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녀’를 쓰지 않나
내가 쓰는 글 어디에도 ‘그녀’라는 단어는 잘 나오지 않는다. 이런 경우 말고는 말이다.
고전이나 일본 때를 묻지 않은 초기소설을 보아도 역시 ‘그녀’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은 남녀 평등의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영어처럼 곳곳에 ‘man'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하여튼 우체부도 남성위주 표현이라 하여 집배원으로 바꾸고, 사회 곳곳에서 남녀평등 어휘를 쓰는 세상에 왜 ‘그녀’를 고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까지 백여 권에 가까운 책을 집필했는데, ‘그녀’를 쓰지 않고도 곤란을 느끼지 않았다.
아울러 웬만하면 ‘그’라는 대명사조차 잘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난 젊은 작가들이 제 어머니, 제 할머니를 가리켜 ‘그녀’라고 하고, 이모를 가리켜 ‘그녀’라고 하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가리켜 ‘그’라고 하는 것 역시 부담이 된다. ‘그’라는 것은 한자어에서도 그렇게 썼듯이 주로 남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쪽은 ‘차(此)’고 저쪽은 ‘피(彼)’가 되는데, 여기서 ‘그’란 ‘피’와 같은 말이다. 그러니 아버지란 어휘를 백번 써야 한다면 백번 아버지라고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그’라고 해서 아버지를 남으로 만들 이유가 없다. 남의 아버지라면 몰라도.
하여튼 나는 이렇다.
* 안성에서 자라 안성에서 공무원하는 내 친구 안동준은 "그니"란 어휘를 쓴다. '그 여자'를 가리키는 경기 방언이다.
* 고등학교 시절 쓰던 영어사전 중에 누군가 용감하게 She를 '그미'로 번역한 데가 있었다. 당연히 사라졌다.
* 일제 시대 작가들 중(양주동, 김동인 등)에는 궐자(厥者)를 써서 남성을, 궐녀(厥女)를 써서 여성을 가리킨 사람도 있으나 역시 사라졌다.
* 친일 소설가 김동인이 일본 유학 중, 일본인들이 He를 번역한 彼를 그, She를 번역한 彼女(일본발음 가노조)를 쓰는 걸 보고, 그와 그녀로 베껴 쓰기 시작하고, 친일작가들(이광수 등)이 환호하여 아무 생각없이 이 어휘가 자리를 잡았지만 언젠가는 없애야 할 어휘라고 생각한다. 우리말 어휘에서 이처럼 조잡하게 만들어진 사례가 드물다. 그남이 안되듯이 그녀도 안된다.(나는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에서 그녀가 쓰이기 시작한 때를 문학동인지 창조 발간 시점으로 보고 1919년으로 특정했다.)
* 우리말에는 '그이'라는 통일된 3인칭 대명사가 있었다. 성 구분없이 쓴다. 다만 그이는 입말이자 어른만 쓰는 어휘여서, 문어로 쓸 때는 그라고 쓰면 된다.
* 남성에게는 아버지, 할아버지, 아저씨 하듯이 그이라고 하고, 여성에게는 어머니, 할머니 하듯이 그니라고 하자는 주장이 있다. 그니는 그이를 가리키는 경기도 방언이다. 그리고 이 논리에 함정이 있다. 남성이게 '-이'가 붙고 여성에게 '-니'가 붙는다는 주장도 틀린다. 아주버니처럼 남성에게도 니가 붙고, 누이처럼 여성에게도 이가 붙는다. 논리 모순이다.
* 나는 '소년'도 여성, 남성을 포함한다고 본다. 굳이 소녀를 따로 쓸 것같으면 소남이어야 하는데, 그럴 것없이 소년으로 통일해 쓰는 게 좋겠다.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 적극적인 친일 소설가 김동인(왼쪽), 1919년 2월 토쿄에서 그가 주도하여 만든 동인지 창조. 일본에서 두 번 발간되었는데 여기에서 김동인은 일본어 彼女를 '그녀'로 베껴썼다. 오늘날 이 친일작가는 친일언론인 조선일보에서 제정한 <동인문학상>으로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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