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이 시집 오던 날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기 전엔
너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너는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
도란이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김춘수 님의 시 <꽃>이 저절로 읊어진다.
그랬다. 우리에게 오기 전까지 도란이는 그저 한 마리 강아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순간, 도란이는 꽃보다 아름다운 영혼이 되어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셨다.
도란이는 우리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었고 우리 또한 도란이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 * *
도담이, 도롱이는 점점 커 갔다. 흔히 생각하는 애완용 소형견이 아니라, 보통 마당에서나 기르는 중-대형견의 크기에 육박해 갔다.
아파트 주민들의 눈총이 더욱 사나워졌다. 우리는 녀석들이 한 번 짖을 때마다 간이 한 움큼씩 줄어드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 가슴 조이며 살아갔다.
성대 수술을 하라느니, 시골에 보내 버리라느니, 팔아 치우라느니, 주변에서 별별 조언과 협박을 다 했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다 못한 나는 마지막으로 이런 궁리를 다 해보았다.
‘그래, 이 아이들과 헤어질 수 없는 사연을 편지로 간절하게 써서 이웃에게 돌리는 거야.’
아파트 주민들의 동정심에 하소연해 보자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생각만 하고 말았다. 우리 좋자고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면서 참아 달라고 하는 건 억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해결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우리가 떠나면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아파트를 남에게 빌려 주었다. 그리고 그 전세금으로 경기도 용인 산골 마을에 있는, 허름하긴 해도 터는 넓은 농가를 샀다. 그곳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이다.
이사를 하기로 작정한 우리는 그때부터 발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우리가 이사간다는 소문이 아파트 내에 퍼지자, 도담이 도롱이가 짖어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껏해야 한두 달만 참으면 되겠지 하고들 생각하며 봐주는 듯했다.
기왕 이사 가기로 결정한 우리는 이제 성년이 된 두 녀석의 배필을 맞아 주기로 했다. 먼저 형인 도담이부터 장가 보내기로 하고 말티스 암놈을 사러 충무로로 나갔다.
말티스가 인기 있는 소형견이라 그런지 충무로에 나가면 언제든 예쁜 새끼를 대할 수 있었다. 그 날도 생후 일 개월된 말티스가 집집마다 대여섯 마리씩 진열대에 나와 있었다.
우리는 도담이를 샀던 집으로 가서 말티스 암놈을 골랐다.
앞의 시에도 나오듯 서로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는 어떤 존재란 그저 지나가는 바람결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의 의미가 되어 다가왔을 때는 “꽃”이 된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는 자기 별에서 성격이 까탈스러운 장미 한 송이를 노심초사해 가며 애지중지 키우다가 지구에 내려와 꽃밭에 무수히 피어 있는 장미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때 여우가 말해준다. ‘길들인다’는 의미를...
“넌 내게 있어서 세상에 흔한 여러 아이들과 특별히 다를 게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네가 필요없어. 너도 물론 내가 필요없겠지. 너한테 나 역시 세상에 흔한 여러 여우들과 다를 게 없는 한 여우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서로 필요하게 돼. 너는 나한테 세상의 ‘단 하나’가 되는 거야. 나는 너한테 세상의 ‘단 하나’가 되고...”
여기서 어린 왕자는 장미가 수없이 많더라도 자신이 물 주며 키워온 그 장미만이 자신한테 유일한 의미가 있는 장미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장미는 무의미한 몸짓이 아니라 어린 왕자에게는 특별한 의미의 “꽃”인 것이다.
여우가 덧붙인다.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밝게 빛날 거야. 많은 발자국 가운데서 난 너의 발자국을 알아낼 거야. 그 발자국 소리가 음악 소리처럼 즐겁게 들릴 거야.
나는 빵을 먹지 않지만 누런 밀밭을 보면 즐거워질 거야. 왜냐하면 네 머리칼이 금발이거든. 난 누렇게 출렁이는 밀밭을 보면서 널 그리워하게 될 거야.
오후 네 시란 시각은 여태까지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어. 그러나 너와 그 시간에 만나기로 약속해 두었다면 내겐 아주 중요한 시각이 되지. 아마 나는 세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네시가 되면 나는 마음이 설레서 안절부절을 못하게 될 거야.
난 비로소 행복의 가치를 알게 되는 거지.”
사람이고 동물이고 그 새끼가 예쁘고 귀엽지 않은 게 없다. 특히 개새끼(이러니까 욕 같구만)는 어느 동물보다 특히 매력적이다.
그래서 나는 우연히 길을 가다 애완견 센터를 발견하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그 가게 앞에서 한동안 진열장을 들여다보다가 아쉬운 발걸음을 떼어 놓곤 한다.
말티스건 요크셔테리어건, 코카스파니엘이건, 시쭈건, 도베르만이건, 잡종이건 모두가 어여쁘다.
그런데 이상하게 녀석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슬픔이 가슴 가득 차오른다. 저렇게 아름다운 생명이건만, 삶의 진짜 의미를 모르는 채 막연히 살아가다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하긴, 사람이라고 해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이가 몇이나 되랴만 그래도 사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은 해보니까 말이다.
충무로 애견 센터에서 도담이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 오물오물 모여 있는 말티스 새끼들을 보고 있노라니, 도무지 어떤 ‘아이’를 골라야 할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지들끼리 뒤얽혀서 놀고 있는 모습이 다 귀엽고 앙증맞고 사랑스러웠다.
한참동안 망설이고 있는데 그 중 한 ‘아이’가 고개를 반짝 들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눈이 까맣고 코가 까맣고, 하얀 털이 눈부셨다. 특히 눈 가장자리가 마스카라를 칠한 듯 까만 테두리가 선명했다.
전체적인 인상이 영리하고 야무진 도시 소녀 같았다. 우리가 머리 속에 그려온 모습 그대로였다. 점잖고 의젓하며 도도한 도담이와 너무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얘가 좋겠어요.”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남편은 당장에 마음을 정해 버렸다. 나 역시 동감이었다.
“25만 원 주십시오.”
애견 센터 주인이 그 ‘아이’의 가격을 말했다. 그때가 1990년 10월, 꽤 큰돈이었다. 도담이는 15만원, 도롱이는 8만 원을 주었으니 그 몇 배인 셈이었다. 암컷이라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월급장이한테는 엄청난 가격이라, 좀 낮추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를 앞에 두고 값을 흥정한다는 게 죄스러워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달라는 대로 주었다.
가격을 깎을 것을 예상했었는지, 주인은 순순히 돈을 지불하는 우리한테 미안한 기색을 짓더니 애완견용 사료며 빗, 장난감 등을 얹어 주었다.
우리는 그 ‘소녀’의 이름을 ‘도란’이라고 지었다. 적은 사람이 모여 낮은 소리로 정답게 이야기한다는 뜻의 ‘도란거리다’ ‘도란도란’에서 따온 말이다.
이름에 한자를 굳이 갖다 붙인다면 길 도(道) 자에 난초 란(蘭) 자를 붙여 도란(道蘭)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매혹적인 까만 눈을 가진 ‘말티스 소녀’와 ‘도란’이란 이름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이름을 지어 놓고 우리 스스로도 대만족했다.
‘도’ 자 돌림으로 이름 짓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신기하게도 좋은 이름이 저절로 머리 속에 떠올랐다.
‘도’ 자 돌림이 개 이름으로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이, 영어로 ‘도그’가 개이니까 그 발음에서 개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는 것이다.
도란이를 보자마자 반해 버린 남편은 도란이를 품에 꼭 안았다. 투기가 심한 아내라면 질투심이 날 정도였다. 남편은 세상 일에 별로 감동하지도 않는 편이고 정열적이지도 않고 좀 무덤덤한 편인데, 개에 대해서만은 남달리 애정이 깊었다. 개띠라서 그런 건지...
도란이를 집에 데려오자, 도담이 도롱이 두 녀석은 넋을 잃었다. 암컷을 처음 대하는 두 수컷의 태도는 가관이었다.
힘이 넘치는 팔팔한 총각 두 녀석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소녀 도란이한테 보이는 반응을 보며, 수컷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수컷이란 족속’의 본질적인 성향을 녀석들을 통해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람도 이 녀석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도란이를 안고 집에 들어서자, 도담이 도롱이의 눈이 동시에 도란이에게 붙박혔다. 우리한테 인사도 안했다. 보통 때 같으면 경쟁적으로 뛰어오르고 달려들고 꼬리치고 핥고 난리법석일 텐데, 어쩜 저리도 태도가 돌변할까 싶을 정도로, 아예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도담아, 네 색시다.”
도란이를 내려놓자, 두 녀석은 도란이한테 다가가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러더니 그만 넋을 놓아 버리는 것이었다.
두 녀석은 도란이가 가는 곳마다 졸졸졸 따라다녔다. 도란이가 한 발짝 움직이면 한 발짝 따라가고, 두 발짝 움직이면 두 발짝 따라갔다.
그러면서 침을 질질 흘렸다. 남자가 여자 보고 ‘침을 질질 흘린다’는 표현은 전부터 들어 왔지만, 그게 이런 증상을 보고 하는 말인 줄은 처음 알았다.
어찌나 침을 많이 흘리는지 방바닥이 온통 녀석들 침으로 흥건해 걸어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정말 해도 너무 한다.”
나는 걸레를 들고 녀석들 뒤를 따라다녀야 했다. 녀석들이 흘리는 침을 닦기 위해서.
두 녀석은 도란이한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슨 광신도나 된 양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도란이가 뭘 먹는 것도 신기하고, 오줌을 누어도 신비롭고, 똥을 누어도 사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도란이가 하는 짓은 무엇이든 감동스럽고 감탄스럽고 존경스러운 눈길이었다.(한 여성으로서 이런 사랑을 받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녀석들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도란이밖에 안중에 없는 듯했다.
밥도 먹지 않고, 오줌도 누지 않고, 똥도 누지 않고 오직 도란이만 바라보았다.
도란이는 그런 녀석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제 할 일만 했다. 그러다 가까이 와서 귀찮게 굴면 화를 발칵 내며 떨쳐 버렸다.
그러면 두 녀석은 움찔하고 물러섰다. 귀한 분의 심기를 언짢게 해서 몹시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도담이보다 도롱이가 더 심했다. 덩치는 커다란 녀석이 주먹만한 도란이를 따라다니는 꼴이, 주인집 귀한 아가씨를 사모하는 머슴 녀석 같았다. 그 눈길이 너무도 간절하고 절실하여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서는 ‘밝힘증’이 심한 것 같아 징글맞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도롱아, 너 형수한테 흑심 품지 마!”
우리가 경고를 하고 면박을 주었지만, 도롱이 귀엔 그런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도담이의 침 흘리는 증상은 하루 만에 그쳤으나 도롱이는 사흘이나 갔다.
도담이는 하루 밤 내내 잠도 안 자고 도란이를 지켜보더니 다음날부터는 제 리듬을 찾아 밥도 먹고 똥오줌도 누면서 정상적으로 생활했다. 우리한테 관심이 없는 것은 여전했지만.
도롱이는 사흘 내내 침을 흘리고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었다. 도란이만 하염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상사병이라도 난 것 같았다.
“이러다가 도롱이 쓰러지겠어.”
우리는 걱정이 되어서 도롱이를 붙잡고 밥을 떠먹여 주기도 했으나, 도롱이는 일분일초도 떨어질 수 없다는 듯 발버둥을 치고 빠져나가 도란이한테로 달려갔다.
어쩌랴, 제 짝이 아닌 것을...
도란이도 자기 짝은 도담이란 걸 알았는지, 도담이와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도롱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슬픈 사랑’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도롱이 짝을 구해 주기로 하였다.
- 도란이, 산책 중에 찍은 사진.
- 도란이가 집에 온 날, 도롱이가 밤새 뒤를 따라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