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몸부림과 이데올로기
- 허신행(경제학박사, 전농림수산부장관, 한몸사회포럼 대표, 기흥구 거주)
서울 매봉산에 올라 아침운동을 하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다.
7m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고 몸뚱이도 가는 푸른 애벌레 한 마리가 2m가 넘는 높이의 나뭇가지에서 몸을 던져 실을 빼내며 그 줄을 타고 땅바닥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험이요, 곡예인 셈이다. 자기 몸에서 밧줄을 만들어낸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줄에 몸을 맡기고 자기 키의 3백 배가 넘는 고층 빌딩 같은 데서 뛰어내리는 용기도 대단하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땅바닥에 닿은 다음 그 애벌레는 다시 그 밧줄을 감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라는 사실이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어디 애벌레뿐이겠는가. 개미와 벌, 다른 모든 곤충과 크고 작은 짐승들, 동물이란 동물은 모두가 각자 나름대로의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노력한다. 때로는 몸을 불리고 근육을 강화시키는가 하면, 달리기를 연습하고 이빨이나 발톱을 예리하고 튼튼하게 만들기도 하며 자기 몸 속에 독을 만들기도 한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체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개발하고 진화시키는 동물들의 처절한 노력과 몸부림은 인간에게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따지고 보면, 35억 년 전의 미약한 박테리아 세포로부터 출발하여 오늘의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이 삶의 몸부림이요, 진화의 긴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라. 먼지보다 작은 하나의 세포가 인간이나 코끼리 그리고 사자처럼 크고 강한 동물로 성장·발전해나오기까지의 노력과 몸부림의 연속이 얼마나 이어졌겠는가. 작은 세포 속에 유전자 정보를 만들어 저장시켜온 것을 비롯해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축적하고 축적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피나는 진화를 상상해보건대, 그 처절한 몸부림을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는 있을 것이다.
깊은 바다 속 벌 구덩이에서 원시적인 박테리아 세포가 낯설고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한단계 한단계 삶을 전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장하고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물론 새로운 진화의 개척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체의 희생과 고통이 따랐겠지만, 모두 다 죽지 않고 생명의 끈을 잇고 이어 35억 년이란 긴긴 시간 동안 장족의 눈부신 발달을 거듭해왔다는 것은 바로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이런 연약한 생명체들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최초의 동물로 성장·발전한 때가 불과 7억 년 전쯤이라니, 35억 년 가운데 28억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삶의 몸부림이 이어졌겠는가. 눈물과 땀을 쥐어짜며 아무리 추리해봐도 그네들의 시련과 역경 그리고 비애를 어찌 다 상상하며 이야기로 그려낼 수 있을까.
바다 속에서 아주 작은 피라미 같은 척추동물이 생겨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5억 년 전쯤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살기 위해 척추를 만들어내기까지의 노력과 고뇌 그리고 삶의 몸부림은 얼마나 많았을까. 척추라는 버팀목의 뼈가 없이는 힘도 못 쓸 뿐만 아니라 몸무게를 늘릴 수도 없었기 때문에, 천적과의 싸움이나 도피생활에서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뼈를 만들 궁리를 해 냈겠으며, 그것도 몸 전체를 지탱시켜줄 수 있는 척추라니, 참으로 놀라운 진화요, 삶의 몸부림이라고 본다.
작은 척추동물들은 그래도 물 속에서 살기 어려웠다고 한다. 대형 포식자들이 무서운 턱과 이빨로 이들을 먹이로 삼고 밤낮 없이 사냥을 해대니, 물 속에서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 작은 척추동물은 쫓기다 쫓기다 결국 물 밖으로 나가기로 모험을 선택한 것이다. 뭍에는 먹을 것도 별로 없고 공기와 온도도 적합하지 못했겠지만, 물 속에 있으면서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뭍으로의 이민이야 형용할 수 없는 시련이었을 것이다. 물 대신 공기를 마시려면 허파도 개발해야 했을 것이고, 온도조절 기능도 발전시켜야 했을 것이다. 산양들이 먹이 많고 살기 좋은 평원을 떠나 험준한 바위산 꼭대기를 안식처로 삼은 것은 결국 포식자들로부터 죽임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작은 물고기 같은 척추동물들도 메마르고 먹을 것은 별로 없지만, 우선 천적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육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련과 역경은 발전의 원동력이요, 새로운 환경에로의 적응노력과 필요성은 창조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이들 척추동물의 진화속도는 물 속에 남아 있는 강자들보다 더욱 빠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것이 세상의 아이러니요, 흥미로운 드라마와 같은 대목이라 여겨진다. 약하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으로 밀려나거나 쫓겨날 수밖에 없었고, 그 고난의 악조건이 이들로 하여금 강해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스승의 역할로 변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2억 년 전에는 포유류 동물로 변하고, 1억 년 전에는 드디어 최초의 영장류靈長類로 탈바꿈하는 영예로운 우위를 점하게 됨으로써 지구촌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될 행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행운의 길에서 그들은 3천5백만 년 전에 원숭이로 진화되고, 2천만 년 전에는 사람과 비슷한 가슴과 팔 그리고 복잡한 뇌를 가지고 간단한 도구까지 제작해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인원類人猿으로 진화를 거듭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1천만 년 전에는 대형 영장류로, 최초로 서서 걸을 수 있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4백만 년 전에 진화됐다고 한다.
사람으로 진화해나온 유인원들은 다른 동물들에 비하여 특별히 손을 잘 썼다. 딱딱한 열매를 깨거나 풀뿌리를 파내고, 또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기 위해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손놀림이 다양해졌고, 동시에 뇌도 발달하게 되었다. 유인원 상호간에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점차 많이 느끼게 됨에 따라 언어능력까지 향상되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최초의 사람 종에게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솜씨 좋은 사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들은 2백만 년 전에 동아프리카에서 출현하였던 것이다.
호모 하빌리스는 1백60만 년 전까지 좀더 강건하고 몸집이 큰 종으로 진화하였다. 이들은 더 큰 뇌와 더 우수한 도구 제작기술을 가지고 두 발로 서서 활동하였다. 이렇게 한단계 더 진화된 종을 가리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두 발로 선 사람)라 부른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열대지방을 떠나 아시아·인도네시아·유럽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또 1백만 년 전에는 아시아로 그리고 40만 년 전에는 유럽으로 이동, 정착하였다.
원시인류는 돌도끼와 돌창으로 동물들을 사냥하였다. 그들은 동굴 속에서 사냥한 고기를 불에 구워 먹었고, 동물가죽을 몸에 두르며 추위를 막았다. 어린아이들의 양육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가족을 형성, 유목민의 씨족과 부족을 이루었으며, 인간문화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마을을 조성하였다. 이들은 맹수나 외적을 막고 일을 함께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무리를 지어 사냥을 했으며, 먹을거리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
마을의 씨족이나 부족들이 일정한 장소에서 공동으로 자고 먹을 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식물을 채취하고 공동으로 사냥하며 맹수나 외적도 공동으로 막아내면서 서로 돕고 서로 대화하며 살아가는 공동생활이야말로 인간의 문화를 낳게 하는 촉매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호모 에렉투스는 25만 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현명한 사람)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들이 오늘날의 우리 인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시 크로마뇽인으로 진화하였는데, 이들은 해부학적으로 오늘의 우리와 거의 동일하다. 이들은 충분히 발달된 언어를 가지고 있었고, 보다 향상된 기술과 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미술적인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됐던 것으로 보인다. 돌과 뼈를 깎아 만든 뛰어난 도구들, 조개껍질과 상아를 이용한 장신구, 동굴벽에 그려놓은 우수한 그림들로 보아서 현생인류의 초기 구성원 문화치고는 매우 정교한 편에 속한다.
인류는 이같은 진화과정에서 경제적으로도 큰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수십만 년에 걸친 고대의 원시사회에서 인간은 석기시대를 거치면서 수렵과 채집 그리고 어로漁撈 등 소위 ‘획득경제獲得經濟’를 일차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전기 구석기 시대에는 타제석기打製石器와 불을 사용하여 사냥한 동물을 해체하고 불에 구워 먹는 방법을 썼다. 이 단계에서는 야생식물을 채집하고 또 야생동물을 수렵하며 물고기도 잡는 등 주로 자연으로부터 먹을거리를 획득하는 가장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경제활동을 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단계의 경제적인 특징을 한 말로 집약한다면, 천연 ‘자원주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자연으로부터 먹을거리를 획득하는 것이 가장 주된 경제행위였기 때문이다.
천연 자원주의 시대에 인간은 주로 식물이나 동물의 부존자원에 따라 이동하면서 먹을거리를 획득하였다. 나뭇잎이나 열매 또는 부드러운 식물줄기나 카사바 같은 나무뿌리 등을 채집하여 먹을거리로 삼았다. 한편, 주변에서 서식하는 들짐승이나 산짐승들을 수렵하여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였다. 강가나 바닷가에서 고기도 잡아먹었다. 이같은 천연자원이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면서 먹을거리를 획득하고 살았기 때문에, 자원이 삶의 원천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간을 천연 ‘자원주의’ 시대라고 말해도 하등 어긋날 것이 없다.
지금도 지구촌의 깊은 오지奧地에서는 이런 원시 유목민들의 천연 자원주의 사회를 엿볼 수 있다. KBS 2TV의 ‘도전 지구탐험대’ 프로그램을 보노라면, 남미의 아마존강 유역 깊숙한 곳에서는 일부 원주민들의 원시적인 삶을 확인할 수 있다. 맨손으로 풀과 열매를 따고, 먹을 수 있는 나무줄기와 뿌리를 채집하며,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원주민들의 변하지 않는 원시적인 생활상에 접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이외에도 아프리카의 오지라든가 미얀마·라오스·태국의 삼각주 깊은 산 속에서 생활하는 유목민들은 우리 현대인들로 하여금 타임 머신을 타고 수만 년 전으로 여행을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들의 삶 속에는 자산의 소유개념이라든가 생산양식이 없고, 판매행위나 저장가공 등의 유통도 없다. 자고 먹고 부족들과 함께 채집하거나 사냥을 해서 공동으로 나눠 먹는 단순 반복적인 삶의 연속이 있었을 뿐이다. 주변의 천연자원이 부족해지면, 가족들이 거적을 싸서 이고 지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정처 없는 유목적인 삶이 있을 뿐이다. 천연 자원에 따라 떠돌아 다니는 삶, 그러하기에 이들 원시인들은 천연자원주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다.
천연 자원주의적인 획득경제는 주로 석기시대 내내 이어져온 것으로 보인다. 좀더 구체적으로 구분하면, 석기시대는 3기, 즉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로 나누어지는데, 천연 자원주의적인 획득경제는 중석기 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추리된다. 이 시대의 석기를 보면, 주먹도끼·다면석기多面石器·역기礫器·톱니석기·천공기穿孔器·첨두석기尖頭石器·투창끝·세석기細石器 등 다양하다. 그렇지만 이런 석기로 인해서 이들의 수렵생활에 어떤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석기의 개발로 인해서 획득경제를 다소 편리하게 보낼 수는 있었을 것이다.
석촉石鏃이나 골제 단도 등을 만들 수 있었던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획득경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비록 날카로운 돌로 만든 것이긴 하지만, 원시인들이 화살이나 칼을 만들어 사용하게 됨으로써 주어진 천연자원 가운데에도 더 많은 채집과 수렵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자연자원 속에서 한단계 발전된 도구로 인하여 더 많은 채집과 수렵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자원에 따라 잦은 이동을 하지 않아도 필요한 먹을거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도구의 발달은 일정한 장소에서 원시인들의 정착기간을 늘릴 수 있도록 촉매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변화는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靑銅器 시대時代와 철기鐵器 시대時代에 접어들면서 더욱 빠른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거치는 동안, 편리한 농기구들이 하나씩 하나씩 새롭게 개발됨에 따라 천연 자원주의적인 획득경제, 즉 채집과 수렵을 중심으로 한 원시사회가 서서히 지나가고, 이어서 목축과 농경을 주축으로 하는 농경사회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신석기나 청동기로 만든 농기구들을 이용하여 나무를 베어내고 농경지를 만들었으며, 그위에 농작물을 재배함과 동시에 야생동물들을 훈치시켜 가축화하는 등 새로운 농경문화를 이루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열대우림지대熱帶雨林地帶에서는 BC 6000년 경에 벌써 구근류球根類가 재배되고, 한서寒暑의 차가 심한 건조성 초원에서는 BC 4500~BC 4000년에 보리류의 곡물이 재배되어 인도·중앙아시아·중국의 황하강 유역·북아프리카·유럽 등지로 확산돼나갔다. 그후 북방의 한랭지역에서는 귀리와 호밀이,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옥수수가, 동남아시아의 온대 평지에서는 감자류와 벼가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청동기 시대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긴 하지만, 유럽과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대략 BC 3000~BC 500년 사이에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가 공존했던 지역도 많고, 지역에 따라서는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철기 시대로 바로 진입한 경우도 있다.
운철隕鐵이 이집트에서 장신구나 단검류로 사용되던 때가 BC 3000년대라고 하지만, 대량생산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값도 비싸서 귀금속처럼 취급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철을 다루는 기술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아르메니아 지역과 소아시아 서부지역에서 연철鍊鐵을 목탄木炭으로 가열시키고 망치로 두드리면서 탄소와 화합시켜 강철鋼鐵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BC 15세기 경이었다.
그후 민족의 이동경로에 따라 강철이 확산되기 시작, 메소포타미아에는 BC 13세기 경에, 이집트에는 BC 12세기 경, 인도에는 BC 10세기 경, 이탈리아에는 BC 9세기 경, 중국에는 BC 4세기 경, 그리고 한반도에는 BC 4~3세기 경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 시대부터 원시 유목민들이 양지 바른 산비탈이나 평야 지대에서 정착하여 사는 기간을 점차 늘려가면서,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에 진입하여 보다 나은 농기구를 개발하면 할수록 농경문화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농기구의 개발에 비례하여 농경문화가 더욱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쟁기라든가 괭이·호미·낫 등의 농기구가 발전함에 따라 더 넓은 땅을 더 깊게 갈고 경작을 하는가 하면, 초지를 만들어 목축을 하는 등 정착된 농경생활을 더욱 진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농기구의 발달에 의해서 천연자원이 아니라 논과 밭 그리고 목초지 등 농경지 면적을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따라서 부富가 결정되었다. 그러니까 농경지 면적의 크기는 바로 부의 규모와 직결된 셈이다. 그 결과, 농지에 대한 소유개념이 생겨나고 생산 양식의 발전과 함께 저장시설이 만들어지고 물물교환 제도도 형성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더 편리하고 더 효율적인 농기구들이 속속 개발되었으며 생산력이 증대되고 식량이 풍부해짐에 따라 집과 의복 등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농지가 중요해지면 중요해질수록 농지를 빼앗기 위한 싸움이나 전쟁이 빈발하게 되고, 이웃 부족이나 국가의 영토를 빼앗은 영주領主들이 농민들에게 농지를 나눠주되, 주종主從의 관계를 맺고 봉토수수封土授受를 통해 통치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일종의 봉건제도封建制度를 확립하게 된다. 경작에 필요한 일손의 확보를 위해 생겨난 농노제農奴制나 노예제는 모두 이 시대의 유산이기도 하다. 이런 농경시대를 한말로 표현할 수 있는 특징을 찾는다면, 그것은 단연코 ‘농지주의農地主義’라고 말할 수 있다. 농지가 부富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얼마나 많은 농지를 갖느냐에 따라 부富의 규모가 결정되는 농경사회야말로 생산요소로서 농지 이외에 더 중요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농지를 둘러싼 갈등과 마찰, 싸움과 전쟁 등은 농경문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주封主와 봉신封臣, 영주와 노예, 지주地主와 소작小作 관계 등이 이 시대의 독특한 주종문화를 낳게 만든 것들이다.
목축업을 주축으로 삼았던 서양에서는 새로운 토지를 찾고 개척하기 위해 개척문화가 싹튼 데 비하여, 아시아 몬순 지대에서는 벼를 중심으로 한 경종농업을 주축으로 삼음으로써 논과 물관리에 치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중요시 여긴 유교가 아시아 몬순지역에서 발흥될 수 있었던 것도 경종농업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불교가 인도에서 생겼지만, 서구사회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아시아 몬순지대의 경종농업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조용하고 사색이 깊은 이 지역 농경문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도교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답작 중심의 농경문화에서 인간 내면의 세계를 깊숙이 파고 든 도교가 어쩌면 더욱 안성맞춤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농지주의적인 농경문화라는 것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얼마나 많이 그리고 깊숙이 영향을 미쳤던가를 되새겨보게 만든 대목이다.
농경사회라고 해서 연못 안의 고인 물처럼 변하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정체돼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면 될수록, 농민들의 소득이 증대되면 증대될수록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택이나 각종 시설은 물론, 다양한 생활도구를 비롯해 온갖 공산품들이 새롭게 개발 내지 생산되어갔다. 다양한 농기구의 개발은 필연적인 것이고, 수송수단과 가공시설, 저장창고와 판매시설은 물론 양조장이 생기고 신발공장이 세워지며, 제지공장과 방직공장이 들어서는 등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농지에서 생산해낸 먹을거리 이외에 인간이 필요로 하는 기초 필수품을 생산해내는 곳은 초기엔 물론 가내공업이었다. 의복이나 신발도 간단한 공구나 기계도 대부분 가내공업의 형태로 생산된 것들이었다. 옛날 보부상褓負商들이 이고 지고 팔러 다녔던 상품들을 보면, 의복류·짚신·가죽신·갓끈·빗·바늘·분가루·농기구 등이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 시골의 5일장五日場에서 주로 거래되었던 상품이라는 것도 농림수산물 이외에는 의복류·고무신발·소금·농기구 등을 비롯해 소수의 필수품에 한정되었다. 가내공장에서 이런 생필품들이 생산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농지주의적 농경사회의 근본을 뒤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이 일어나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전기 모터가 개발되는 등 기계의 사용에 의한 대량생산 체제 내지는 생산의 자동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사정은 급격하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상업자본과 값싼 노동력 그리고 세계적으로 뻗어나간 시장 등 여러 가지 성숙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다른 나라에 앞서 산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특히, 면제품에 대한 수요의 증대와 교육열기의 고조에 따른 지식 및 기술혁신이 함께 어우러져 대량생산 체제를 낳게 되었다. 인간은 먹을거리를 해결한 다음에는 입을거리를 먼저 챙긴다. 농경사회에서 먹을거리를 해결하였다면, 다음 사회에서는 입을거리부터 선호하게 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산업혁명이 방직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출발이었는지도 모른다.
증기기관에 의한 동력의 채용은 기계공업·제철업·석탄업·운송업 등으로 빠르게 확산되어나갔다. 여기저기에 다양한 공장이 들어서고, 생산시설이 즐비하게 늘어서며, 원료가 들어오고, 제품이 실려 나가는 등 제조업의 성장발전은 눈부시게 일어났다. 다른 국가들도 뒤질세라 앞을 다투어 산업화에 힘썼다. 벨지움과 프랑스는 1830년대에, 독일은 1850년대에,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에 산업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에, 우리나라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에 산업혁명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을 보면, 참으로 흥미롭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던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경제의 중심은 농림수산업 등의 1차 산업에 있었고, 농촌인구가 약 6할 정도, 가내공업과 5일장, 빈약한 자본과 기술, 낮은 교육수준과 높은 문맹률로 온 국민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 국민들은 허름한 옷에 초가집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료는 나무로 충당되고, 교통과 통신은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앞날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마저 엿보이지 않았다. 전통적인 농경사회, 후기 농경사회의 침체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막막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외자유치로 산업화를 향해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수출 주도형의 공업화’를 외치고 가벼운 기계나 신발, 의복 등의 경공업을 우선적으로 육성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농촌에는 새마을 공장이 들어섰으며, 주요 공업단지에는 중대형 공장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비료공장이 연이어 만들어지고, 방직공장들이 늘어났으며, 다양한 경공업 제품들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농촌인구가 도시로 공장으로 빠져나갔으며, 도로가 확장되고, 고속도로가 생겨났다. 주택이 개량되고, 대형 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기 시작하였다. 소비 대중은 소위 3C(에어컨·냉장고·자동차)의 구매활용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1969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농어촌 인구가 전체인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른 한편, 1973년부터 제조업 부문의 생산액이 농림수산업 부문의 생산액보다 많아지기 시작한다. 이때가 바로 우리나라는 4천 년간의 긴 농경사회를 마감하고, 드디어 산업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게 된다. 산업사회란 바로 농지 대신 자본이 주류를 이루는 ‘자본주의’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자본이란 인간이 만든 모든 생산요소를 총칭하는 말이다. 토지·노동·자본의 3대 생산요소 중에서 토지와 노동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생산요소가 자본인 셈이다. 자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생산기계이다. 그러니까 공장의 기계설비는 말할 것도 없고, 생산과 유통에 동원된 일체의 시설 및 장비·저장창고·운송수단 그리고 가공된 원료와 재료 등을 모두 망라하여 자본이라 볼 수 있다. 자원주의적인 원시사회나 농지주의적인 농경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자본이란 존재하지 않던 생산요소인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2차원적인 생산요소가 바로 자본이요, 그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사회가 산업사회이다.
인간이 걸어온 경제사적 발자취를 한 말로 요약하면, 자원주의 시대로부터 농지주의 시대를 거쳐 자본주의 시대로 이행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인 변천사로 보면, 원시사회로부터 시작하여 농경사회를 거쳐 산업사회로 진입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점은 중심 경제력의 이동이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인 부富의 원천이랄 수 있는 중심요소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원시사회에서는 천연자원이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였는데, 그것이 농경사회에서는 농지로 바뀌었고, 산업사회에서는 자본으로 다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위적인 변화가 아니라 자연적인 변천이다.
이쯤 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되물어보고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점검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이데올로기’란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이 왜 원시사회나 농경사회에서는 일어나지 않다가, 하필이면 산업사회에서 크게 부각되었던 것인가? 그러면 산업사회 이전에는 이데올로기란 과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데올로기란 국어사전에 보면 인간행동의 기본이 되는 근본적인 사고思考 또는 관념형태觀念形態로 요약되어 있다. 정치·사회에 관한 기본적인 사고나 사상경향도 이데올로기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생존해가는 과정에서 시대와 여건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인간행동의 기본이 되는 근본적인 사고 내지 사상경향을 가리켜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그렇다고 하여 개별적으로 생각하는 인간행동의 기본적인 사고가 아니라, 어느 한 사회에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집단적인 사상을 두고 부르는 말이다.
인간행동의 기본이 되는 근본적인 사고 내지 사상은 주로 인간들이 보다 잘 살아보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삶의 몸부림 속에서 일어나는 집단적인 생각의 응축으로 형성되는 사상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사실 자본주의란 이데올로기는 어느 학자나 선각자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라 봐야 한다. 후에 사회주의 사상가들에 의해서 자본주의란 개념과 이름이 붙여진 점만을 눈여겨 봐도, 자연발생적이란 추리는 옳다고 생각된다.
공산주의란 이데올로기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의해 규명 내지 제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보고 경제적으로 약한 많은 사람들이 이심전심으로 공산주의적인 발상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할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필자의 저서 《상생상멸의 원리》에 상세하게 정리해둔 것처럼 음양이나 남녀와 같이 상생의 짝으로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누가 그렇게 이름을 붙이건 붙이지 않건 간에, 산업사회를 맞이하여 자본이 가장 중요해져서 사람들의 행동이 그것을 추구하는 대세로 나타나는 순간부터 자본주의란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싹트게 되고, 그에 반작용으로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역시 동시에 싹트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칼 마르크스나 엥겔스 같은 다른 학자들은 어쩌면 사후적인 관찰이나 개념의 정리 내지 이론의 확산 역할을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데올로기란 학문적으로 규명되거나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떠들어댄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생길 때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스스로 자리잡고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개방화도 그렇고 세계화도 그렇다. 이에 반작용적으로 맞서 일어난 보호주의와 반세계화 운동 역시 상생의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어느 선각자나 학자들이 주창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로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따라 달라지는 지구촌의 변화추세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이라 여겨진다.
우리가 이데올로기라 말할 때,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제3의 길 같은 것들만이 아니라고 본다. 이론적으로 구명되었건 되지 않았건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라 부르건 부르지 않건 관계 없이 이데올로기, 즉 인간행동의 기본이 되는 사고는 형성되게 마련이다. 바꿔서 말하면, 인간행동에 영향을 주는 근본적인 사고나 관념형태 모두가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그 대표적인 것은 바로 종교이다.
기독교나 회교 및 불교 등 세계적인 종교는 물론 토속적인 신앙도 따지고 보면, 중요한 이데올로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특히, 회교를 추종하는 극단주의자들의 경우, 이데올로기는 대단히 강하다고 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유태인들의 경우에도 그들이 믿고 따르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철통같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데올로기 중에서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만큼 오래 가고 견고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종교전쟁은 백 년 이상 간다고 했지 않았던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유태인들을 비롯한 중동의 종교적인 이데올로기 분쟁은 2천 년 이상 지속돼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데올로기는 삶의 몸부림 가운데 하나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알게 모르게 나타나는 것이고, 개인들에게도 중요한 가치관의 일환으로 자리잡거나 행동계율로서 드러나기도 한다. 우리들이 흔히 생활철학이니 가훈家訓이니 하는 것도 광의로 해석하면, 모두가 이데올로기의 부스러기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인간은 크고 작은 이데올로기들에 의해서 움직이고 행동한다고 봐도 무리는 없다. 경제학에서 사람은 모두가 합리적이란 전제를 세우고 이론들을 전개한다. 합리적이란 바로 사고나 사상의 합리성을 뜻하는 것이요, 그런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서 경제행위가 일어나고, 세상이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세계에만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을 것 같다. 아프리카의 대평원에서 풀을 뜯는 누우라는 들소떼들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없는 것일까? 누우 행동의 기본이 되는 근본적인 사고가 없다면, 철 따라 대륙을 이동하는 누우떼의 대행진은 없을지도 모른다. 분업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일을 처리하는 개미떼나 벌떼 집단에게도 행동의 기본이 되는 근본적인 사고, 즉 이데올로기가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유추해볼 때, 산업사회의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비추어 농경사회에서는 확실히 농본주의 내지는 농지주의 또는 토지주의라 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대다수 구성원들의 가슴 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에 봉건주의가 파생됐고, 농노라든가 노예제도가 생겨났으며, 토지를 빼앗기 위한 숱한 영토분쟁 내지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전쟁이 빈발했던 것이다. 토지의 중요성에 대한 사상 없이는 그런 역사가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다만, 학자들이 그런 기본사상의 중요성을 연구하여 부각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나 문헌적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것뿐이다.
모두가 다 비슷하게 생각하거나 부정의 여지 없이 옳다고 믿으면, 그것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처럼 상생의 양 칼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데올로기는 학자들의 관심을 모으게 되고 자연히 시끄러워짐으로써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게 되는데, 농경사회에서 농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다른 견해나 부정의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고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원시사회에서는 천연자원이 가장 중요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원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신봉했을 법한데도, 훗날 학자들이 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그런 사고 내지 사상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원시사회나 농경사회는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학문적인 관심거리도 되지 않았거나 또는 학문의 발달이 별로 없었던 상대적으로 전근대적인 사회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이데올로기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있고, 어느 집단 어느 개인에게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이 학문적으로 규명되고 인정되었건 안되었건 간에 우리 인간은 크고 작은 이데올로기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고, 그에 의해서 얻는 것도 많지만, 반대로 쇠사슬처럼 얽매이고 잃는 것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이런 이데올로기, 즉 자원주의`→``농지주의`→``자본주의의 기본질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질서나 이데올로기를 모색하여 삶의 질을 높여야만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농지주의와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은 벌써 혁명적인 대안의 모색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 대안모색은 무엇이고, 앞으로 우리 인류는 또 어떤 이데올로기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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