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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아드반-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별을 사랑해야 한다

* 이 소설은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난 직후 내려진 휴교령으로 오갈 데 없을 때

쓴 것이다. 나는 당시 대학 3학년생으로 스물세살이었다.

휴교령이 풀릴  때까지 이 소설과 <목불을 태워 사리나 얻어볼까 - 깨달음의 노래, 해탈의 노래>, 그리고 38년째 출간하지 않은 소설 <밀라레빠의 탑>을 더 썼다.

앞의 두 책은 1982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이후 몇 번 더 출간하다가 현재는 디지털북으로 출간하고 있다.

눈 감고 되돌아보면 가장 그리운 시절이다.

 

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별을 사랑해야 한다

- 아드반(原題)

 -1992년판

어느 날 꽃이 만발한 화원에 갔어요. 맑고 밝은 꽃빛에 취해 거닐었지요. 그러다가 꽃을 한 송이 따려고 손을 뻗다가 그만 선 채로 깜빡 잠이 들었어요. 그러고는 꿈을 꾸었어요. 제가 따려던 그 꽃이 꿈이었나 봐요. 그래요, 한 송이 꿈이었어요. 그런데 붓다는 이 꿈을 <꽃경(華嚴經)>이라고 부르십니다

 


1. 이 길로 가라

 

강 언덕에는 계절없이 피어나는 꽃들이 물빛처럼 투명한 색깔을 머금고 그윽한 향기를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강물은 안개 속으로 쉬임없이 흘러들어갔다. 동자는 강 가의 풍경에는 아랑곳없이 깊이 잠들었다. 바람도 향기도 물결도 꽃빛도 그를 깨우지 못했다.

언덕 너머엔 잔가지를 무수히 늘어뜨린 큰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숲 너머에는 짙푸른 초원이 깔리고, 초원 너머에는 모래뿐인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하늘을 떠받쳤다.

잿빛옷을 두르고 은빛머리에 긴 수염을 늘어뜨린 할아버지가 잠든 동자를 살짝 추슬러 가슴 께로 끌어안았다.

할아버지는 우거진 풀잎과 늘어진 나뭇가지를 헤치며 숲 속으로 들어갔다. 활엽수림의 넓고 긴 잎사귀들이 강바람을 받아 흔들릴 때마다 잠든 동자는 눈꺼풀을 움찔거리며 가녀린 손으로 허공을 저었다.

숲을 지나 초원에 이르자 할아버지는 동자를 푸른 풀밭에 가만히 뉘였다. 아홉 살 순백의 살갗이 햇빛에 반짝인다. 잠을 자면서 새근거리는 평온한 숨소리가 잔잔히 들려온다. 숲이 우거지고 물이 넘쳐나는 이 평화로운 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모래폭풍이 입을 벌리고, 전갈과 뱀이 우글거리는 사막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상관이 없는 듯이.

할아버지는 동자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눈앞에 까마득히 펼쳐진 사막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바람이 사막을 온통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날뛰고 있다. 바람은 이따금 모래더미를 하늘 높이 끌어올려 여기저기 기둥처럼 세웠다가는 이내 흩뿌렸다. 초원과는 너무도 다른 곳이다.

할아버지는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땅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 눈에 보이는 물체나 귀에 들리는 소리는 다 거짓이니 결코 속지 않아야 마지막에 너 자신을 보리라. 모래알, 꽃 한 송이, 구름 한 조각, 새 울음소리, 이 모든 게 다 너를 이끌기 위한 하늘의 속삭임이니 두려워말라.

할아버지가 미처 손을 거두기도 전에 사막 저 편 하늘에서 커다랗고 우르릉 천둥치는 듯한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존자여, 그대가 쓴 글을 모두 지워라.”

그때 동자가 부스스 일어나 땅바닥을 성급히 고르고 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할아버진 누구야? 무얼 지우는 거야?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동자는 눈을 뜨자마자 갑자기 맞닥뜨린 낯선 세계에 놀랐다. 더구나 귀가 멍멍하도록 울린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히 여운을 남겼기 때문에 동자는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몽롱하다.

잘 잤니. 도담아?”

, 내 이름도 알아?”

알고 말고.”

그래, 어디서 본 듯한 할아버지야. 그렇지만 기억이 나질 않아.”

사막을 건너기 전에는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한다.”

내가 왜 여기 있어?”

나도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모른단다.”

에이, 시시해.”

동자는 은빛 날개를 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푸르고 너른 풀밭 위에서 뛰어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동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초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동자의 뒤를 따라 뒤뚱뒤뚱 달려갔다. 동자는 넘어지기도 하고 구르기도 하면서 통통한 다리로 땅을 차며 달렸다.

할아버지. 여기야, 여기.”

할아버지는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글썽이며 동자를 따라 뛰었다. 할아버지는 동자와 함께 초원과 숲속을 이어 달리면서 긴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새 지친 할아버지는 숨을 헐떡거리며 나무 그늘에 풀썩 주저앉았다.

할아버진 벌써 지쳤어?”

그래. 너는 안 지쳤단 말이냐?”

에이, 저 숲에 들어가면 맛있는 과일도 많고 예쁜 꽃도 많을 텐데... 하지만 할아버지가 안 가면 나도 못 가는 거지 뭐. 혼자서는 심심해.”

할아버지는 동자가 혼자서는 심심하다고 하는 말에 퍼뜩 와 닿는 슬픔을 느끼고 벌떡 일어섰다. 이보다 더 크고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이 동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수천 년도 더 되었을 만한 거대한 나무 밑으로 가서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작은 열매를 따 주머니에 담았다. 새까맣고 딱딱한 그 열매들은 고목나무 밑둥에서 나온 큰 가지에 듬성듬성 달려 있었다.

어느덧 숲은 강물에 비친 붉은 노을로 물이 들었다. 푸른 풀잎도 나뭇잎도 온통 단풍나무처럼 붉게 물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동자의 얼굴에도 빨간 노을이 번졌다.

할아버지는 동자를 데리고 초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막을 향해 길을 가던 존자는 문득 발을 멈추고 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동자야. 여기를 보아라.”

할아버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모래를 잔뜩 뒤집어 쓴 작은 나무가 거의 말라 죽을 듯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사막이다. 저기 해가 지는 곳을 향해 길을 떠나라. 천주라는 동자가 맨처음 너를 맞이할 것이다. 임금들의 임금인 그 동자는 너에게 사람이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가는지 알려줄 것이다. 그 의지의 허상을 너는 보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말에 동자는 어리둥절하였다. 동자의 귀는 토끼처럼 쫑긋 서고, 눈은 동그랗게 긴장되었다. 동자의 얼굴에도 두려움과 놀라움이 떠올랐다. 석양을 등진 동자의 얼굴에 슬픔이 왈칵 솟았다.

가다가 배가 고프면 이걸 물에 불려 먹고.”

할아버지는 열매 주머니를 동자의 허리에 매달아 주었다. 그리고 동자의 등을 밀었다.

이 길로 가라!”

동자는 재빨리 돌아서서 할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동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할아버지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동자야,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르잖니?”

그래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할아버지잖아. 내 앞에 있는 할아버지잖아.”

그렇구나. 하지만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이란다. 우리의 길이 이곳에서 잠깐 마주친 것뿐이란다.”

싫어. 혼자서는 무서워. 혼자서는 외로워.”

할아버지는 눈물 한 방울을 똑 떨어뜨렸다.

동자야. 어느 누구나 다 제 길을 가야 한단다.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네가 가야할 길은 아니란다. 나와 너는 다른 사람, 길도 다르다. 우리는 헤어질 만큼 충분히 같은 길을 왔으니 이제 헤어져 각자 자기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할아버지는 하늘만 망연히 바라보면서 동자에게 말했다.

길을 가되 믿음을 갖고 용기있게 나아가야 한다. 길은 언제나 너의 스승이 되어 귀한 가르침을 줄 것이다. 너의 길을 향해서 떠나라. 이 길이 너의 길이다.”

존자는 동자의 등을 다시한번 밀었다.

길을 처음 떠날 때에는 아무도 그 길을 알지 못한다. 이 세상 누구든 다 그렇게 길을 떠났단다. 필요한 것은 용기 뿐이다.”

이윽고 동자는 발을 떼기 시작했다. 체념이 작은 용기로 변한 것이다.

동자는 한걸음 한걸음 사막을 향해 길을 갔다. 동자의 작은 발이 모래 속에 푹푹 빠져들었다.

할아버지는 어깨를 들썩이며 걸어가는 동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강기슭을 향해 돌아서서 무거운 걸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고개를 떨군 채 돌아선 할아버지의 등 뒤에서 마침내 터져 버린 동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자의 북받쳐 오르는 절규는 할아버지의 가슴에 큰 슬픔을 쏟아부었다.

갈 거야. 갈 거야. 할아버지가 가라는 데로 갈 거야.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기어이 갈 거야. 이 사막을 건너고 말 테야.”

동자의 눈물이 모래 위에 군데군데 떨어져 모래알을 뭉쳤다. 동자의 곁을 지나는 바람이 작은 소매자락을 펄럭이며 저 만큼 물러섰다.

동자가 울다 뒤를 돌아다보니 할아버지는 모래알 같은 작은 점이 되어 있었다. 그마저도 곧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