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며느리 ‘도리’
‘둘째아들’ 도롱이는 계획보다 장가를 늦게 들었다. 도란이 형수 시집오는 걸 보고 하도 부러워하여 바로 짝을 맞추어 주려 했는데, 이사하고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차일피일하다 보니 겨울을 넘기게 되었다.
1991년 3월, 나는 기어코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미안함’ 때문이었다. 지각이 잦았던 것이다.
그때는 영동고속도로가 왕복 2차선, 경부고속도로가 왕복 4차선이었는데, 고속도로에서 차 사고가 나거나 차가 고장나서 서 있으면 뒤의 차들까지 울며겨자먹기로 도로 위에 서서 현장이 복구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보니 자동차 추돌 사고, 화물이 쏟아지는 사고 등이 자주 있었다. 적어도 한 달에 두세 번은 그런 일 때문에 차가 밀려 지각을 해야 했다.
우리 회사는 출근부를 오래 전에 치워두어 따로 점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편할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나는 학교 다닐 때고 전에 다른 회사를 다닐 때고 지각이나 결근은 별로 하지 않던 터라, 지각을 했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이 더욱 컸다. 지각한 날은 기분도 상하고 일도 잘 안됐다. 직장상사와 동료한테 미안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두번째로는 업무상의 문제였다. 우리 부서는 홍보실이라, 신문이 오면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서 사장실에 보고하는 게 의무였다. 사장이 출근하자마자 볼 수 있도록 하자면 적어도 아침 8시 30분까지는 스크랩을 마치고 결재판에 끼워 사장 비서실에 갖다 놓아야 한다.
그때 중앙일간지가 26개, 동종 업계 신문이 2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문마다 면은 왜 그리 많은지, 한 장씩 넘기면서 제목만 읽는 데도 넉넉잡아 두 시간은 걸렸다.
그러니 신문 스크랩을 제대로 하자면 6시 30분까지는 출근을 해야 했다. 용인에서 서울 광교 사거리까지 아침 6시 30분까지 출근하려면 다섯시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용인 우리 집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 첫차는 아침 7시, 시외버스를 타는 건 불가능했고, 남편을 일찍 깨워서 함께 가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스크랩 당번이 돌아오는데, 그때마다 남편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그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이 안돼서 그런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러니 자연히 늦게 되고 신문 스크랩도 늦어져 허둥댈 때가 많았다.
또 하나 문제는 직장에서 회식이 있다거나 야근이 있을 때였다.
나는 가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야근이라든가 회식 등 회사의 공식적인 자리엔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동료 직원들과 어울려 술 먹으며 떠들고 노는 것도 참 즐거워했다.
그런데 용인으로 내려온 뒤로는 그런 여가를 전혀 가질 수가 없었다. 시외버스가 일찍 끊기기 때문이었다. 저녁 8시가 막차이니 회사에 가장 늦게까지 있을 수 있는 시각이 7시였다. 직원들하고 어울려 라면 한 그릇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식적인 자리에 빠지기도 싫어, 그런 일이 있는 날이면 아예 외박을 했다. 또한 다음날 신문 스크랩이 있으면 그 전날은 서울에서 잤다. 동생 집에서 잘 때도 있고, 언니 집에서 잘 때도 있고, 친구 집에서 자기도 했다.
이러니 생활이 불규칙해서 말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이지만 떠돌이마냥 남의 집 신세를 지려니 불편하고 처량맞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했다.
그밖의 몇 가지 이유가 겹쳐 나는 10여 년 간의 오랜 직장 생활을 마감했다. 일 자체를 즐기고 직장 동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나였지만 ‘아이들’과 용인에서 살기 위해서는 별수없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둔다고 하니까 직장 상사와 동료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선물을 마련해 주었다. 그 선물이 바로 우리 집 둘째며느리로 들어온 ‘도리’였다.
“헤어지려니까 너무 섭섭해서...”
직장 동료가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나에게 하얀 봉투를 건네주었다.
“웬 봉투?”
“선물 사려다가 일부러 돈으로... 개를 좋아하시잖아요. 둘째 아들 도롱이 장가 보낼 계획이라면서요?”
그제야 나는 봉투의 의미를 알았다. 동료들이 추렴하여 개 살 돈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개 얘기를 자주 하고, 우리 집 ‘아이들’ 사진을 책상 위에 붙이기도 하고 그러니 동료들이 그 생각을 한 것이었다. 개 얘기를 할 때마다 싫어하지 않고 들어준 것만도 고마운데 그렇게까지 마음 써 주니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그날 저녁 남편과 나는 충무로로 나갔다. 도롱이 짝으로 들여올 잉글리쉬 코카스파니엘을 고르러.
그러나 그때 충무로 애견센터마다 코카스파니엘 새끼가 없었다. 다른 종도 별로 새끼가 없었는데, 초봄이라 개들의 출산 시기와 맞질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날 또 나오기도 어려울 것 같아 우린 포기하지 않고 이 집 저 집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한 집에서 잉글리쉬 코카스파니엘 암컷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으이구, 너무 못생겼다.”
진열장에 있는 코카 암컷은 참으로 못생긴 얼굴이었다. 도란이가 깜찍한 도시 소녀 같다면, 이 ‘아이’는 후덕하고 순박한 시골 처녀 같았다. 아무래도 도롱이가 좋아할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덩치도 꽤 컸다.
“생후 몇 달 됐어요?”
우리가 묻자 애견센터 주인도 팔릴 것 같지 않아서인지 시들하게 대답했다.
“넉 달 됐어요. 싸게 드릴 게 가져 가세요.”
“다 컸네.”
우리 역시 심드렁했다. 어릴 적 도롱이와 달리 인물이 너무 없는 데다가 덩치가 크기 때문이었다.
“예방 주사도 다 맞혔으니 데려 가시면 이익이에요.”
주인은 그래도 한 번 시도나 해보자는 얼굴로 살 것을 권유했다.
“아무 거나 줘도 잘 먹고, 성격도 순하고 몸도 튼튼해요.”
주인은 우리 눈치를 살피며 설명을 덧붙였다.
“어디, 한 번 자세히 볼까?”
남편은 그냥 돌아서기가 민망했는지, 진열장에 있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남편이 코에다 손을 갖다 대자, 그 ‘아이’는 허리를 기생마냥 배배 꼬면서 오줌을 질질 쌌다. 도롱이가 우리를 반길 때마다 하는 짓 그대로였다.
“하하. 당신 보고 반가운가 봐.”
내가 깔깔거리며 놀렸으나 남편의 얼굴은 심각했다.
“에이, 이 애로 결정하자.”
남편은 그 ‘아이’를 둘째며느리로 맞이하기로 결정하였다. 자길 보고 반색하는 그 ‘아이’를 못 생겼다는 이유로,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두고 가기엔 너무 안쓰럽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안 데리고 가면 이 애는 계속 좁은 진열장에서 살아야 할 것 아냐.”
남편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아이’를 번쩍 안았다.
그 ‘아이’는 고맙다는 표정으로 남편의 손을 계속 핥았다.
“싸게 드린 겁니다. 두 달 전이라면 20만 원은 받았을 겁니다.”
우리는 15만 원에 그 ‘아이’를 샀다. 직장 동료들이 걷어 준 선물 금액과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둘째 며느리의 이름을 ‘도리’라고 지었다. 도롱이처럼 그냥 발음만 보고 지은 것이다. 얼굴에 비해 과분한 이름이었다. 호박꽃의 이미지와 비슷한 그 ‘아이’의 얼굴에 어울리는 이름은 아마도 ‘도순’이나 ‘도숙’이 쯤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까지 촌스럽게 지어주기는 싫어 ‘도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한자로 적으면 도리(道梨).
도리를 맞이하는 우리 ‘아이들’ 셋 즉 도담이와 도롱이, 도란이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도담이는 암컷이니까 반갑기는 하지만 특별한 관심은 없다는 태도였다.
도롱이는 꽤 환영하는 분위기였으나, 도란이를 처음 봤을 때처럼 감격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도란이는 왠지 처음부터 도리를 무시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너 새로 왔니? 잘 지내 봐.”
하고 의례적인 인사를 하는 듯 잠깐 냄새를 맡더니 도도하고 고고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서 이내 제 볼 일을 보는 것이었다.
도리는 생김새대로 착하고 정이 많았다. 금세 ‘아이들’과 어울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머리도 좋아 똥오줌을 금세 가리고 우리를 무척 친근하게 따랐다.
남편은 못생긴 도리의 아빠 노릇은 싫은지, “도리야, 이 아저씨가...” 하면서 자신을 아저씨라고 지칭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신 좋아서 오줌까지 싼 애인데 왜 그러냐”며 놀려대곤 했다.
우리가 도리를 서둘러 데려온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방이 너무 좁아서 도담이 도롱이 도란이 그리고 남편과 나 다섯 식구가 같이 살기가 불편했다. 녀석들 털과 똥오줌 때문에 방안이 너무 지저분하기도 했고 방안에서 키우기엔 도롱이의 덩치가 너무 커졌다.
그래서 도리랑 짝을 맞추어 도롱이를 밖으로 내보내자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혼자만 내보내면 섭섭해 할 테니까 마누라랑 같이 ‘분가’를 시키자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도리를 사흘 동안 안에서 재워서 정을 들인 우리는 나흘째 되는 날 도롱이와 도리를 밖으로 내보냈다. 부엌 바로 앞에 자리를 깔아 거처를 마련해 주고 끈으로 묶었다.
우리 집 식구만 살면 끈으로 묶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집을 판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집 주인은 워낙 무섬증이 많은 사람인데다가 개를 특히 무서워해서 도롱이 곁에는 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어린 아기도 있으니 놀랄까봐 도롱이를 풀어 놓을 수가 없었다. 또 그 집에 오고가는 손님들한테 달려들거나 하여 결례가 될까 걱정도 되기 때문이었다.
한번도 묶여본 적이 없고, 부모와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도롱이는 일주일을 울고불고 짖어대었다. 마누라가 있어도 소용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묶여 있어야 해요?”
“나 이불 속에 들어가 잘래요.”
“엄마, 아빠 이럴 수 있는 거예요?”
도롱이는 이렇게 항의하는 듯 애절하게 울부짖었다.
우리는 마음 독하게 먹고 눈 딱 감고 귀 턱 막고 지냈다.
일주일쯤 지나자 도롱이도 옛날 생활로 복귀하는 걸 포기한 듯 울음을 멈추었다. 자식을 떼어 놓을 수밖에 없는 부모의 애끊는 마음을 이해라도 한 양.
![](http://i.blog.empas.com/bioclock/30877845_274x267.jpg)
- 도리, 16세 때 사진이다. 얼굴이 귀여운 적이 없어 강아지 때나 할머니가 돼서나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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