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부친의 몸은 비록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그 정신은 조선국이 망하는 그날까지 시퍼렇게 살아 있을 것이오. 지금도 조선의 국왕인 내 가슴에 펄펄 뛰는 이 심장처럼 살아 계시거든. 조선의 설계자로서 영원히 말이야. 조선이라는 이름도 그이가 지으셨고, 경복궁이며 사정전, 근정전 같은 궁내 모든 전실 이름도 삼봉이 지었지. 동서남북의 크고 작은 성문도 남대문은 숭례문, 동대문은 흥인문, 서대문은 돈의문, 북대문은 속청문이라고 지으셨지. 도성 안 5부 49방의 이름도 모두 그이가 지었었어. 정사, 경제, 율령, 모두 그이가 정하셨지.
내가 참말로 삼봉을 미워한다면 왜 그런 이름들을 그대로 두며, 그가 지은 책들을 왜 이 나라의 방향타로 삼겠는가. 그이가 정한 대로 불교를 걷어치우고 유학을 숭상할 것이며, 재상 정치를 높여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겠네. 날 의심하지 말게. 난 그이가 이름을 지어준 근정전에서 정사를 보며, 그이가 이름을 지어준 강녕전에서 잠을 자네. 영원히 그 이름을 바꾸지 않을 걸세. 내가 만약 진심으로 삼봉을 역적으로 여긴다면 어찌 그가 이름 지은 근정전이며 강녕전에서 정무를 보고 편히 수리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난 삼봉에게 떳떳하다네. 난 삼봉의 진짜 후계자라네. 요동만 빼면 말이야."
진심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 정도전을 참으로 역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버지가 만든 제도, 명칭 등 숱한 것들을 왜 그대로 두었으랴. 『조선경국전』, 『감사요약』, 『경제문감』 세 권은 조정에서 그대로 쓰이고, 한양 도성의 문루를 비롯한 궁전과 궁문의 모든 명칭, 도성 내 49방 이름까지 모두 아버지 정도전이 일일이 지은 것인데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고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순간순간 애석한 장면마다 가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은 이방원의 반란군에 의해 역적으로 낙인 찍혔지만, 자손대대로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은 정도전에 대한 왕실의 묵계에서 출발한다. 또한 조선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중대한 순간이었지만, 그에 비해 빈약한 기록의 빈틈을 찌르며 전개된다. 소설적 상상력이 더해졌겠지만, 구구절절마다 소름이 아니 돋을 수 없다.
철저하게 계획되고 설계되어 건국된 나라가 조선이다. 그러나 그런 조선은 외세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폐망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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