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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허신행을 읽다

[스크랩] 열린 세상에 문닫고 살지 말라

열린 세상

허신행(전농림수산부장관, 한몸사회포럼 대표, 기흥구 거주)

 

지금으로부터 35억 년 전, 이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체인 원시 무핵 단세포가 탄생했다. 그들은 하나하나 고립무원의 세계에 던져졌다. 선조의 경험축적도 삶의 지혜도 이웃과의 협조도 없는 막막한 삶 그대로가 이들 단세포들의 현실이었다. 황막한 환경을 이겨내지 못한 대부분의 원시 단세포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래도 운 좋게 살아남은 세포들은 이웃들과 협력하여 서로를 열고 도우면서 세균과 박테리아로 한차원 높게 진화, 새로운 삶의 영역을 넓혀갔다.


세균과 박테리아들은 이웃과 함께 활동공간을 넓혀서 원핵세포의 남조류와 녹조류로 진화했다. 이어서 산호초 모양의 섬세한 엽상 퇴적층으로 발전했다. 이들 역시 이웃과 개방하고 상호협력하면서 진화를 거듭하여 무척추동물로 변화했다. 무척추동물은 또 진핵세포를 가진 척추동물로 그리고 물고기 ⇒ 파충류 ⇒ 포유류 ⇒ 영장류 ⇒ 현생인류로 부단하게 진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개별세포나 동물개체의 차원에서 보면 이들의 삶은 점차 더 넓게 열리고 복잡하게 연결돼갔다.


35억 년이란 가나긴 세월이 지난 후, 60조의 세포가 하나의 인간 개체를 형성, 서로 공조하면서 장벽을 허물고 열린 세상을 향했다. 만일 이들 세포가 서로 간에 쌓인 장벽을 허물지 않고 닫힌 채로 각자 나름대로 살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였다면, 60조나 되는 세포의 통합체인 인간으로의 진화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존의 본능을 가진 세포들은 서로 협력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각자 떠맡은 역할과 기능을 분업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외부의 적과 싸워 이겼고, 먹을거리를 획득했으며, 종족을 번식하는 등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인간은 원시­용맹사회의 초기단계에서 20~30명 정도의 씨족을 이루며 떼지어 살았다. 이들은 그룹을 형성하여 공동으로 채집과 수렵을 했으며, 공동으로 배분하면서 서로 간에 어떤 비밀이나 장벽도 없이 모든 것이 공개된 열린 세상에서 살았다. 원시 공동체 안에서는 구성원 상호 간에 일거수 일투족을 서로 보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열려 있었고, 상대방의 마음까지도 읽을 수 있는 긴밀한 유대관계 속에서 살았다.


농경­일손사회에서 인간은 해안이나 강변 등 아늑한 곳에 정착하여 집단적인 부락을 형성, 몇백 명씩 어우러져 함께 살았다. 필요할 경우 이웃부락과도 교류했고, 주로 5일장을 이용하여 도보로 왕래할 수 있는 인근부락 사람들과 물물교환이나 상품거래를 하면서 점차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멀리 시집을 간 친척들과는 매 5일마다 서는 시장에서 만나 정보를 교환했으며, 관혼상제가 생길 때마다 일부러 시간을 내 도보로 상호방문하며 예를 지켰다. 이와 같은 삶 속에서 사람들은 작은 지역 단위의 열린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산업­지식사회에서 인간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경제활동은 물론 정치·사회·교육·문화·스포츠 등 삶의 영역을 다방면에 걸쳐 넓혀나갔다. 한국처럼 국토면적이 크지 않은 나라는 경제의 성장·발전과 함께 1일 생활권으로 바뀌었다. 국내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 시장이 열렸고, 교육과 문화의 활동은 물론 노동시장마저 열렸다. 부족한 원료를 확보하는 동시에 상품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국가 간의 무역시장 역시 점차 열려나갔다. 다국적 기업의 형태로 선진국가들은 다음단계의 개발도상국들로 이동해가며 기업활동을 넓게 열어나갔다.


이제 새로운 한몸­사회를 맞이하여 인류는 열린 세상을 향해 부단하게 전진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세계무역 및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개도국에 대한 원조를 늘림으로써 열린 세상으로 나가는 데 보탬이 되게끔 하기 위해 1961년 9월에 창설된 선진국들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간 상호 경제협력을 도모코자 1967년 8월에 창설된 ASEAN,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지향하기 위해 1989년 11월에 창설된 APEC, 1990년 7월에 체결된 남미 공동시장 MERCOSUR, 1994년 1월 1일부터 발효된 미국·캐나다·멕시코 세 나라의 자유무역지대 NAFTA 그리고 1998년에 결성된 아랍의 자유무역지대 AFTZ 등은 열린 세상으로 가는 디딤돌들이다.


열린 세상으로 움직여가는 가장 전형적인 모범 케이스는 EU, 즉 유럽연합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당시 주요 전략물자였던 석탄과 철강의 생산과 판매를 공동으로 관리함으로써 알자스­로렌을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분쟁재발을 방지하고, 더 나아가 유럽에서 항구적인 평화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1952년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창설됐는데, 이것이 후에 EC(European Community)의 모태로 발전하게 됐다. 1958년 로마 조약에 따라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유럽경제공동체(EEC)가 각각 창설됐으며, 1967년에는 세 공동체의 기구들을 하나로 통합해 유럽공동체, 즉 EC가 발족된 것이다.


구소련이 붕괴되고, CIS 국가들이 분리독립되는가 하면,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고, 북미 3국이 자유무역지대를 형성하는 등 세계의 정치·경제질서가 빠르게 재편되는 과정에서 유럽은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무대에서 위상제고와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한 인식 아래, 유럽은 경제뿐만이 아니라 정치까지도 통합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적극적인 필요성에 따라 1992년 2월에 역사적인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체결하였고, 1993년 11월에 이를 발효시켰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기존의 EC(1st Pillar)에 공동외교안보정책(2nd Pillar)과 내무사법협력(3rd Pillar) 분야를 추가시켜 3주 체제(Three Pillar Structure)로 구성했다. 이 조약은 장차 경제는 물론 정치까지 통합하는 유럽연합을 지향했다. 1997년 6월에는 암스테르담 정상회의에서 중·동유럽 국가들과 유럽연합의 확대협상을 위해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대체하는 암스테르담 조약을 다시 채택했다. 그후부터 EU는 거대한 유럽의 연합국가로 회원국들을 끝없이 늘려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유럽은 제1·2차 세계대전을 연거푸 치렀던 앙숙의 나라들로 구성된 대륙이다. 이렇듯 과거에 쌓였던 사람들의 감정으로 미루어본다면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이들 국가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연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과정이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통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다른 대륙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해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힌트이다. 앙숙의 감정 차원을 뛰어넘는 도도히 흐르는 통합의 질서, 그것은 열린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열린 세상으로 달리는 가장 극적이고도 실질적인 노력의 일환은 WTO(세계무역기구)의 탄생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줄곧 존속돼 왔던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를 대체시킨 WTO가 여덟 번째의 다자간 협상(우루과이 라운드)을 통해 1995년 1월 1일부터 발효됨으로써 세계시장은 놀랍게도 하나로 통합됐다. 앞으로도 제거되어야 할 장벽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그 상징적인 의미는 열린 시장이라는 점에 있다. 현대국가의 특징을 가리켜 경제국가라고 일컫는 판국에서 이해관계를 초월해가며 열린 세계를 향해서 각국의 안방시장을 개방한다고 하는 것은 그 이상의 거대한 힘의 흐름이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단안이다.


일차적으로 상품과 서비스 시장을 개방하려는 목적 아래, 세계 곳곳에서 시도되고 있는 자유무역지대, 즉 FTA가 한·중·일 동북아시아지역 국가를 비롯하여 미국과 한국 간에도 협상이 진척되고 있다. 2005년 12월말까지 세계에서 FTA가 체결된 것은 120건이나 된다. 자유무역지대가 이처럼 계속 확산되면 세계경제는 명실상부하게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될 수밖에 없다. 이어서 EU와 같은 정치적 통합도 조심스럽게 시도될 것이고, 더 나아가 한몸사회로 줄달음칠 수도 있다.


열린 세상으로의 통합은 경제분야에서만 일어나는 붐이 아니다. 스포츠·교육·문화·종교 등 다른 분야에서도 열린 바람은 모래밭에 물줄기가 스며들 듯이 국경을 넘어 소리 없이 파고 든다. 축구·농구·배구·야구·탁구 등 다양한 스포츠가 국가 간에 교류되고, 선수들 역시 국적을 초월하여 이적해가면서 마음대로 뛴다. 서구의 명문대학들이 다른 국가에 분교를 설치하거나 사이버 대학을 개설, 시간과 공간까지 넘나든다. 좁은 한국땅에서 만들어진 드라마나 영화들이 한류바람을 타고 이웃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심지어 저 멀리 중동국가들로 흘러간다.


인간사회에서 가장 뛰어넘기 힘든 것으로 알려진 서로 다른 종교 간의 두터운 믿음의 장벽마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는 것은 무슨 힘 때문일까? 카톨릭과 동방정교회는 1999년에 1천 년 만의 역사적인 화해를 이뤘다. 루마니아 정교회측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요청을 받아들였고, 교황은 루마니아 정교회의 대주교와 합동미사까지 집전했다. 이슬람교 시아파 지도자이자 고위 성직자인 이란의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 서방의 순방길에 바티칸을 방문하고 화해의 길을 트기도 했다. 그는 바티칸에서 교황과 만나 ‘문명 간의 대화’를 제안하면서 “다음 세기를 칼이 아닌 대화의 세기로 만들자”고 촉구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이에 교황은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의 화해를 다짐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2월에 이집트를 방문, 각 종교 지도자들과 만나 종교 간 화합을 위한 일치의 모임을 주관했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서는 카톨릭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는 미사를 집전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어 3월에는 교황이 아예 이스라엘까지 방문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에 의해 희생된 6백만 유태인 영령들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놓은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들러, 나치의 대학살 당시 카톨릭이 침묵을 지켰던 사실에 대해 사과하고 유태인들을 위로하기까지 했다.


교황은 그해 5월 4일 그리스 아테네 공항에 도착, 로마 카톨릭교도였던 십자군이 1204년에 동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점령함으로써 동방정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킨 데 대해 늦게나마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는 이어 5월 6일에도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이슬람 사원을 방문, “이슬람 지도자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제 우리의 위대한 종교공동체를 더 이상 갈등이 아니라 존경할 만한 대화의 집단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교황의 이런 화해노력은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2천 년 동안의 반목과 갈등, 백 년 동안의 십자군 전쟁을 반추해볼 때 교황의 이런 행위와 사고는 한 사람의 용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굳은 믿음과 신앙, 종교 간의 두터운 장벽까지도 용광로처럼 녹여내는 시대적 변화, 즉 열린 세상으로의 도도한 물결과 진화의 힘이 아니고서는 이런 껍질이 도저히 부서질 수는 없다.


열린 세상을 향한 일련의 이런 변화와 움직임들은 사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산업­지식사회의 말기와 한몸­사회의 초기에 나타날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지각변동의 시작인 것이다. 앞으로 한몸­사회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앞에서 살펴보았던 디지털 혁명과 유비쿼터스의 체제가 갖춰지고, 가상세계와 현실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60억 인류의 오감을 모두 연결하게 되면 국경·인종·피부색·종교·이데올로기·사상과 믿음·성별·빈부의 격차 등 일체의 장벽이 모두 허물어지고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진화돼 완전히 열린 세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인간의 몸 안에 60조의 세포가 서로를 열고 도우며 살아가듯이 60억 인류도 하나의 유기체로 연결돼서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두 알 수 있는 그리고 유비쿼터스 시스템에 의해 모든 사람과 제품들이 움직이는 것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완전하게 열린 세상으로 인류 문명은 지금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열린 세상이 명실상부하게 오는 날에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도 모두 바뀌게 될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어지고, 모두가 평등해지며, 돈과 권력보다는 이웃과 나누고 베푸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개인보다는 인류 공동체의 안위와 건강을 더 챙기게 될 것이며, 지구촌 전체의 평화와 지속가능한 생태계의 유지를 위해 더욱 분발하게 될 것이다. 인류의 다른 구성원은 물론 동물과 식물까지도 자기 몸처럼 여기게 될 것이고, 모두 함께 공존·공생하는 법을 배워나가게 될 것이다.


이런 열린 세상이 다가오면 전 인류가 바야흐로 한가족, 한몸으로 전환하게 될 텐데, 이런 상황에서 테러와 전쟁 같은 폭력이 왜 필요하겠는가? 세상의 변화를 모르는 사람들은 좁은 소견에 따라 테러도 일삼고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이며, 또한 지는 자가 이기고 이기는 자가 지게 된다. 이라크전과 같은 전쟁은 그 지역 시장을 놓침은 물론 세계인들의 반전여론에 부딪혀 인심을 잃게 만든다. 전쟁은 재앙으로 바뀔 것이다.


군비증강도 반문명적이며, 개방을 반대하는 독재정권이나 비민주적 독선 지도자들도 열린 세상으로 달리는 문명의 흐름을 거역하는 행위로 오명을 남기게 될 것이다. 열린 세상에 대한 대비가 잘 되어 있지 못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개방화의 물결을 막는 데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정부의 실질적인 구조조정 정책을 요구,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세계는 바야흐로 공기처럼 물처럼 확 트이고 열린 세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 용인타임스
글쓴이 : 개마고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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