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스러운 짝들!
- 허신행 박사(전농림수산부장관, 한몸사회포럼 대표)
사람은 왜 두 개의 맑은 눈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하나나 셋 등의 홀수눈이 아니라 왜 두 개의 좌·우 눈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두 개의 눈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동물들이 마찬가지로 두 개의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여기에는 정녕코 무슨 비밀스러운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하긴 후천적인 애꾸눈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유명한 장군들이 더러 있는 것도 특이롭기는 하다. 우리나라에서 애꾸눈으로 이름을 날린 대표적인 사람은 궁예다. 궁예는 ‘태조 왕건’의 TV 드라마에서 보듯 후삼국을 주름잡던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67년 중동에서 일어난 6일 전쟁의 영웅이자 이스라엘군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왼쪽 눈의 시커먼 안대 보유자, 모세 다얀 장군 역시 애꾸눈이었다. 기원 전 3세기, 포에니 전쟁에서 대 로마군을 격파시킨 카르타고의 용장 한니발 역시 애꾸눈이었다. 그리고 대륙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였고 마케도니아의 왕이자 대전략가요, 용장이기도 했던 필리포스 역시 애꾸눈이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이들 애꾸눈 용장들의 최후가 한결같이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한니발은 자살하였고, 필리포스는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궁예는 친동생처럼 아꼈던 왕건에 의해서 정권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었다. 다얀 역시 말년에는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애꾸눈으로는 불완전하고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류가 쌓이고 쌓여 언젠가 터져버림으로써 비극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비극은 두 개의 또렷한 눈이 필요한 대목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들의 눈은 신비의 대상이다. 구조상으로는 각막角膜·전안방前眼房·홍채虹彩·모양체毛樣體·동공瞳孔·수정체水晶體·후안방後眼房·안구眼球·시신경視神經 등의 순서로 형성되어 있다. 각막을 통과한 빛은 전안방을 거쳐, 렌즈의 역할을 하는 수정체에서 굴절되어, 유리체에 들어가 망막의 시세포를 자극한다. 이 자극이 시신경을 거쳐 뇌에 도달한다. 그럼으로써 ‘보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눈은 빛의 강약 및 파장을 감지하는 기관으로서, 빛을 감수하여 뇌에 시각을 전달하는 빛의 감각기관이라 말할 수 있다.
눈은 단순히 보는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지 않다. “몸이 천냥이면, 눈은 구백냥”이란 옛말을 되새길 필요도 없이,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눈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르고 지낸다.
몸빛깔을 변화무쌍하게 수시로 바꾸는 카멜레온의 경우, 눈을 가리면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물고기도 역시 그들의 눈을 가리면, 어떤 색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겨울 산토끼는 그들의 가죽 빛깔을 하얀 색에서 갈색으로 바뀌게 하는데, 그들의 눈을 가리면 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눈은 몸의 모든 부위를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의사들이 환자의 상태를 살필 때, 눈을 제일 먼저 들여다 보는 경우가 많다. 눈은 피로와 긴장 같은 상태를 가장 민감하고도 정확하게 나타내는 감지기관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눈은 감기나 독감 등에 의해서 발생하는 수종·부종·종창 등과 같은 병의 감지기관이기도 하다. 이처럼 눈은 신체 내부의 상태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질병의 유무까지도 알려주는 일종의 계기판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노련한 의사들은 환자들의 눈상태부터 살핀다.
젊은 사람들의 장래를 점치는 선각자들은 그들의 눈빛을 살피기도 한다. 이처럼 눈은 단순한 시각적인 감각기관으로부터 체내의 반응 감지와 함께 일생을 점치게 하는 등 실로 무궁무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같은 신비의 눈은 ‘지혜의 눈’과 ‘마음의 창’으로까지 불리고 있다. 그런데 왜 두 개의 눈으로 짝을 이루었을까?
다른 동물들도 대부분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유별나게 자기들만의 독특하고 뛰어난 눈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독수리의 경우, 특수한 줌 렌즈 같은 시視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하늘 높은 데에서도 땅바닥에 기어다니는 쥐들까지도 정밀하게 포착할 수 있다.
새들의 눈은 다른 동물들에 비하여 고도로 발달된 색감色感을 가지고 있다. 짝을 찾을 때 깃털의 색상을 중요시한다든지, 빛깔이 좋은 꽃잎을 선호하거나, 때깔 좋은 과일을 찾는 등 여러 가지 징후를 종합해보면, 새들의 눈은 색감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인간과 친숙하면서 지능이 높은 개나 소의 눈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색감을 갖지 못한 색맹이다. 사람보다 무려 16배나 더 좋은 청력聽力을 가진 개는 색감 없는 눈을 가지고도 불편함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른 잡념 없이 풀이나 뜯으며 도인처럼 평화롭게 살아가는 소의 경우에도, 눈의 색감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여하간에 이들 동물 역시 예외 없이 두 개의 밝은 눈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해파리나 달팽이의 눈은 시세포가 집합한 안점眼點으로 되어 있다. 시세포가 늘어서서 잔모양으로 된 며느리우산조개의 눈을 와안窩眼이라 하는데, 이는 빛의 방향까지도 분별해낸다. 전복이나 앵무조개 따위의 눈과 같이 옴폭 패여서 자루같이 된 포상안胞狀眼은 상像을 맺을 수도 있다. 이들 시세포 역시 정밀하게 관찰해보면, 아마도 좌우 쌍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두족류頭足類의 눈에는 렌즈가 있어 도립상倒立像 형성능력은 척추동물의 경우와 거의 같다. 절지동물節肢動物은 수천 개의 개안個眼이 모여서 된 한 쌍의 복안複眼을 가지고 있다. 한편, 척추동물의 눈은 발생학적으로 모두 같다. 이들의 눈은 안포眼胞 또는 안배眼杯의 유도능誘導能에 의하여 머리 쪽의 상피로부터 한 쌍의 렌즈로 분화되어 있다.
유글레나의 안점眼點이나 지렁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단순한 시세포視細胞가 몸 표면에 산재해 있는 산만 광각기관散漫光覺器官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동물들은 사람처럼 두 개의 짝눈을 가지고 있다. 지렁이의 시세포도 전후좌우로 자세히 관찰해보면, 어떤 형태로든지 쌍으로 구성되어 있으리라 믿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왜 짝눈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점은 신비스럽기 그지 없는 현상이다.
사람의 눈은 왜 유니콘[一角獸]처럼 외눈으로 얼굴 상단 가운데에 붙어 있지 않고, 쌍안경처럼 좌우에 두 개로 나누어져서 만들어졌을까? 원근의 초점을 잘 맞추기 위해서, 아니면 보는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 또는 균형감각을 갖기 위해서……. 그렇다면 이 모든 이유들 때문에 두 개의 눈을 갖게 되었을까? 조물주가 그런 이유들을 어떻게 알아서 외눈이 아닌 쌍눈을 달고 태어나게 만들었을까? 이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비스러운 점은 눈뿐만이 아니다. 귀와 콧구멍 그리고 팔과 다리 등도 모두가 한결같이 두 개씩 쌍쌍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나뿐인 것처럼 보이는 입마저도 조심스럽게 찾아보면 항문과 짝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평소 이런 쌍들의 존재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 없이 당연한 것처럼 무감각하게 살아 왔다. 그렇지만 새삼스럽게 눈여겨 보면, 이 쌍들은 신비스러운 대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람의 귀는 왜 두 개씩이나 될까? 복잡한 세상에 하나만 가져도 될 텐데, 왜 두 개의 귀를 가졌을까? 사람의 귀는 청각뿐만이 아니라 평형각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한쪽 귀만 가지고 있다면, 고개가 비뚤어질 것이고, 평형감각마저 잃고 어지럼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귀는 필수적이라고 봐야 한다.
콧구멍은 왜 하필이면 쌍으로 된 두 개일까? 차라리 콧구멍이 편리하게 하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콧구멍은 우선 호흡기능과 함께 냄새를 맞는 후각嗅覺기능까지 담당하고 있다. 콧구멍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였다면, 막히기도 쉽거니와 두 가지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불구로 인하여 콧구멍이 하나된 사람을 보았을 때, 호흡 때문에 입을 항상 벌리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조물주는 이미 두 개의 콧구멍이 필요하고 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콧구멍 역시 신비한 작품이다.
입과 항문은 그렇다 치고, 팔은 왜 또 쌍으로 된 두 개나 될까? 역설적으로 팔이 하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이 손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것의 10분의 1도 제대로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팔 하나가 없는 장애인들의 작업능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팔이 두 개의 쌍으로 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나듯이, 팔은 쌍으로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도 신비한 창조품이다.
다리 역시 두 개의 쌍이 아니었더라면,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우선 사람의 다리가 두 개 아닌 하나나 셋 이상으로 만들어졌더라면, 직립하여 지금처럼 편하면서 빠르게 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다리가 하나라면, 하나뿐인 장애인들을 보더라도 얼마나 불편한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조물주가 어떻게 이런 이치를 모두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쌍으로 된 다리에 대해서 감사한 생각이 든다. 이 또한 신비스러운 창조물이 아닐 수 없다.
신비스러운 짝현상은 우리 인간의 몸구성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남자와 여자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생의 짝으로서 태어난 작품이다. 조물주가 왜 남자만 만들든지 아니면 여자만 창조하든지 하지 않고, 복잡하게도 남녀를 암수 짝으로 빚어냈는지에 대해 알 수가 없다. 남녀를 서로 다르게 만든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복잡하고도 정교한 일인데, 조물주가 왜 그처럼 어려운 창조과정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그 이면에는 그 만한 무슨 까닭이 분명코 있었을 것이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동물과 식물도 상생의 짝으로서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식물은 동물에게 산소와 먹을거리를 제공해주는 데 비해서, 동물은 식물에게 이산화탄소와 거름을 공급해준다. 벌, 나비 같은 동물은 식물의 교배交配를 도와주고 먹이를 얻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동물과 식물은 서로 상부상조하며 공생의 관계를 맺고 사는 짝인 셈이다. 이것 또한 신비한 관계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관심을 넓혀가다보면, 더 놀라운 짝들에 직면하게 된다. 우주만유의 기본 속성을 내비친 음陰과 양陽도 짝이요, 전기의 플러스와 마이너스도 짝이며, 걸핏하면 잘 싸우는 정치권의 여당과 야당도 짝이다. 임금결정 시기만 오면 앙숙처럼 서로 갈등을 빚는 노동자와 사용자 측도 짝이다. 일의 추진에서 항상 마찰을 일으키는 진보와 보수도 짝이고, 이데올로기의 격전을 불러일으켰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도 짝이다. 최근 세계적인 갈등을 빚고 있는 세계화와 반세계화 운동도 서로 상생의 짝관계에 있다.
짝현상은 물질세계에서뿐만이 아니라 의식 내지 인식의 정신세계에서도 예외 없이 일어나고 있다. 좋다와 나쁘다, 달다와 쓰다, 행복과 불행, 선과 악,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긍정과 부정, 성공과 실패, 생과 사, 강함과 약함, 희망과 절망, 귀함과 천함, 밝음과 어둠, 뜨겁다와 차갑다, 시간과 공간…… 끝없이 이어진다. 개념 자체가 상대적이기 때문에 짝 없는 개념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 만유가 짝세계로 조성되어 있는 것 같고, 인간의 인식작용이나 정신세계도 예외 없이 상생의 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물질과 정신세계에서 짝 아닌 예외를 찾기란 대단히 어렵다. 이런 짝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원리처럼 보인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파란태양 > 허신행을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위대한 동양철학 <음양학에 관한 완전 정복> (0) | 2011.12.12 |
---|---|
[스크랩] 마주 싸워 둘이 죽거나 서로 도와 함께 살거나 (0) | 2011.12.12 |
[스크랩] 우린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보고 있어! (0) | 2011.12.12 |
[스크랩] 열린 세상에 문닫고 살지 말라 (0) | 2011.12.12 |
[스크랩] 생각의 속도로 움직이는 세상 (0) | 2011.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