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상멸(相生相滅)
- 허신행(경제학박사, 전농림수산부장관, 한몸사회포럼 대표)
요즈음 한국사회에서 ‘상생相生’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주로 쓰이는 분야는 정치권이다. 그리고 간혹 자연과 인간이 상생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눈에 뜨인다.
흥미로운 것은 정치권에서도 여당과 야당이 이전투구泥田鬪拘 식으로 된통 싸울 때, ‘상생 정치’를 하자거나 해야 한다는 소리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난다. 여와 야가 민생문제를 오순도순 함께 화합적으로 풀어가는 것을 상생정치로 여기는 모양이나, ‘상생’이란 반드시 그런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공생’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항상 견제하고 비판하기만 하는 야권에다 대고 ‘공생’이란 말을 붙였다가는 오해를 받을까봐 그런 용어를 피하다보니 애매모호하게 ‘상생’이란 말을 쓰게 된 것 같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얼핏 보기엔 ‘상생’처럼 여겨지는 것같지만, 그것도 잘못된 쓰임새다. 상생이란 뒤에서 자세히 논하게 되겠지만, 짝으로 동시에 태어난다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게 되는데, 자연과 인간은 그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녀, 부부가 짝으로서 상생관계에 놓여 있지만, 남녀라 하여 어머니와 자식 사이를 두고 상생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 인간을 태어나게 만든 모체요, 근원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식처럼 비유될 수는 있어도, 서로 대등한 남녀나 부부와 같은 상생의 관계는 아닌 것이다.
‘상생相生’이란,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둘이 서로 또는 쌍으로 태어나다’라는 의미이다. 쌍둥이처럼 동시적으로 태어남을 의미할 뿐, 태어난 다음에 둘 관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수반되지 않는다고 봄이 옳다. 쌍둥이가 서로 애지중지愛之重之 화합적으로 잘 지낼 수도 있고, 때론 견해차이나 이해타산으로 티격태격 싸울 수도 있다. 그러면 쌍둥이가 공생적으로 잘 지낼 때에만 상생이고, 싸우며 뒤틀어질 때에는 상생이 아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쌍둥이 형제는 화목할 때도 상생이요, 싸울 때도 상생이다.
여당과 야당은 본래 상생으로 생겨난 정치 역학적인 산물이다. 그러므로 여·야 정치인들이 피 터지게 싸워도 상생정치요, 민생문제를 오순도순 함께 해결해도 상생정치이다. 상생정치란 여와 야 간에 싸우고 싸우지 않고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집권여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야당이 자연스럽게 상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당은 어느 면에서 집권여당을 항상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야당은 언제나 집권여당의 발목만을 잡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거나 정쟁만을 벌이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상생’이란 용어가 ‘잘 해보자’는 의미로만 쓰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이다.
원래 ‘상생’이란 말은 주역周易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서 나온 용어이다. 음양설에 대해서는 뒤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만물의 근원, 즉 우주의 본체인 태극太極에서 음양陰陽이 나오며, 음양의 조화에 따라 물[水] 불[火] 나무[木] 쇠[金] 흙[土] 등 다섯 종류[五行]의 물질이 생긴다고 했다. 이 오행五行으로부터 만물이 파생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오행 가운데에서도 서로의 관계설정이다. 이를 상생상극相生相剋이라 하는데, 우선 상생관계를 보면, 나무는 불을 일어나게 하고[木生火], 불은 흙을 나게 하며[火生土], 흙은 쇠를 낳고[土生金], 쇠는 물을 살린다[金生水] 하였다. 오행이 서로 맞물려 돌고 돌면서 물질을 생성케 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번에는 반대로 상극관계를 보면, 나무는 흙을 이기고[木剋土], 흙은 물을 누르며[土剋水], 물은 불을 끄고[水剋火], 불은 쇠를 제어하며[火剋金], 쇠는 나무를 이긴다[金剋木] 했다. 상극 역시 오행의 수레바퀴식 극복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음양과 오행으로 세상 만물에 대해서 그 성격과 관계 등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의 상식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 점들이 더 많다. 만물의 근원에 대해서는 그렇다 치고, 현재까지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은 여섯 개의 소립자로부터 92개의 자연원소와 16개의 인공원소가 기본이다. 이들에 의해서 삼라만상이 형성된 것이다.
하여간 오늘날 우리들에게 낯익은 ‘상생’이란 용어가 음양오행설에 등장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단순한 상생이 아니라 인과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두 개의 물질이 인과관계에 놓여 있다면, 이것은 상생관계가 아니다. 상생이란 선·후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두 개의 물질이나 개념이 선·후 없이 거의 동시적으로 짝처럼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음양오행설에 등장한 상생은 용어만 우연히 같은 것일 뿐, 동일한 내용의 것은 아니다.
상극도 마찬가지로 두 물질 간의 극복관계를 나타냄으로써 역시 인과관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상멸相滅이란 그런 인과관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상멸相滅 역시 두 물질이나 두 개념이 선·후 없이 거의 동시적으로 짝처럼 사라지거나 소멸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극 역시 상멸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고 봐야 옳다.
상생상멸의 의미가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놀랍게도 동양사상에서가 아니라 현대 물리학에서이다. 1928년 물리학자 디랙이라는 사람이 소위 ‘디랙 방정식’이라는 것을 풀어냄으로써 서서히 빛을 보게 된 소립자들의 ‘쌍생성’과 ‘쌍소멸’이 바로 상생상멸이다. 물질과 반물질이 쌍으로 또는 짝으로 동시에 생겼다가 동시에 사라지는 현상을 발견해낸 것은 이처럼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소립자 세계에서 상생상멸이 하나의 원리처럼 되어 있다고 해서 108개의 원소나 그에 의해 형성된 만유세계에서까지 상생상멸이 보편화되어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은 숙제요, 앞으로의 연구과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의 물질세계뿐만이 아니라 정신세계까지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점검해볼 때, 묘하게도 이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는 이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보는데, 상생상멸은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라고 하는 가설을 마음 속으로 점차 굳혀가고 있는 중이다. 이 연구서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시도된 것이다.
대다수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현상이나 변화를 인과적으로 접근하려는 습성을 지니고 산다. 이런 인과적 접근자세는 거의 본능적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결과를 설명하려는 노력에서 원인을 찾고, 그 원인들이 결과에 미친 정도를 측정해냄으로써 결과를 예측해내거나 원하는 방향으로 개조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이런 습관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다른 형태의 물리작용이나 변화를 알아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상생상멸과 같은 것이다.
상생상멸이 인과관계로서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짝으로 생겼다가 짝으로 소멸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런 현상이 삼라만상에 보편화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해진다. 모든 현상을 인과적으로 보려 하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며, ‘옳으냐’ ‘그르냐’ 하는 흑백논리로 선택 내지 가리려고만 한다면, 세상은 참으로 시끄러워지고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개씩의 눈과 귀, 두 개씩의 팔과 다리는 물론 남과 여, 선과 악, 밝고 어둠, 여당과 야당, 노와 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세계화와 반세계화……. 이 모든 것들이 인과관계로서가 아니라 그냥 상생의 짝으로 생겨난 것이라 한다면, 그 사실을 안다는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갈등과 마찰을 해소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물을 어떻게 보고 생각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해진다. 가장 바람직스러운 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상생상멸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상생상멸相生相滅은 정말로 보편적인 현상이나 하나의 원리일까?
* 원제목 <상생상멸>을 <마주 싸워 둘이 죽거나 서로 도와 함께 살거나>는 허신행 박사님의 이론과 직접 관련 있는 표현은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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