱이는 점점 몸집이 커져 도담이와 같아졌다. 그래도 하는 양은 늘 어린애 같아서 우리는 도롱이를 그저 아기로만 여겼다.
그러던 어느날, 도담이가 여느 때와 같이 도롱이를 약올렸다. 도롱이가 갖고 놀던 고무공을 발로 툭 차서 멀리 보내 버렸다.
“으릉.”
도롱이가 이빨을 드러내며 기분 나쁘다는 기색을 했다. 그러고는 공이 굴러간 곳에 달려가 공을 앞발 사이에 놓고 턱으로 눌렀다.
도담이는 다시 다가가 공을 발로 차서 굴렸다.
“으르릉.”
도롱이의 심기가 더욱 사나워졌다. 도롱이는 다시 공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공을 배에 깔았다.
도담이는 도롱이의 반응이 재미있는 듯 또다시 도롱이한테 다가갔다. 그러고 도롱이 배 밑에 있는 공을 끄집어내려 앞발을 넣었다.
“으르릉, 왕.”
그 순간 도롱이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도롱이는 도담이의 앞발을 콱 물어 버렸다.
놀란 도담이는 주춤하고 뒤로 물러서더니 정색으로 화를 내며 도롱이한테 달려들었다. 도롱이의 목을 앞발로 콱 누르고는 야단을 치듯 으르렁거렸다.
도롱이도 이번에는 만만히 물러서지 않았다. 끄응 하고 힘을 쓰는가 싶더니 어느새 도담이가 밑에 깔리고 도롱이는 위에서 누르고 있었다.
동생한테 역습을 당한 도담이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밑에서 용을 쓰더니 다시 도롱이를 제압했다.
두 녀석은 그렇게 한동안 엎치락뒤치락했다. 둘이 맞싸우는 모습을 처음 본 우리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중에서야 싸움을 말렸다.
“그만 두지 못해!”
막대기를 들고 소리치자 두 녀석은 마지못해 떨어졌다. 그래도 분풀이를 못해서 억울하다는 듯 계속 씩씩거렸다.
“큰일났네. 도롱이가 많이 다쳤는가 봐.”
도롱이가 왼쪽 뒷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어다니는 것이었다.
“어디?”
남편이 걱정이 되어서 왼쪽 뒷다리를 들여다보자, 도롱이는 깨갱거리며 죽는 소리를 냈다.
“녀석, 엄살은... 물린 자국도 없구만.”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며 내려놓았다.
다음날까지도 도롱이는 다리를 절룩거렸다. 가만히 살펴보니, 사람이 보지 않을 때는 네 발로 멀쩡하게 걷다가, 누가 보기만 하면 다리를 절었다.
“여보, 어제 도롱이가 아프다던 다리가 어느 쪽이었지?”
“왼쪽 뒷다리. 왜?”
“걷는 걸 잘 살펴봐.”
내가 가리키는 대로 바라보던 남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도롱이는 엉뚱하게도 왼쪽 다리는 제대로 딛고 오른쪽 뒷다리를 절둑거리며 걷고 있었던 것이다. 꾀병이 분명했다. 나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도롱이를 불렀다.
“도롱아, 이리 와. 맛있는 거 줄게.”
냉장고에서 치즈를 꺼내 소리치자, 도롱이는 네 발로 씩씩하게 달려오는 것이었다. 능글맞은 녀석 같으니라구...
이 날 이후로 도롱이는 도담이와 맞먹기 시작했다. 이젠 힘으로 도담이를 당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선 듯했다.
힘이 비슷해진 두 녀석은 조금만 비위가 틀리면 싸움질을 해댔다. 그때마다 남편과 나는 두 녀석을 뜯어 말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싸움은 점점 더 격렬해져 나중엔 서로 콧잔등을 물고 물리고 피까지 났다. 숫놈의 본색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싸움을 하고 나서는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미덕을 보이기도 했다.
싸움 뒤의 화해 태도도 서로 퍽 달랐다. 먼저 사과하는 쪽은 늘 도롱이였다. 도롱이는 일단 싸움이 끝나면 금세 태도를 바꾸었다. 꼬리를 흔들며 도담이한테 다가가 사과를 하고는 도담이의 상처를 열심히 핥아 주었다.
도담이는 먼저 사과하는 법이 없었다. 도롱이가 사과해올 때까지 뚱하니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도롱이가 사과를 해오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받아 주는 척하며 도롱이의 상처 부위를 핥아 주었다.
도담이는 털이 많아서 별로 표가 나지 않았으나, 도롱이는 물린 콧잔등에 이빨 자국이 생기기도 했다.
그걸 보면서 어머니는 혀를 찼다.
“쯧쯧. 사나운 개 콧잔등 아물 새가 없다더니, 네가 그 짝이로구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당한 적도 있다.
한번은 남편과 나, 당시 여중생이던 조카와 녀석들을 태우고 함께 자동차를 탔다.
조카는 도담이보다 도롱이를 더 귀여워했다. 도롱이가 도담이한테 늘 당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걸 아는지, 도롱이는 우리보다도 조카를 더 따랐다. 그런 조카가 사랑하는 도롱이한테 물린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안양 어딘가를 지나는데, 무엇 때문인지 또 두 녀석이 티격태격했다. 좁은 차 안에서 둘이 맞붙으니 운전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남편은 계속 운전대를 잡고 있고, 나와 조카가 두 녀석의 싸움을 말렸다.
그때 도롱이가 조카의 팔뚝을 꽉 물었다. 도담이를 물려던 것이 정신없이 혼전을 하다 보니 누나를 물게 된 것이다. 조카의 팔에 도롱이의 이빨 자국이 뻥 나고,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아야!”
조카가 비명을 지르자 두 녀석은 일시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도롱아! 네가 이럴 수 있니? 누나를 이렇게 물 수 있는 거야? 내가 널 얼마나 귀여워했는데...”
조카가 피 흐르는 팔뚝을 내밀며 야단치자, 도롱이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반성하는 빛으로 고개를 길게 뺐다.
이때부터 우리는 ‘머리 나쁜 도롱이’라고 별명을 붙였다. 누나와 형도 구분 못하고, 적과 아군도 구별 못한다고 말이다.
- 이러던 꼬마가, 1989
- 이렇게 커서 제 형 도담이를 넘봅니다. 지금도 도담이는 사진찍는다는 걸 알고 눈을 맞추는데, 도롱이는 오로지 제 형만 노려보고 있습니다.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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