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과 상생상멸
- 허신행(경제학박사, 문명사가, 전농림수산부장관, 한몸사회포럼 대표)
정립과 반정립 그리고 이어 통일되는 종합은 변증법의 간명한 형식적인 체계이다. 이것은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상생상멸의 또 다른 측면일 수밖에 없다. 긍정과 부정, 정립과 반정립 등은 모두가 상생의 짝들이기 때문이다. 이 쌍들의 작용에 의해서 종합으로 변하는 것은 상멸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렇다면 서양 철학자들이 말하는 변증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변증법辨證法이라는 용어는 희랍어의 디아렉티케dialektike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디아렉티케는 원래 변론술dialektike techne에서 술technik을 생략하고 쓴 말이다. 이를 분해하면 디아dia(서로)와 렉티케lektike(말하다)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서로 말하다, 즉 대화 변론에 의하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변증법은 고래로부터 철학연구에 많이 이용되어온 것이다. 변증법은 애초에 제논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일찍이 플라톤에 의해서 발전되었으며, 헤겔에 의해서 완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은 관념 변증법이고, 칼 마르크스는 유물 변증법을 주창하였으며,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는 절대 변증법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이들의 사정은 사뭇 달라진다.
변증법을 가장 먼저 창시한 사람이 제논으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관적으로 규정한 것이고, 실제는 헤라클레이토스라는 데 의견들이 일치하고 있다. 제논Z럑뾫(BC 335∼BC 263)은 자기 신념의 정당성을 상대편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가 참이라고 믿는 것을 직접 논증하기보다는, 오류를 전제로 설정하고, 그것이 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증명의 방법에 치우쳤던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유형의 증명방법을 변증법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후에 헤겔이 인정했듯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BC 540?∼BC 480?)는 서로 대립되는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의 두 가지 형型을 분명한 논제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있음과 동시에 있지 않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같은 것이다’, ‘무는 유와 공존하고 때로는 유와 무는 동일하다’고 말한 내용에서 대립되는 정립과 반정립의 두 축에 접할 수 있으며, ‘변화·운동·다양이야말로 실재의 진상’, ‘만유는 유전한다’는 말 등에서 변증법의 기본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변증법은 플라톤Platon(BC 429?∼BC 347?)에 의해서 발전되었다고 했는데, 그는 일찍이 우리와 같은 개인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서 참다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것, 즉 참다운 존재는 무엇인가? 플라톤은 실재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 즉 인간의 이데아라고 규정하였다.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체體가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요, 이것은 영원불멸의 실재라 하였다. 그러하기에 진실재眞實在인 이데아는 그림자와 같은 현상인 개별적인 사물을 초월한 영원불멸의 것이 된다.
놀랍게도 플라톤은 이처럼 영원불변하고 초월적인 이데아를 우리같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에 의존하여 파악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런 불멸의 이데아는 초감각적이고도 이성적인 인식의 산물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인식은 불사不死인 혼이 잠시 후 죽어 썩어질 수밖에 없는 육체라는 감옥의 속박을 벗어나서 참다운 자유를 얻을 때,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라 하였다.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해탈 후, 참나가 드러나는 것과 같이 플라톤 역시 진리는 그때 비로소 우리들의 것이 된다고 보았다.
플라톤에 있어서 진리는 이처럼 진실재인 이데아와 직결되며, 이데아는 우리 인간의 감성의 피안에 있는 존재 그 자체이므로, 참다운 지식을 찾는 인식작용은 감성적인 것들을 꿰뚫고, 그 근원에 있는 이데아에 접근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하기에 플라톤에 있어서는 인식론과 존재론이 상생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변증법이란 곧 이러한 인식과 존재와의 결합 속에서 성립하는 학문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 플라톤의 변증법은 이데아라는 존재와 인식의 근원에 있는 실재에 이르는 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후기 사상 속에는 이런 이데아론을 약간 벗어나 방법론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분석과 종합이라는 개념, 즉 다多에서 하나로 또는 이데아에서 개별의 다多로 진행하는(불교에서 말하는 다즉일多卽一이요, 일즉다一卽多라는 말과 같음) 쌍방향의 조작을 통하여 분석과 종합을 통일한 철학적 방법을 변증법으로 여겼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의 변증법은 어디까지나 진리인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자 수단으로서 진실재에 이르는 학문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 같다. 플라톤은 역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철학자로 여겨진다.
플라톤의 철학적인 변증법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BC322는 방법으로서의 변증법, 즉 지적인 능력을 훈련하기 위해서나, 사람들과 의논을 하기 위해서, 또는 대립하는 쌍방의 주장에 대하여 시비를 분명하게 가리거나, 각 학문의 궁극적인 원리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변증법을 제시하였다. 그의 변증법에서는 오직 지식을 음미하고, 대립된 두 진술 가운데 어떤 것을 취할 것인가, 긍정과 부정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등의 방법을 다루었다.
종교의 영향 아래 놓인 중세의 변증법은 협의적으로는 논리학의 한 부분이었고, 광의적으로는 논리학과 동일한 것이었다. 질서와 정체의 시대였던 중세의 철학은 형식 논리학과 거의 동일시될 정도로 형식화 내지 고정화되었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에게 변증법가家는 단순히 3단 논법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변증법이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뚜렷한 모습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칸트에 의해서였다.
칸트Immanuel Kant(1724∼1804)는 논리학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첫번째를 분석론과 변증론으로 채울 정도로 변증법을 독자적인 영역으로 다룬 바 있다. 그렇지만 그는 분석론을 진리추구의 논리학으로 규정한 데 비해서, 변증론에 대해서는 변론이나 토론을 위한 가상의 기술로 여겼다. 그리하여 칸트는 가상假象을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논리의 일환으로 변증법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변증법에서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1762∼1814)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변증법 발전이라는 차원에서보다 3단계 명제의 설정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기억될 필요가 있다. 피히테는 칸트의 인식의 한계성과 물자체物自體라는 질곡을 벗어나고자 자아自我에 무제한의 능력을 부여하고 나섰다. 그에 의하면, 자아의 활동은 3단계로 구별된다.
3단계의 첫째는 자기 자신과 관련하여 자아의 존재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는 자기를 조정措定한다’라는 제1명제로 정식화된다. 둘째는 자아와 자기와의 관련은 곧 자아와 그외 비아非我와의 관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자아는 타자他者를 알기 때문이다. 이는 또 ‘자아는 비아를 조정한다’라는 제2명제로 정식화된다. 셋째는 두 가지 명제를 전제로 하여 우리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전개시켜나가는 것이다. 이때 ‘자아는 자기 속에서 가분적可分的인 자아에 대하여 가분적인 비아를 대립시킨다’라는 제3명제를 획득해낼 수 있다. 피히테는 제1명제를 ‘정립: Thesis’ 제2명제를 ‘반정립: Antithesis’, 제3명제를 ‘종합: Synthesis’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피히테의 제3명제, 즉 종합은 헤겔 변증법의 종합과는 용어면에서는 같아도 의미면에서는 서로 다르다. 피히테의 제3명제인 종합은 결코 제1명제와 제2명제의 참다운 의미에서의 종합이 아니다. 여기에는 헤겔적인 의미의 지양(aufheben)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립·반정립·종합이라는 3조 형식은 헤겔 변증법과 공통적인 모양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무한과 유한과의 매개’라고 하는 사고 속에는 헤겔 변증법의 선구적 아이디어까지 깃들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변증법’이라 하면 역시 헤겔이 대명사처럼 연상될 뿐만 아니라, 그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은 변증법을 논리적으로 조직하여 철학으로 발전시킨 보기 드문 철학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변증법은 만유의 발전양식이자 사유思惟 전개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헤겔 철학의 본질은 만유는 유일·절대적인 궁극적 실재인 정신(혹은 이성)의 발전으로서 항상 유전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한 체體와 상용相用의 관계랄까, 즉 만유는 체로부터 나오고, 그것들은 상과 용으로 나타나 모양을 드러내고 작용한다는 말과 같다. 만유가 유전한다고 하는 것 역시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도 같은 내용이다.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物自體를 둘로 뚜렷하게 나누어 접근하였다. 그런데 헤겔은 경험과 이성, 유와 무를 둘이 아닌 하나로 보았다. 불교철학에서 말한 본체와 상용相用, 즉 현상을 하나로 볼 것이냐 둘로 볼 것이냐와 같은 시각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은 실재와 정신이 무관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라고까지 보았다. 불교철학에서 말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명제라고 여겨진다.
사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나 헤겔의 ‘변증법’에 접할 때면, 이들이 과연 불교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그들이 불교철학을 얼마나 잘 소화시켰으며, 그들의 학문에는 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을까에 있을 것 같다.
헤겔은 유기적인 생물이나 무기적인 물질은 물론 역사와 사회 그리고 관념이나 정신작용까지도, 요컨대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만유는 부단하게 운동·변화·발전하고 생성과 소멸을 반복해 나가는 것으로 보았고, 그러하기에 헤겔은 역사를 경험의 시간적 구조로 포착하였던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역사적 운동이란 3단계의 변천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주기적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기적 운동이란 정립과 반정립 그리고 종합이라는 3박자 리듬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들 3박자 리듬의 운동은 왜 생기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이는 헤겔 철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데, 그는 만유의 변화와 운동의 원리로서 ‘자기부정’이라든가 ‘모순’을 생각해냈다. 헤겔에 의하면, 현상 세계는 영원한 정지나 단일성이 아니고 변동과 다양성이며, 모순이 일체의 변화와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운동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바로 ‘모순’ 내지는 ‘자기부정’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자기 자신 속에 자기를 부정하는 것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사물이건 관념이건,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에 즉해서卽自 존재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자기부정에 의해, 자신이 또한 타자가 되어, 자신에 대하여 대자對自로 맞서게 된다고 했다.
내면적으로 타자가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최후에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인데, 이 마지막 단계가 즉자대자卽自對自라 했다. 이처럼 운동에는 세 단계가 있는 셈인데, 즉자·대자·즉자대자라든가, 정·반·합 또는 정립·반정립·종합이라는 3박자 리듬을 가지고 변하며, 이를 논리적 도식으로 확립한 것이 변증법인 셈이다.
헤겔 변증법에서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종합(Synthesis)인데, 정正과 반反이 합合으로 지양(aufheben)되고, 이 합은 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반反으로 자기 분열을 일으켜, 그것이 다시금 합하여지는 무한의 발전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헤겔 변증법의 핵심은 사유의 자기분열에 의한 모순의 전개와 그 분열에 의한 모순의 발전·통일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많은 철학자들이 이미 헤겔의 변증법 사상을 비판하였듯이 ‘자기부정’이나 ‘모순’에 의해서 모든 것이 즉자·대자·즉자대자로 분열하고 통일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헤겔은 분명, 물질세계이건 정신세계이건 모든 것이 상대적인 쌍으로 생성소멸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아냈던 것 같은데, 그 원인에 대해서 논리적이고도 근원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과욕이 앞선 나머지, 무리한 시도를 한 것이 아닌가 싶다.
헤겔 철학에 대해서 하나하나 비판을 가하기 이전에 우선 그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논의의 소재들을 보면, 유와 무, 긍정과 부정, 양과 질, 현상과 본질, 플러스와 마이너스 등인데, 이런 것들이 자기부정이나 모순에 의해서 스스로 분열되고 통일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그의 변증법에서는 ‘존재’와 ‘무無’가 ‘생성’으로 통일 종합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무가 존재의 자기부정이란 말인가? 또는 존재와 무가 서로 모순 관계란 말인가? 물론 그의 명제 속에는 ‘존재는 무이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긴 하다. 그리하여 철학자들마저도 이 명제에 접하고 어리둥절해 할 뿐만 아니라, 모순율에 대해서도 혼란에 빠지고 있다.
‘존재는 무이다’라는 명제는 불교철학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든가 또는 아인슈타인의 등가공식, 즉 E=mc2에서 보는 것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서 나타나는 물질[色]과 빈 것[空], 또는 에너지[E]와 물질[m]과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빈[空] 것과 에너지[E]는 무無가 아니요, 전환의 다른 한 편일 뿐이다.
불교철학의 반야심경般若心經에는 모든 존재를 무無로 간단히 처리하고 있다. 그것은 본체本體에 초점을 맞춰 겉으로 나타난 형상과 작용 일체를 허망한 것으로 보는 입장의 표현일 뿐,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들 중생을 부처라고 말할 때에는 겉으로 나타난 모양이나 작용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중생 그 자체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존재 그 자체를 무無로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헤겔은 무를 존재의 자기 부정이나 모순으로 처리함으로써 과학성과 철학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그 논리적 조직성에는 경의를 표하면서도 철학성까지는 인정하려들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헤겔은 그의 변증법에서 ‘모순’을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데,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 자신과 모순되는 특정의 다른 것을 동반하고 있다고 보았다. 어떤 것도 자기 자신만으로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물은 언제나 각각이 상호견제 관계에 있는 다른 것과 서로 소멸되고 충돌하며, 그 결과 그 자신에 머무를 수 없게 되어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간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모순’이라고까지 단정짓기에 이른다. 따라서 만유는 그 고유의 모순에 의해 끊임없는 변화에 휩쓸린다고 했다. 과연 그런 것인가?
이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뒤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고, 이어서 유물 변증법에 대해 요약해보기로 하자. 유물 변증법은 헤겔의 관념적인 변증법에 대항하여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1895)가 사용한 방법이다. 사실, 헤겔의 변증법은 존재와 관념과의 대립의 통일이 아니라, 존재를 관념에 환원시킨 관념과 관념의 대립의 통일이었던 셈이다. 헤겔에게 있어서 존재는 사유의 자기부정이며, 자연은 정신의 외화였고, 객관은 주관의 자기 객화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의 반대편 입장에 섰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유보다 존재를 우선시하였다. 그들은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사유를 존재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정신을 인간뇌수의 소산으로 여겼던 것이다. 사유 내지 의식을 떠난 물질운동의 자기모순이 변증법의 기본 동력이라는 것이다.
유물 변증법에서 주로 말하는 존재나 물질이라는 것은 경제적 존재 내지 활동하는 물질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물질적 생산조직이라는 하부구조 위에 정치·철학·법률·교육·종교·예술 등의 상부구조가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부구조인 생산조직의 발전에 따른 모순,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모순을 일으키고, 그것이 바로 의식에 반영되어 관념의 모순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의 의식형태를 규정하며, 사회의 역사적 발전은 결과적으로 물질적 생산조직의 발전 내지 변화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런 모순은 혁명에 의해서만이 통합지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물 변증법은 유물 사관의 논리로, 마르크스 철학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써 사회의 생활현상과 그 역사를 파악한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신의 자기부정으로 물질을 이해한 관념 변증법이나 정신을 물질의 반영으로 해석한 유물 변증법도, 모두 일면적 대립의 통일에 지나지 않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변증법이라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사유가 일방적으로 물질을 규정한다고 보기 어려운가 하면, 반대로 물질이 사유를 일방적으로 규정한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라 했다. 물질과 사유, 사유와 물질은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처럼 상호 대등한 차원에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아래 놓여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변증법은 관념적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유물적이라고만 단정짓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신과 물질, 사유와 존재, 주관과 객관은 서로 대등한 대립의 통일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이처럼 변증법적 대립은 사유의 자기부정으로 성립되는 것도 아니며, 존재의 자기모순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제각각 독립된 사유와 존재와의 대립이어야 하고, 그 통일 역시 절충적인 것이 아니라, 대립을 철저화시켜서 그 긴장을 매개로 하는 상호의 절대부정에 의한 회호回互 전환으로 실현되는 변증법적 종합이야말로 절대 변증법이라는 것이다. 이를 주장한 사람들은 흥미롭게도 서양 철학자가 아니라 일본의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와 다나베田邊元와 같은 동양인들이다. 이들은 물론 음양오행설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절대 변증법은 어떤 의미에서 관념 변증법과 유물 변증법의 종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했다. 정신의 통일성과 물질의 대립성과의 대립적 통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 변증법의 종교적 체관諦觀과 유물 변증법의 혁명적 실천이 결합되는 것이며, 신비적 직관과 상대적 반성이 매개됨으로써 성립되는 변증법이기도 하다고 했다.
변증법에 대한 요약정리는 이쯤 해두고, 이 단계에서 중요하게 지적해두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관념 변증법이건 유물 변증법이건 또는 절대 변증법이건 간에, 정正과 반反, 혹은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는 모두가 상생相生의 짝관계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합合 또는 종합綜合이나 즉자대자卽自對自라는 것 역시 상멸相滅의 일종이라는 점이다.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반은 마치 음양설에서의 음·양이나 전기에서의 플러스(+)·마이너스(-)와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본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짝으로 생기고 짝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가리켜, 필자는 ‘상생상멸’이라 지칭했다. 음과 양,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물론 심지어 소립자의 세계에서까지 소립자들의 쌍생성과 쌍소멸이 증명되고 있지 않는가. 다만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보는 시각과 논리의 전개 내지 분석의 틀이 아닐까 여겨진다.
변증법을 전개한 철학자들도 긍정과 부정, 유와 무, 존재와 관념, 물질과 정신, 주관과 객관, 양과 질, 현상과 본질,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등 숱한 사례들의 상생적인 짝들을 열거하고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만일 이런 사례들을 상생의 짝으로 받아들인다면, 과연 이들이 상호 모순관계에 있거나 자기부정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변증법에서는 이들 사례만을 특수하게 선별적으로 열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일반화시키고 있으므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음과 양, 남과 여, 동물과 식물, 여와 야, 노와 사, 작용과 반작용, 선과 악 등을 두루 생각해볼 때, 과연 이들 짝들이 자기 부정이나 모순에 의해서 생긴 것인가 하는 것이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음이 양의 자기부정이나 모순 때문에 생긴 것일까? 남자가 여자의 자기부정이나 모순으로 생겼다고 볼 수 있을까? 반작용은 작용의 자기부정이나 모순으로 생긴 것일까? 정치권의 야가 여의 자기부정이나 모순에 의해서 생겨난 것일까? 노가 사의 자기부정이나 모순에 의해서 형성되었을까? 이들 상생의 짝들에 대해서, 다시 말해 정립과 반정립의 쌍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생각에 생각을 아무리 거듭해보아도, 그것이 자기부정이나 모순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 같다.
만일 자기부정이나 모순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확정적으로는 말하고 싶지 않지만, 필자가 오랜 기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라는 심증이다. 이것은 자연계에 있어서 나타난 일종의 운동법칙이다. 질점 A에서 B에 힘이 작용할 때에는 B에서 A에도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힘, 즉 반작용이 작용한다는 법칙으로서 이를 가리켜 뉴턴의 운동 제3법칙이라고도 부른다.
이 법칙에서 반작용의 근거는 작용에 있다. 작용이 없으면 반작용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바꿔서 말하면, 어떤 물체에 힘이 작용할 때, 힘은 반드시 쌍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운동의 제3법칙은 힘이 한 쌍으로 나타난다는 힘의 본질적 특성을 규명한 것이다.
참고로 물체의 운동법칙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제1법칙은 관성의 법칙이요, 제2법칙은 가속도의 법칙이고, 여기서 말하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제3법칙이다. 이 제3의 법칙에 의해서 힘의 쌍이 나타나게 되어 있고, 그 쌍으로 표출된 힘은 물질이나 정신세계에서 다 같이 상생의 쌍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아인슈타인의 등가공식에서 보듯이 에너지는 물질로, 물질은 또 에너지로 전환될 뿐만 아니라, 불교철학에서도 물질[色]이 곧 빈 것[空]이요, 빈 것은 바로 물질이라 했으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서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라 했으니,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곳이 따로 있겠는가. 힘이 쌍으로 생긴 원인 그 자체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라 한 것은, 바꿔서 말하면 대다수 쌍들의 생성원인은 바로 이 제3의 법칙이라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운동의 제1법칙이나 제2법칙도 제3법칙의 적용을 받게 될 것이므로, 이 세상 모든 운동은 제3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마음의 움직임이나 정신작용도 운동의 일환으로 볼 때,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많은 의문들이 술술 풀리게 된다.
노勞는 사使의 자본력 작용에 반작용으로 조직된 것이요, 야당 역시 여당의 세력작용에 반작용으로 견제를 위해 형성된 것이다. 반세계화 운동도 세계화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일어난 것이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역시 이기적인 개인주의의 반작용으로 탄생된 것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맞서 반작용으로 태동한 것이고, 반테러 전쟁은 테러의 극성에 맞서 대응키 위해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 아니겠는가. 고부姑婦 간의 갈등이나 친한 사이의 미움과 증오심도 모두가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생성되는 것들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상생의 짝들, 즉 정립과 반정립들 모두가 서로 대립적이기만 한 것인가 하는 데에는 의구심이 든다. 예를 들어, 부부 관계인 남녀도 상생의 짝이지만, 대체로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상부상조의 관계에 있다. 동물과 식물도 상생의 짝이지만, 이들 관계는 일반적으로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노사나 여야, 세계화와 반세계화 운동, 개인주의와 사회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 모두가 서로 토의 내지 협상하고 타협해 서로의 강점을 살리는 동시에 약점을 보완해나갈 수만 있다면, 이들 관계도 전적으로 대립적이라고만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 관계를 사전에 충분하게 연구, 검토해보지도 않은 채, 선입관적으로 ‘모순이다’ ‘자기부정이다’ 또는 ‘대립이다’ ‘상부상조’라는 등 일방적으로 규정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립과 반정립이라는 상생의 짝들이 작용 반작용의 운동법칙에 따라 서로 쌍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것이라면, 우리들의 인식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선악을 분별하고, 모든 것을 2분법적으로 택일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될 줄로 안다.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선택적인 습관에 길들여진 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좋으냐’ ‘저것이 좋으냐’ ‘이것이 내 편이냐’ ‘저것이 내 편이냐’ 하는 등 숱한 선택적인 삶, 그 자체가 인간 비극의 출발이었는지도 모른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려고 습관적으로 노력하는 버릇에서 모든 갈등과 마찰이 생겨났다고 봐야 옳다.
선악이 본래 남녀의 부부관계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생의 짝들이었다면, 그들의 생성 및 상호관계를 ‘자기부정’이니 ‘모순’이니 또는 ‘대립’이니 하여 애초부터 문제를 안고 탄생한 것처럼 접근 내지 인식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요, 잘못된 출발인 것이다. 불교철학에서는 이점에 대해 ‘선악이란 본래 없다’고 분명하게 못박아두고 있다.
네 마음이 어떤 것을 가리켜 허공에 대고 ‘선’이다 ‘악’이다 했을 뿐, 선과 악이란 별개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그런데 모든 것은 동전의 앞뒤처럼, ‘선’이다 하면 ‘악’이 생기고, ‘이것이다’ 하면 ‘저것이’ 생기는 상생의 짝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작용 반작용의 운동법칙 때문에 생긴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반·합의 마지막 과정인 종합, 즉 짝들의 상멸은 어떻게 된 것일까? 부부가 합방하여 자식을 낳고 기른 다음 늙어 사라지듯이, 정립과 반정립이 어떤 형태로든지 만나 협의하거나 상호작용을 거쳐 문제를 해결하든지 또는 새로운 형태의 진화를 거듭해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정’과 ‘반’의 통일에 의한 ‘합’ 내지 ‘종합’이요, 상생 짝들의 상멸인 것이다. 노와 사 그리고 여와 야는 협상을 통해 노임을 결정하거나 정치현안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때로는 양자 간에 의견충돌이 있을 수도 있고, 몸싸움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요 수단인 것이지, 상대편을 없애거나 말살하기 위한 목적론적 투쟁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짝인 상대편이 사라지는 날 자기 자신도 상멸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퇴조하면 자본주의가 더욱 융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반 쇠퇴하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 개인주의가 더욱 극성을 부릴 것 같은데, 현실은 그 반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들 양 축은 상생상멸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와 보수도 서로 상생상멸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어느 한 편의 퇴조는 다른 편의 동반퇴조를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상생상멸은 변증법에서 보는 정·반·합의 변화와 같은 것이요, 이들은 동일한 운동의 다른 관찰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반·합의 변증법은 상생상멸의 또 다른 논리적 전개였던 셈이다.
그렇지만 정과 반 사이에 내재된 것으로 보았던 ‘자기부정’이나 ‘모순’이란 것은 왜곡된 진단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과 반으로 표현된 상생의 짝들이 상호 모순관계가 아니라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했던 유물 변증법에서 모순을 통일, 지양시키기 위해 ‘혁명’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런 착상 자체가 필요 없게 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피비린내 나는 폭력과 살상을 없앨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세계의 여와 야, 기업세계의 노와 사도 마찬가지로 그들 관계가 서로 모순이 아니라면, 극한적인 대결구도를 버리고 토론과 협상을 통해 공생의 길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모순 여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과 반의 상생관계가 작용 반작용의 운동 법칙에 따른 필연적이고도 숙명적인 것이라면, 오히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고, 상호 도와줄 수 있는 반려자의 관계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같은 인식의 전환은 문제의 해결, 즉 종합으로의 지양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상대를 자기부정이나 모순의 결과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동반자로 여긴다면, 훨씬 더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흔히들 “나를 비판하는 사람이 참스승”이란 말을 하는데, 그 비판은 반작용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세계화를 비판하는 세력도 NGO 운동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사측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아낌 없는 비판을 가하는 세력 역시 노동자들이다. 정치권에서도 정부 여당의 독선과 권력남용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쏟아붓는 세력은 다름 아닌 야당의 몫이다. 이때 비판세력을 적敵으로 간주할 것이냐, 아니면 ‘참스승’으로 볼 것이냐 하는 시각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철학자들의 생각과 논리전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 더 짚고 넘어갈 것은 정·반·합의 끊임없는 반복에 의한 진화와 발전은 상생상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소위 정과 반의 대립·모순·통일에 의한 종합으로의 발전과정은 상생의 짝들이 상호작용에 의해 상멸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맺어진 결실은 또 하나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나타나 상생의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생의 짝들이 상멸돼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씨앗처럼 새로운 탄생으로 거듭나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상생상멸은 변화의 발전법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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