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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애견일기1 - 도담 도란 도조 도롱

도담이 아들 희동이

도담이 아들 희동이

“도담이 아들이라도 키워 볼래?”
“예? 도담이 아들이요?”
우리는 그때까지 도담이가 자손을 보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라니...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 일이 있었다.
도담이는 암캐를 무척 좋아했다. 수캐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도담이는 유난히 밝힘증이 심했다. 도담이는 전생에 절간의 스님이었는데 재물과 여색을 탐해 그 벌로 개로 태어났다는 명초 스님의 말씀처럼, 실제로도 발정난 암캐를 만나러 멀리까지 갔다가 교통사고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시골 부모님께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시부모님도 예사 시골분들처럼 먹고 남은 음식을 처치할 겸 집도 지킬 겸 팔아서 용돈도 마련할 겸, 집에서 늘 개를 한두 마리씩 길렀다. 그때도 순해 빠진 얼굴을 한 바둑이 암놈을 기르고 있었다.
이 바둑이를 보자마자 도담이는 침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마침 바둑이가 발정기였던 것이다.
그때 바둑이는 도담이 새끼를 가졌고, 그 새끼를 세 마리나 낳아 지금 한 달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가운데 도담이를 쏙 빼닮은 녀석이 있으니 마음이 있으면 데려다 키우라는 말씀이었다.

우리는 주말에 즉시 충청도 청양에 있는 칠갑산 아랫동네,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곳으로 내려갔다.
어머니 말씀대로 바둑이의 새끼 세 마리 가운데 둘은 제 어미를 닮아서 민하게 생겼다. 얼굴을 프라이팬으로 눌러 놓은 듯 납작한 게 볼품이 없고, 총기도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런데 한 마리는 도담이의 판박이처럼 생긴 데다가 눈망울이 또렷또렷했다. 북실북실한 털, 검고 뭉툭하면서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코, 무던해 보이는 표정, 의젓한 몸매...  다른 게 있다면 털 빛깔이었다. 녀석은 제 어미를 닮아서 하얀털 군데군데 둥그렇게 검은 점이 박힌 바둑이였다.
우리는 바둑이 새끼 세 마리를 모두 데려오고 싶었다. 도담이와 닮지는 않았더라도 도담이의 핏줄이니 우리가 거두고 싶었다. 우리가 데려오지 않으면 녀석들은 성견이 되면 어딘가로 팔려가 보신탕이 될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그러나 집에도 도롱이 도란이 도리 세 마리가 있는데 세 마리를 더 데려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별수없이 도담이와 똑같이 생긴 녀석 한 마리만 데리고 용인으로 올라왔다. 이때가 1991년 5월경이었다.

이름은 ‘희동이’라고 지었다. 부모 대(代)는 ‘도’자 돌림이었으니 그 밑의 대(代)는 ‘희’ 자 돌림으로 짓자고 하였다.
희동이는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어린 아기 이름이다. 항상 입에 공갈젖꼭지를 물고 다니는 아기로, 뭔가 맘에 안맞는 일이 있어 성질을 부릴 때는 그 떼 쓰는 게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라 ‘공포의 젖꼭지’란 별명을 가진 ‘무서운 아기’이다.
도담이 아들 ‘희동이’도 만화에 나오는 희동이랑 비슷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평소엔 무던하다가도 한번 부아가 치밀면 무서울 정도로 밀어부쳤다.
희동이를 데려오자, 평소 형인 도담이를 시샘해서 경쟁심을 가졌던 도롱이는 영 떫다는 반응이었다. 도담이 아들인 희동이한테서 아무래도 도담이와 비슷한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듯했다.
도란이와 도리는 희동이를 그냥 무심히 대하는데, 도롱이는 보통 신경을 쓰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희동이를 하룻밤만 방안에서 데리고 자고, 다음 날부터는 밖에 내 놓고 길렀다. 성견으로 자라면 덩치가 클 것 같아서 아예 처음부터 밖에서 기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방안에서 함께 지내는 ‘아이’는 도란이뿐이고, 도롱이와 도리, 희동이가 밖에서 자랐다.

도롱이는 희동이가 먹이를 먹는 것부터 방해했다. 제 녀석이 아무리 배가 불러도 희동이한테 먹이를 주면 꼭 빼앗아 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희동이는 어리므로 아무래도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넣고 더 맛있게 해주니 도롱이가 희동이의 먹이를 탐낼 만도 했다.
어쨌든 도롱이의 ‘약탈’ 때문에 희동이한테 먹이를 주려면 도롱이가 딴전을 피우고 있을 때 몰래 주거나, 아니면 주의를 딴 데 돌린 다음 주어야 했다. 그것도 정 안되면 희동이만 안으로 불러들여 따로 주어야 했다.
나는 도롱이를 따돌리기 위해 부엌 앞문 앞에 도롱이 먹을 것을 주고 난 다음 “희동아” 하고 불렀다. 그러면 희동이는 쏜살같이 부엌 뒷문으로 달려왔다. 도롱이 먹이를 그곳에 주면 부엌 뒷문 앞에는 지 먹이를 놓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간식을 줄 때도 도롱이의 심술 때문에 늘 이런 식의 작전을 펴야 했다. 희동이는 눈치가 빨라서 나중에는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도롱이 먹이를 부엌 앞문 앞에 내 놓기만 하면 재빨리 뒷문으로 달려오곤 했다.

없으니까 얘긴데, 도롱이는 머리가 나쁜 편이다. 앞서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우린 도롱이를 ‘머리 나쁜 도롱이’라고 불렀다.
다른 ‘아이’들은 문이 조금만 열려 있으면 어떻게든 머리를 써서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 나오는데, 도롱이는 제 몸 크기만큼 문이 열려 있질 않으면 나오질 못한다. 그 때문에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창고 같은 데 갇혀 있기도 했다. 문이 열려 있을 때 들어갔다가 바람이라도 불어서 조금 닫히면 못나오는 것이다.
도롱이가 보이질 않아서 “도롱아, 어디 갔니?”하고 찾아다니다 보면 어디선가 어린애처럼 낑낑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래서 소리 나는 데로 가 보면, 문이 한 뼘 정도는 열려 있는데도 그걸 못 열어서 종일 갇혀 있는 것이다.

이런 도롱이도 한참 지나서는 희동이가 부엌 뒷문 쪽으로 달려가는 행동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희동아 하고 부르니까 희동이를 옆으로 밀치고 지가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작전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부엌 앞문에 도롱이 먹이를 두었다가 희동아 하고 부른 뒤 그 먹이를 옮겨 뒷문에 놓고 희동이 먹이를 부엌 앞문에 놓는 것이다. 그러면 희동이는 제 먹이를 제대로 찾아 먹고, 도롱이는 희동이 먹이를 빼앗아 먹는다고 착각하고 먹고,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희동이는 먹는 게 늘 불안하여 음식을 빨리 먹는 습관이 들었다. 먹이를 받아 먹게 되면 뭐든 씹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꿀꺽꿀꺽 삼키곤 했다. 나중에는 커다란 계란도 씹지도 않고 한 개를 꿀꺽 통째로 삼켰다.
희동이는 도롱이의 온갖 구박을 받아가면서도 무럭무럭 자랐다. 몸집이 제 애비보다도 훨씬 커져 도롱이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성견이 되어서는 도롱이가 도담이한테 하극상을 일으켰듯이 희동이도 도롱이한테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내 희동이는 아버지인 도담이가 몸집이 작아서 도롱이한테 눌렸던 한을 풀기 시작했다. 게다가 도롱이의 아내 도리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다.
(도담이와 도롱이가 형제니, 희동이는 도롱이의 조카이며, 도롱이와 도리가 부부니 희동이와 도리는 작은엄마와 조카가 사이가 되는 셈이다. 물론, 얘네들이 피는 안 섞였지만 우리 집 서열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조카인 희동과 작은엄마인 도리가 글쎄... 이 얘기는 나중에 따로...)

   - 희동이. 도담이와 시골 믹스견 사이에서 태어남. 말티즈 유전자가 섞이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삽사리종에 가까움. 머리가 좋고 충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