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 대다수가 대략 10만원(당시 소득 기준)으로 한 달을 살던 1970년대 무렵, 급여가 20만원만 돼도 사람들은 잘 산다고 생각했다. 100만원이 되면 부유하다고 믿었다. 부유하냐, 가난하냐의 기준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기초노령연금에서는 이런 기초적인 인간 심리가 배제되었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
박근혜(대통령 호칭 써야 하나 글 흐름상 생략)는 국정원 댓글 사건 이후, 말하자면 집권 이후 민주당과 벌인 정치 싸움에서 연전연승했다.
1차전 / 노무현이 김정일에게 NLL 포기했다는 의혹, 민주당 전전긍긍하다 소강 상태.
2차전 / 전두환, 노태우 추징금 관련 이슈 점화, 결국 두 사람 모두 추징금 완납.
3차전 / 이석기 의원 내란 음모 사건 수사 시작.
4차전 / 전 국정원장 원세훈을 선거법으로 기소한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 의혹 보도 후 감찰, 결국 사표수리.
이상의 전적만 놓고 봐면 화려하기 짝이 없다. 국민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외로이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대들이 왜들 저리 슬퍼하는지 알지 못한다. 4부작 정치 드라마에 홀딱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는 전투에서 몇 번 이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지막 전면전에서 누가 이기느냐로 결정짓는 것이다. 상대 수도를 점령하든지(청와대 입성), 깃발을 빼앗아야(국회 다수당) 이기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벌어진 4차전은 전투이지 전쟁이 아니다. 전쟁은 내년 지방선거, 그리고 그 다음 총선과 대선이다.
며칠 전 5차전이 시작되었다. 채동욱 총장 사표가 수리된 마당에 이젠 이슈가 시들해질 것이기 때문에 이 이슈를 옮겨탄 듯하다. 채동욱은 유전자 감식을 해도 손해고 안해도 손해라면 무리해가면서 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더럽혀진 인생, 국민들이 잊어주기만 기다려야 한다. 설사 유전자 감식을 해서 친자가 아니라 해도 그땐 국민들이 다른 드라마를 보고 있을 것이므로 이슈조차 되지 못한다.
-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박근혜
그럼 5차전은 무엇인가. 바로 기초노령연금이다.
박근혜는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의 기초노령연금을 주겠다고 지난 대선 운동 기간 중 공약했다. 덕분에 그는 65세 이상 유권자의 몰표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 전쟁에서 박근혜는 패배할 것으로 보인다. 간단하다. 김상곤 경기교육감의 무상급식 논쟁을 되씹어 보면 답이 나온다.
경기도 교육감 김상곤은 2009년 우리나라 최초로 의무교육을 받는 모든 학생에게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선언했다.(여기서 고등학교는 빠지지만 유권자들은 잘 모른다.)
그러자 한나라당 및 경기도지사 김문수는 저소득층 중심의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나섰다. 심지어 하위 70%까지 끌어올려서 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면서 이건희 손자까지 무상급식할 필요가 없다고 강변했다.
이때 김상곤 측은 급식으로 사람 차별하느냐면서 역공했었다. 이 말만 놓고보면 부자들을 대변한 것이지만, 사실은 중산층을 대변한 말로 귀에 들려왔다.
이때 저소득층, 부유층은 급식 문제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저소득층은 어차피 무상급식받는 중이므로 상관이 없고, 부유층은 돈 내거나말거나 그까짓 4만원 푼돈으로 신경쓸 까닭이 없었다. 문제는 '4만원도 의미 있는' 중산층이었다. 중산층은 혹 자기 자녀들이 이 경계선에 잘려 무상급식을 못받는게 아닐까 우려했다. 이 우려를 김상곤이 확실하게 공약해버린 것이다.
결국 중산층의 열화같은 지지를 받은 김상곤은 경기교육감 초선, 재선에 잇따라 성공하고, 서울에서는 곽노현이 이기고, 한나라당의 저소득층 중심 무상급식을 주장하던 오세훈은 결국 정계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번 기초노령연금 확대도 마찬가지다. 71세인 이건희 회장이 지금 노령연금 20만원을 받을까 못받을까 고민할 가능성은 0.0%다. 즉 부유층의 관심사가 아니다. 또 현재 9만원 가량 받는 소득 하위 70%인분들은 어차피 20만원으로 올려받을 것이니 이렇든 저렇든 기초연금법안이 어서 통과되기만 기다릴 뿐이다. 투표한 갚으로 받는 돈이니 새삼 고마울 것도 없다.
그러고 나면 역시 중산층만 남는다. 그것도 잘 사는 중산층이 아니라 월급 받아 간당간당 먹고사는 계층이고, 유권자 중 가장 넓은 대역에 분포돼 있는 사람들이다. 현재 노인만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노인이 될 50대, 40대가 난리다. 기초노령연금을 국민연금에 연동하다보니 알량한 국민연금 좀 받는다고 기초노령연금을 15만원이나 13만원으로 줄이겠다는 것 아닌가. 액수로 치면 5만원, 7만원 적은 돈이지만 기분 문제다. 한국인처럼 기분에 왔다갔다하는 유권자에게는 1만원도 흥분할 일인데 무려 7만원이라니. "꼬박꼬박 연금냈더니 도리어 기초연금을 깎아?" 이러면서 반발할 것이다.
1차 반발은 임의가입자들이다. 이들은 법안이 통과되기 무섭게 국민연금 납부를 중지할 것이다. 소득이 없어도 국민연금을 내던 사람들이 일제히 사라지고 나면, 뭐 그만이다. 남은 사람은 직장에서 급여를 받거나 세금 납부하는 자영업자들인데, 이분들은 안낼 수가 없다. 강제법이니 어쩔 수 없다. 기분만 나쁘다. 이 사람들이 반발하는 유일한 길은 선거에서 반새누리 후보에 투표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박근혜가 지는 것이다.
-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
기초노령연금의 족보를 살펴보며 다시 정리해보자.
이 연금제도는 노무현 정부의 작품이다. 2007년부터 준비되어 2008년 2월 29일부터 시행된 것으로, 노무현의 건전한 대못 중 하나다. 노인이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여 온 점을 고려하여 생활이 어려운 노인에게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함으로써 노인의 생활안정을 지원하고 복지를 증진함을 목적으로 전격 시행된 것이다. 노무현은 국민연금 평균 수급액의 5%로 시작하여 10%까지 늘리겠다고 법을 만들었지만 사실상 재정이 어려워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노인들말로 차비 정도나 대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명박 정부는 4대강 하느라 바빠 슬그머니 눈감고, 박근혜 후보가 전 노인 계층에 20만원씩 주겠다고 통큰 약속을 해버린 것이다. 선거 때야 마구 어음을 끊어도 되지만 막상 대통령이 되니 이를 결제해야 하는데, 재정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연금과 연동하여 차등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65세 이상으로서 소득 하위 70% 노인은 약 9만원 가량의 기초연금을 받고 있다. 이게 20만원으로 늘어난다. 그런데 국민연금과 연동하다보니 국민연금 장기가입자들은 손해를 볼 수 있게 돼 있다. 새누리야 안주던 거 주는데 뭐가 손해냐고 하겠지만, 이유가 뭐든 남보다 덜 받는 건 기분 더러운 게 평균 인간의 기본 심리다.
이 부분이 석연치 않으면 다음에 치러질 선거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다. 소득 상위 30%야 한푼 안받아도 아무 불만이 없다. 문제는 중산층들이 5만원 내지 7만원 정도 연금을 덜 받게 된다는 점이다. 노인만 불만이 아니라 40대, 50대의 성실한 국민연금 가입자들까지 불안한 것이다. 그러니까 박근혜는 노무현, 이명박보다 연금을 더 주면서 욕을 먹게 돼 있는 구조로 된 것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할 수 있는 꼼수로는 이런 게 있다. 어차피 <모든 노인에게 20만원 준다>는 말은 거짓말이 됐고, 공약 실천이 어렵다는 건 국민이 더 잘 안다. 그래도 남보다 덜 받는 건 싫은 게 인간의 기본 심리다. 그러니 간단한 방법이 있다. 일단 80세 이상 노인에게는 무조건 장수연금이라고 하여 20만원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래놓고 70세 이상에게는 소득 하위 70%에 무조건 20만원씩 주는 것이다. 국민연금 연동하지 말고.
그래놓고 65세에서 70세 사이에는 현행대로 가는 것이다. 또 장기적으로는 노인 기준을 70세로 바꿔서 65세 이상 70세 미만에게는 기초 노령연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65세라면 자신들은 한창 젊다고 믿는 분들인데, 노인이라고 부를 때마다 기분 상하는 계층인데 이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도 괜찮다. 그러면서 정년 연령을 70세 정도로 늘려준다든가, 이 계층의 일자리를 집중 생산하든가 하면 된다.
계산을 해보면 이쪽이 훨씬 안정적이고, 욕을 덜 먹는다. 박근혜는 노무현보다 더 주겠다면서, 실제로 더 주겠다는데도 국민들은 싫어한다. "왜냐고? 왜 난 쟤보다 덜 받냐구." 이해되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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