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세월이 흐르는대로 같이 흘러간다.
그러다보니 어제까지 쓰던 뜻은 어디 가고 오늘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1995년 사무실을 갖고 있을 때 우리 직원이 어떤 필자에게 화사하다는 표현을 썼다가 혼쭐이 났었다.
그분은 1970년대초 이화여대를 다니신 분인데, 당시 화사하다는 말은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이런 뜻이었단다.
말뜻은 사실 옳고 그름이 없다. 다수가 쓰면 그게 답이 된다. 나도 여기에 무슨 말이 맞고, 뭐는 틀리고 가려 쓰고는 있지만 그게 꼭 답은 아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말 중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어휘를 몇 개 모아봤다.
- 먹거리와 먹을거리
난 '먹을거리'를 쓰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 '먹거리'로 쓰는 경우가 많다. 세력이 팽팽한 듯하다. 결국 발음이 자연스러운 '먹을거리'가 이기지 않을까.
- 달걀과 계란
나는 어려서 달걀이라고만 쓰고 계란은 한자어라고 하여 일절 쓰지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 계란이란 어휘가 더 쓰이는 것같다. 결국 발음 문제가 아닌가 싶다. 계란이 이길 것같다. 나도 요즘 부지불식간에 계란이란 어휘를 더 많이 쓴다.
- 육이오전쟁과 한국전쟁
이 어휘 싸움은 사실 묘한 배경이 있다. 반미하는 사람들이나 좌파 성향의 인물들이 주로 한국전쟁을 선호하는데,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한국전쟁이라고 쓰는 사람들이 엄청 늘었다. 육이오전쟁이란 어휘는 기념일이나 돼야 들어볼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육이오전쟁이 결국 이기지 않을까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은 대개 날짜나 간지를 넣어 부르는 게 습관이 돼 있기 때문에 이쪽이 더 부르기 쉬울 것같다.
- 우연하다와 우연찮다
우연찮다는 틀린 어휘지만 쓰는 사람들이 줄기차게 늘고 있다. 아마 그 시원한 발음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연하게'보다 '우연찮게'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더 강한 표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연하지 않게'의 준말이지만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것같다. 하긴 '안절부절못하다'를 '안절부절'이라고만 써도 요즘에는 뜻이 통하는데, 이건 정말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겠다.
- 드러나다와 밝혀지다
잘되고 좋은 것은 밝혀지다가 맞고, 잘못된 것이나 숨긴 것은 드러나다가 맞는데, 이것 역시 싸우는 중인 것같다. 특히 다매체 시대에 들어서면서 기초 실력이 부족한 기자들이 대거 마이크나 펜을 잡으면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놈들은 틀리는 줄도 모르고 자신있게 쓰기 때문에 전파력이 더 강하다.
- 장본인과 주인공
이 역시 다매체 시대의 지식이 좀 부족한 기자들이 만들어 놓은 싸움이다. 장본인은 나쁜 일을 한 사람, 주인공은 좋은 일을 한 사람으로 구분이 되는데, 가끔 마구잡이로 쓰는 기자들이 많다. 결국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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