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이의 수난
오년 전 이야기를 하려니,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굵직굵직한 사건만 뇌리에 남아 있을 뿐, 일상에서 우리 ‘아이들’과 겪은 일들은 하나 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옛기억을 되살리려고 오랜만에 ‘아이들’ 전용 앨범을 뒤지니, 도담이와 도롱이, 도란이가 눈 쌓인 마을길을 경쾌하게 달려오는 사진이 눈에 띈다. 그걸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1990년 늦가을이었다. 시골로 이사오고 얼마 뒤였다.
우리 마을 뒷산은 소나무밭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가을이면 이 길에 갈색 솔잎이 수북히 쌓인다. 그 길을 걷노라면 그윽한 송진 내음과 함께 발밑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푹신푹신한 느낌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남편과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이 길을 산책했다.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 우리 집은 마을의 중간에 있어서 산에 오르면 오솔길의 정중앙에 서게 된다. 거기에 오솔길 사거리가 있는데, 왼쪽으로 가면 마을의 윗쪽 끝이고, 바로 가서 고개를 넘어 가면 정부 기관으로 가는 곧은 아스팔트 길이 나오고 그 길을 건너 가면 황토재란 마을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난 길을 가면 외딴집이 나오면서 또다시 곧은 아스팔트 길과 합류된다.
우리는 왼쪽으로 난 길을 걷기도 하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걷기도 했다. 그러나 고개 너머 길은 가지 않았다. 곧은 아스팔트 길이 위험해서 ‘아이들’이 혹 거기까지 갈까봐 그래서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일부러 그 길은 피했다.
방에 갇혀 살던 ‘아이들’은 산에 오르기만 하면 내 세상 만났다고 기뻐했다.
도롱이가 제일 즐거워했다. 소나무숲을 전속력으로 질주하면서 뱅뱅 돌았다. 그렇게 한 열 바퀴쯤 돌고 난 뒤 길다란 혀를 헥헥거리며 우리가 체조하고 있는 곳으로 오곤 했다.
도담이도 즐거워하기는 했지만 도롱이보다는 덜 했다. 앞으로 내달렸다가 우리가 따라가는 속도가 느리면 곧 되돌아와서 우리가 자기 쪽으로 가고 있다는 걸 확인하곤 다시 앞으로 달려갔다.
도란이는 아직 어리니까 우리 옆만 졸졸 따라다녔다. 주먹만한 게 알짱거리니까 발에 걸려서 밟힐 정도였다. 조금 기분이 좋으면 5미터 정도 앞으로 뛰어갔다가 되돌아 보곤 했다.
일단 산으로 오르기 위해 집 뒤로 난 길에 접어들면 ‘아이들’은 일단 오솔길 사거리까지 마구 달려간다. 그런 다음 거기서 기다린다. 우리가 오른쪽 길로 갈지 왼쪽 길로 갈지 모르니까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저쪽!”
손짓을 해서 왼쪽이나 오른쪽을 가리키면 ‘아이들’은 알았다는 듯 눈을 한번 껌벅이고는 그쪽을 향해 내달린다.
그날도 우리는 가을 솔밭길을 걷고 있었다. 도란이는 바로 우리 옆을 따라다니고, 도롱이는 산을 몇 바퀴 돌았다. 도담이는 앞으로 달리다가 우리한테 왔다가 또다시 달리는 짓을 되풀이했다.
실컷 달리고 난 도롱이가 되돌아오고, 도담이가 되돌아왔다. 이때쯤 우리는 맨손 체조니 제 자리 뛰기를 마치게 된다.
산을 막 내려오려고 하는데, 도담이 도롱이가 제가 먼저 가겠다는 듯 또다시 힘차게 달렸다. 그때 도란이가 우리보다 조금 앞서가고 있었는데, 두 녀석이 바로 그 옆을 달려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도란이가 픽 쓰러지는 것이었다.
두 녀석 중 한 녀석의 발길에 채인 것이었다.
우리는 달려가서 도란이를 안았다.
도란이는 기절해 있었다. 눈을 뜨고는 있었으나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몸도 뻣뻣하게 경직돼 있었다.
두 녀석이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 도란이를 살짝 치고 지나갔음에도 도란이는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도란아, 정신 차려. 도란아!”
우리는 도란이의 몸을 주무르며 이름을 자꾸 불렀다.
그래도 도란이는 정신을 되찾지 못했다. 시체처럼 몸이 점점 굳어 갔다.
우리는 허둥지둥 도란이를 안고 집으로 달려가 자동차에 올랐다. 이사 오면서 미리 알아둔 가축병원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 병원은 우리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면 소재지에 있었다. 자동차로 7, 8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도란아, 도란아!”
그동안에도 나는 계속 도란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냥 두었다가는 도란이의 정신이 되돌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얼마 지나자 도란이의 입에서 거품 같은 침이 흘러 나왔다. 증세가 호전돼 가는 건지 악화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전혀 생체 반응이 없다가 그만한 움직임이라도 있으니 죽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가축병원에는 마침 수의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침 식사 전의 이른 시각이라 외출을 하지 않고 있었던 듯했다.
“심한 충격을 받았는가 보군요.”
도란이를 보여 주자 의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도란이가 죽을까봐 사색이 되어서 달려간 우리가 무색할 정도로.
그럴 만도 했다. 시골 면 소재지에 있는 가축병원은 애완 동물 치료가 전문이 아니니까 말이다. 커다란 소나 돼지 등의 교배를 해 주거나 치료하는 게 그들의 전공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애완견 치료하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까짓 고기 한 근 거리도 못되는 쓸데없는 개를 갖고 무슨 호들갑이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주사나 한 대 놓아 보지요.”
의사는 느릿느릿 약장을 뒤지며 말했다. 우리는 애간장이 타는데 말이다.
그래도 역시 의사는 달랐다. 주사를 놓고 몇 분 있자 도란이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도란아, 이제 괜찮니? 엄마 알아보겠어?”
내가 재차 묻자 도란이의 꼬리가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이제 됐습니다. 별일 없을 겁니다.”
약을 도로 넣으며 하품을 해대는 의사에게 우리는 몇 번이나 허리를 깊이 숙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도란이는 비슷한 일을 또 한 번 겪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도담이 도롱이 두 녀석이 무엇 때문인지 또 싸움이 붙었다. 그날따라 퍽 격렬해서 아무리 말려도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자 남편이 빨랫줄에 버팀대로 쓰이는 장대를 집어들고 위협했다.
“너희들 싸움 그만두지 못해! 계속 그러면 이걸로 때린다.”
그때까지 맞아본 적이 없는 녀석들은 그 장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싸움에만 열중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혼을 내주어야지.”
남편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녀석들을 향해 다가갔다. 매질을 호되게 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싸움질하는 버릇을 고쳐 놓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남편은 녀석들을 꼬나보면서 장대를 뒤로 힘껏 제꼈다.
그때였다.
“캑.”
남편 뒤쪽에서 작은 비명 소리가 났다. 거기에 도란이가 서 있었고, 남편이 두 녀석을 때리기 위해 휘두른 장대에 애매한 도란이가 맞은 것이다.
도란이는 지난번처럼 픽 쓰러졌다. 쓰러진 도란이의 몸이 쭉 뻗었다. 몸이 굳어 가면서 거품 같은 침이 입에서 흘러 나왔다.
“아이구, 도란아. 이게 웬일이니!”
남편과 나는 혼비백산하여 도란이를 안았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도담이와 도롱이는 싸움을 그치고 멀거니 서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도란아, 아빠가 잘못했다. 정신 차려라. 응!”
남편은 뻣뻣해진 도란이를 주무르며 울먹였다.
“도란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남편은 거의 울 지경이 되었다.
“낑낑낑.”
남편의 간절한 간호 덕분인지 도란이는 얼마 후 정신을 차렸다. 그러더니 남편의 등을 타고 기어올라갔다. 아래 있으면 위험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안전하다는 듯 자꾸 위로 올라갔다.
도란이는 남편의 어깨 위까지 기어올라갔다.
남편의 어깨 위에 올라간 도란이는 한참 뒤에야 안정을 되찾았다. 눈을 불안하게 움직이며 숨 또한 거칠게 쉬더니 정상으로 되돌아 왔다.
그래서 남편이 어깨 위에서 내려 가슴에 안자, 도란이는 다시 불안해 했다. 몸을 바르르 떨면서 숨소리가 빨라졌다. 남편은 다시 도란이를 어깨 위에 올려 놓았다. 어깨 위에 올라간 도란이는 잠시 후 안정을 되찾았다.
그날 도란이는 한 시간이 넘게 남편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 이후로 도란이는 비상 사태만 났다 하면 남편이나 내 어깨 위로 피신했다. 그날을 계기로 어깨 위란 위치가 도란이한테는 가장 안전한 장소로 인식됐는가 보다. 도담이 도롱이가 싸움이 붙을 만하면 어깨 위로 올라가고, 낯선 사람이 와도 어깨 위로 올라갔다. 어깨 위로 올라가는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쥐가 바람벽 타는 것 같았다.
도란이는 자동차를 타서도 남편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남편의 어깨와 의자 등받이 사이에 몸을 얹고 머리를 창쪽으로 향하고는 밖을 내다본다. 거기가 도란이의 지정석이다. 무릎이나 다른 좌석 같은 데는 절대 앉지 않는다. 다른 데 앉히면 도란이가 너무나 불안해 해서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성견이 돼서 이제 ‘중년 여인’이 된 지금도 도란이는 자동차만 타면 남편의 어깨 위로 올라간다. 하얗고 긴 털을 한 도란이가 운전자인 남편의 어깨 위에 올라 있는 것을 보면, 남편이 여우 목도리, 아니 살아 있는 개 목도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한여름에도 그런 개 목도리를 하고 다니니 볼 때마다 새삼스레 웃음이 나오곤 한다.
“어머머, 저 개 좀 봐.”
다른 운전자들이 남편의 어깨 위에 올라 있는 도란이를 보고 기절할 듯 놀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예외없이 눈이 휘둥그레지고, 깔깔깔 웃어댄다.
그래도 도란이는 개의치 않고 제 지정석에 앉아 간다.
창밖을 보다가 졸리면 남편의 어깨 앞쪽으로 고개를 척 늘어뜨리고 잠을 자기도 한다.
차를 후진시킬 때는 도란이도 제 지정석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냥 있으면 운전자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동안에 도란이는 내 어깨 위로 올라온다. 그러나 내 어깨가 아무래도 남편 어깨보다 좁으니까 무척 불편해 한다. 더 편하고 넓은 무릎에 앉아 있으라고 해도 굳이 어깨 위로 기어올라가야만 안심을 하니 별 수 없다.
개도 시샘이 있다는 걸 우리 ‘아이들’을 기르면서 여러 번 느꼈다. 그 시샘의 정도가 사람 못지 않게 강하다는 것도 함께.
도롱이 녀석의 시샘 때문에 고생을 했던 적이 있다.
자동차를 타면 도담이는 내 팔과 어깨를 발판으로 삼아 창밖을 내다보고, 도롱이는 잠시 도담이 흉내를 내다가 이내 시들해져서 뒷좌석에 가서 또아리를 틀고 자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굳이 내 어깨 위로 올라가겠다는 것이었다.
저도 도란이처럼 어깨 위에 올라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도란이가 남편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 어지간히 부러웠었는가 보다.
그때 도롱이는 10킬로그램을 훨씬 넘어섰다. 진도개 성견보다 조금 작을 정도였으니...
“도롱아. 너, 정말 너무한다.”
그 큰 덩치로 내 어깨 위로 기어올라가다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내가 밀쳤지만 도롱이는 막무가내였다. 굳이 어깨 위로 올라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별수없이 허락했다.
아구구. 그 큰 녀석을 어깨에 둘러메고 있으려니 어찌나 힘들던지...
어깨가 금세 뻐근해졌다. 도롱이 제 녀석도 힘드는 듯했다. 도란이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고 자꾸 몸을 뒤척였다.
그도 그럴 것이, 키도 작고 몸도 가냘픈 편인 내 어깨는 녀석 덩치의 반밖에 안 되었다. 그러니 녀석은 내 어깨에 제 몸의 반만 걸치고 나머지는 허공에 매달려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 저도 힘들고 나도 힘들 수밖에.
그래도 녀석은 계속 버티었다. 한 시간 정도를 그렇게 가더니, 저도 안되겠는지 어깨 위에 있기를 포기하고 내려왔다.
거기 올라가면 엄청 좋은 줄 알았는데 별 거 아니네 하는 얼굴로.
“그럼, 그렇지. 요 녀석아.”
남편과 나는 도롱이 녀석의 엉뚱한 행동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날 나는 집에 와서 어깨 전체를 파스로 도배해야 했다. 어찌나 결리고 아프던지...
그 후로 도롱이는 다시는 내 어깨 위에 올라가지 않았다.
![](http://i.blog.empas.com/bioclock/30877410_205x147.jpg)
- 뒷산을 산책 중인 도란이. 2-3개월령 무렵이다.
![](http://i.blog.empas.com/bioclock/31097377_250x187.jpg)
- 장자 도롱이를 따라 눈밭을 질주하는 도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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