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처럼 투명한 세상
- 허신행 박사(전농림수산부장관, 한몸사회포럼 대표)
한국의 연예계에서 ‘O양 비디오’라는 사건이 매스컴의 조명을 호되게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얼마 후 ‘B양 비디오’가 또 한 차례 물의를 일으키면서 사람들을 더욱 의아하게 만들었다. 이 둘 모두 연인들끼리 은밀하게 가졌던 성관계가 녹화되어 인터넷에 오른 사건들이었다. 이로 인해, 호기심 절반 두려움 절반이 뒤섞인 여론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결혼 여부와는 관계없이 연인들 사이에 성관계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이들이 인기 연예인이라는 점과 누가, 왜, 어떻게 남몰래 이렇듯 비밀스러운 장면을 녹화했을까, 로맨스의 선봉에 선 연예인들의 그런 행위는 우리들의 것과 어떻게 다를까 하는 호기심 그리고 우리들의 은밀한 행위도 누군가가 몰래 녹화, 테이프로 나돌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이 섞인 불꽃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밤잠 못 이루며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 두 비련의 여인들은 투명한 세상의 여명黎明을 안타깝게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어느 젊은 미모의 여배우가 백화점에서 고급의류를 한 아름 훔쳐 달아나다가 붙들려 망신을 산 적이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런 도벽이 일어난다는 변명이었지만, 자기 일생과 맞바꾸게 될 비용을 단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봤더라면 그런 설명마저도 단지 얼떨결에 튀어나온 불필요한 자기 합리화였을 것이다. 백화점 천장 곳곳에 몰래 카메라가 숨겨져 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알았더라면 스트레스 푸는 방법을 달리 찾았을 것이란 점이 그녀를 안타깝게 지켜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젊은 나이에 할리우드의 스타가 되다보니 그녀가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은밀히 알선된 비밀 도박장에 들어선 사람은 서울 장안에서도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놀음판의 큰 손이었다. 도박실력으로는 그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다. 이런 그가 다른 큰 손들이 있다는 꾐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처음 몇 판은 실력으로 펼쳐진 게임이라 당연히 이 큰 손의 싹쓸이였다. 하지만 점점 판이 무르익어가자 판세는 바뀌기 시작했다. 설마 내 실력을 누가 감히! 하고 자신만만하게 방심하다가 뒤끝 몇 판에서 몽땅 잃어버리고 빈 털털이가 된 수억 원대의 그 큰 손이 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돈을 챙긴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고, 허탈해진 그가 천장을 노려보았을 때 거기엔 불빛에 반사된 구멍이 하나 남아 있을 뿐이었다. 몰래 카메라의 렌즈였던 것이다. 소형 첨단 카메라로 상대방의 카드번호와 그림을 읽고, 같은 편에게 실시간 무선으로 알려줘 판돈을 다 쓸어간 지능범들이었다. 과거의 상식과 기술력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었지만, 잃은 자와 딴 자의 차이는 투명성에 대한 관심과 주의력에 있었다.
은행의 현금인출 창구, 돈 있는 장소에는 언제나 도둑이 들끓게 마련, 용돈이 필요했던 어떤 지능범이 몰래 카메라 설치 정도는 알고 있던 터라 저녁 늦은 시간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태연한 척하면서 남의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을 빼냈다. 하지만 나는 놈 위에 타는 놈이 있게 마련이다. 카메라 감시 경비원이 즉각 달려와 절도범을 체포하는 장면까지도 실시간으로 녹화 중계되는 세상이고 보면, 마치 은행을 터는 갱단을 소재로 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은 투명한 세상이 성큼 다가섰다.
아침 출근시간의 복잡한 시내버스 안, 직장에 마음을 빼앗긴 여성의 지갑 속으로 검은 손을 넣고 현금뭉치를 몽땅 털어간 소매치기는 오히려 태연했다. 아무도 모른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지갑을 털린 그 여자마저도 아직 낌새를 채지 못했다. 그러나 CCTV를 지켜보고 있었던 단 한 사람, 운전기사는 버스의 문을 걸어 잠그고 조용히 파출소 앞에 차를 세운 다음 경찰로 하여금 몸수색을 하여 그 소매치기를 잡도록 하는 장면까지 모두 실시간으로 녹화됐다. 이제 버스 속 여성들의 핸드백 수난시대마저 지나간 투명한 세상이 다가섰다.
밤늦게 술에 만취된 성질 사나운 어떤 중년의 사내가 서울 시내버스에 올라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운전기사를 마구 구타하다가 파출소 앞에서 경찰에 의해 구금되는 장면까지 몰래 카메라에 잡혀 저녁 TV뉴스에 방영된 사건은 시청자들의 혀를 차게 만들었다. 이 드라마틱한 장면을 지켜본 가해자의 가족, 특히 그 아내와 자녀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앞으로는 누구나 술을 마시더라도 집 안과 밖이 따로 없는 투명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쯤은 염두에 넣어두고 행동해야 될 날이 온 것이다.
비좁은 골목이나 아파트 앞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의 수난사례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연상시킨다. 자동차 안에 있는 귀중품을 털다가 몰래 카메라에 찍힌 절도행위, 원한으로 앙심을 품은 사람의 자동차에 남 몰래 불을 지르다가 찍힌 방화범, 자기 집 옆 좁은 골목에 세워둔 차들의 타이어에 송곳으로 펑크를 내다가 찍힌 얌체족, 시기심에 못 이겨 새 차를 보기 흉하게 앞뒤로 긁다가 찍힌 심술쟁이, 자동차문을 발길로 차다가 찍힌 주정뱅이 등 숱한 비행들이 몰래 카메라에 잡힘으로써,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심술을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고속도로나 국도상의 속도위반 차량을 감시하는 몰래 카메라의 숫자 또한 날로 늘어나는 추세이다. 속도를 내기 쉬운 곳이나 사고가 계속해서 났던 장소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의 상식이 됐다. 이들 몰래 카메라는 일단 설치만 해두면 24시간 동안 과속차량에 대한 감시는 물론이고 법규위반 차량 적발로 수입까지 올리게 되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앞으로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주요 도로마다 필요한 곳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두면, 과속차량의 숫자는 줄어들 것이고, 교통경찰의 수도 감소할 것이며, 지방 재정수입까지 올릴 수 있는 일석삼조一石三鳥의 세상이 눈앞에 다가섰다.
골목 어귀에 버려서는 안되는 생활 쓰레기를 좌우 살펴가며 살짝 버리다가 몰래 카메라에 찍힌 양심 판매자,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서 값진 상품을 훔치다가 카메라에 찍힌 상습 절도범, 불륜으로 사귄 여인과 남 몰래 러브호텔에 갔다가 카메라 낚시꾼들에게 걸려든 난감형 부도덕자, 고급 호텔 방에서 살인하고 슬쩍 빠져나와 도망치다가 몰래 카메라에 찍힌 흉악 살인범, 귀중품을 밀수해 팔다가 찍힌 밀수꾼, 마약을 팔거나 복용하다가 찍힌 마약사범……. 이제 이들 범죄자들의 은신처는 동해바다에서 붉은 태양이 솟듯 투명한 세상이 다가옴에 따라 서서히 좁아져간다.
미국에서는 요즈음 ‘직장 내의 몰래 카메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중간간부로 공채돼서 들어온 어느 직원의 시외전화 비용이 급증하고, 회사 근무실적마저 저조해져서 이를 이상히 여긴 직장 상사가 그 직원의 책상 바로 위 천장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24시간 감시했다. 놀랍게도 그 직원은 회사를 이용해 자기 개인의 보험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물론 즉각 해임됐다. 남 몰래 회사의 장비와 집기는 물론 봉급까지 도용해가면서 개인의 사적인 사업을 운영하려는 헛된 욕심에 가려 새롭게 도래하는 투명한 세상을 그는 전혀 모르고 삶으로써 자신을 몰락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회사 근무시간을 이용하여 자기 개인사업을 수행하는 경우 말고도, 회사의 핵심기술을 빼돌려 경쟁사에 팔아넘김으로써 일확천금을 노린다든지, 인터넷이나 전화를 사적으로 많이 이용한다든지, 포르노 사이트에서만 몇 시간씩 보내면서 회사일은 제쳐둔다든지……. 이처럼 회사업무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로 봉급만 축내는 직원들을 감시하기 위한 몰래 카메라의 숫자가 날로 늘어나는 추세이다.
직원들에 대한 감시방법도 변화무쌍하다. 전화감청 장치, FAX 복제 장치, 디스크 복제 장치, 화재경보기에 몰래 카메라 설치하기, 적외선 탐지장치 설치하기, 사설탐정 고용 등 가능한 방법이 모두 동원되고 있다. 이런 감시장비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계속 진화한다. 감시를 당하는 직원들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다. “개인 사생활 침해다”, “인권 침해다”, “자존심 상한다”, “기분 나쁘다”, “창살 없는 감옥이다”, “근무의욕이 떨어진다”……. 이렇듯 불평불만의 소리가 반작용으로 고조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도도하게 흐르는 투명한 세상이다.
직장 내의 몰래 카메라 설치문제로 사용자 측과 피고용자 측 사이에 갈등과 마찰 그리고 이에 대한 논쟁이 뜨거워지는 것은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그 열기가 아무리 고조돼도 몰래 카메라 설치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근로자들 역시 점차 시대적인 변화로 받아들이는 추세이다.
봉급을 받고 일하기로 계약을 한 것은 근무시간 동안 만큼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할 의무를 갖는다는 쪽의 논리가 우세할 뿐만 아니라,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일하는 사람의 경우라면 몰래 카메라를 두렵게 생각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기업 가운데 75~80퍼센트 정도가 이미 인터넷과 이메일 감시장치를 설치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 추세는 더 올라갈 전망이다.
2005년 7월 7일과 21일에 연이은 테러를 당하여 51명 이상이 죽고 많은 부상자를 낸 그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영국 런던시 당국은 냉정을 잃지 않고 테러리스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족집게로 뽑아내듯이 치밀하게 색출해낸 성과로 세계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처음엔 불가능해 보이던 색출작업의 배경에는 4백만 대 이상의 CCTV가 있었다.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쟁취코자 지난 30년 이상 영국을 상대로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해온 IRA 지하단체 때문에 영국은 일찍부터 CCTV를 요소요소에 설치해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폭 테러리스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이들 CCTV에 포착됐기에 신속한 색출이 가능했다.
IRA 지하단체가 런던 테러 진압 후 불과 일 주일도 채 안돼서 자발적으로 무기를 모두 버리고 테러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평화와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목표를 실현시켜나가겠다는 대선언을 했다. 런던에 대한 알카에다의 테러가 어떤 모습이었고, 영국인들이 테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영국정부가 어떤 방법으로 냉철하게 대응했는가를 옆에서 지켜본 그들은 스스로 큰 충격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물론 영국정부 역시 30년 이상 골치를 썩혀온 테러 조직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됐다. 이처럼 영국 런던에 대한 알카에다의 테러로부터 얻은 두 가지의 극적인 효과는 투명한 세상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준 일말의 드라마였다.
2005년 10월,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도서 추천 TV쇼에서 제임스 제프리(36세)의 약물중독 극복수기인 《일만 개의 작은 조각들A Million Little Pieces》을 추천했다. 이 책엔 마약과 알코올 중독, 수감생활 등 저자의 아픈 상처들이 수록돼 있다. 이 TV쇼에 소개되면서 자서전은 2백만 부 이상 팔렸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도 올랐다. 하지만 이메일 제보를 받은 뒤 두 달 동안 수사기록을 뒤지고 관련인물들의 진술을 들어본 결과, 자서전에 나온 중요한 사실들이 거짓이라며 제동을 걸고 나온 것은 탐사전문 뉴스 사이트인 ‘스모킹 건’이었다.
불똥은 2005년 12월 중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에게로까지 번졌다. 위젤의 논픽션 《밤Night》이 오프라 윈프리의 추천 도서로 선정돼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른 직후, 거짓논쟁에 휘말려든 것이다. 자신의 나치 강제수용소 체험을 적은 자서전에서,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 그의 나이와 수용소로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젊은 죄수들이 벌인 애정행위에 대한 기술 등에 거짓이 있다는 제보들이었다.
윈프리와 해당 출판사의 홈페이지에는 분노의 글이 쏟아졌다. 미국 언론에는 ‘진실을 백만 가지 방식으로 뒤틀기’, ‘창조적 논픽션’, ‘가식의 세계’라는 가시 돋친 말들이 서슴없이 등장했다. 비판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이라크전과 대법관 청문회를 둘러싼 정보 조작 등 정치권의 행태에 대해서까지 번지는 양상이었다.
왜 그랬을까? 한몸사회가 전개되면서 투명한 세상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몸정각사회에서는 진실과 정직이 최고의 덕목으로 자리잡게 될지도 모른다.
2005년 하반기의 한국사회는 중앙정보기관인 국정원에 의해 무고한 시민들이 무차별적으로 도청을 당했다는 사건으로 요동친 일이 있다. 그 동안 도청의혹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한결같이 “아니다”로 일관됐다. 하지만 비밀도청 테이프가 누설됨으로써 정부의 말은 모두가 거짓임이 드러났다. 나아가, 거액의 정치자금 수수에 대한 도청내용이 공개됐으며 도청 담당자가 빼돌린 테이프가 무더기로 발견되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급기야 국정원 원장이 국민을 상대로 공식사과했고 도청사실도 상세히 밝혔다. 정부수립 이래 초유의 사태였다.
세계최대의 정보기구와 도청능력을 자랑하는 미국에서도 9·11테러와 이라크전 준비에 대한 정보의 공신력에 대해 의회의 특별조사 활동이 전개됐다. 심지어 부시 대통령에 대해서도 무려 세 시간 동안의 비밀조사가 이루어졌을 정도였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조사활동이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도도하게 흐르는 투명한 세상의 도래 때문이었다. 몰래 카메라나 은밀한 도청과 같은 재래식 수단은 단지 투명한 세상의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전 인류가 점차 한몸으로 통합·진화되는 날에는 오감의 연결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읽는 사이보그 인간세계가 열려, 이 세상천지가 거울처럼 투명해질 것이다. 60조 개의 세포가 서로 어울려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몸 안의 세상에는 비밀이란 없는 투명세계 그 자체이다. 60억 인류가 한몸이 되는 새로운 문명사회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서로 연결돼 함께 공동으로 살아가는 투명세계로 바뀐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아 존경까지 받으려면, 첫째도 정직, 둘째도 정직, 셋째도 정직해야만 한다. 그리고 진실과 정도正道를 따라야만 한다. 세상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자연적·자생적 질서에 따라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파란태양 > 허신행을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마주 싸워 둘이 죽거나 서로 도와 함께 살거나 (0) | 2011.12.12 |
---|---|
[스크랩] 왜 눈은 두 개일까? 세 개면 안되나? (0) | 2011.12.12 |
[스크랩] 열린 세상에 문닫고 살지 말라 (0) | 2011.12.12 |
[스크랩] 생각의 속도로 움직이는 세상 (0) | 2011.12.12 |
[스크랩]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아는 투명한 세상 (0) | 2011.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