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파란태양/전원 이야기

암탉에게 지다

전원 이야기 | 2008/04/24 (목) 17:25
 
우리집 암탉의 시위가 보름 넘게 계속되었다.
알을 품겠다고 둥지에 누워 통 나오질 않는다. 강제로 나오게 하면 조금 돌아다니다가 도로 들어가곤 했다.
알을 빼앗아 낸 게 서너 번이다. 그러다 이것도 귀찮아 둥지를 다른 데 만들어주어 이 암탉이 알을 품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이 암탉은 알도 없는 둥지에 쪼그리고 앉아 도무지 나오질 않는다. 그런 지 열흘이 됐다. 모이조차 안먹으며 버틴다. 알을 줄래, 아니면 날 죽일래 이렇게 협박하는 것같다. 
 
이미 두뇌가 부화 명령을 내려 호르몬이 축축하게 내려온 모양이다. 그걸 참으라고 할 수도 없고, 동네 할머니한테 알 두 개를 교환하자고 했는데 그 집 닭들도 죄다 쪼그리고 앉아 있어서 새로 낳은 알이 없단다. 근친을 근본적으로 막아보려 했는데 알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어제 아침 알 하나를 꺼내다 부화용이라고 챙겨 놓았는데, 누가 발견하고는 홀랑 부쳐먹었다. 잘하면 부화되어 생명으로 살아갈 뻔했는데 그만 후라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 새 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그걸 넣어주었다. 근친 위험을 줄이기 위해 늙은 달걀(큰 것)을 두 개 넣어주었다. 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아주었는데, 두어 시간 뒤 가보니 안보인다. 그새 끌어다 품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오늘로부터 21일째 되는 날, 병아리가 부화될 것이다. 제발 수탉 병아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
부화 예정일은 5월 14일인데, 17일에 첫 병아리가 나왔다. 그런데 19일까지도 나머지 알 하나가 부화되지 않는다. 육안으로 봐서는 아무렇지 않은데 어쩌면 곯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넣은 알은 두 개인데, 지금 암탉이 품고 있는 알은 부화된 병아리 말고 모두 세 개다. 나 몰래 어느 암탉인가 그리 들어가 두 개를 더 낳아둔 것이다. 그러니 나머지 두 개의 부화 예정일은 모른다. 하나만 있으면 껍질을 까보든지, 만져가며 살필 텐데 어느 놈이 진짜 알이고, 어느 놈이 갑자기  끼어든 알인지 몰라 그럴 수가 없다. 어떻게 될런지 모르겠다. 병아리 한 마리는 오늘 어미를 따라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둥지로 돌아갔다. 계란만한 병아리를 보면 생명의 신비가 절로 느껴진다. 한 세상 살아보겠다고 나왔는데, 그 바늘구멍 같은 확률게임 끝에 가까스로 태어났는데 이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더 안타깝다.

'파란태양 > 전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닭들, 분양하다   (0) 2008.12.14
잡초 잘 뽑는 법   (0) 2008.12.14
AI, 우리집 마당을 넘보다   (0) 2008.12.14
동백꽃 필 때마다  (0) 2008.12.14
입춘을 맞은 텃밭   (0) 2008.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