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이 중학교 3학년이라 요즘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 과목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기억력이 좋은 아이 같으면 뭐라거나 말거나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못하다 보니 하나하나 이해를 해야 진도가 나간다. 그런데 시도때도 없이 질문을 해대어 무슨 일인가 하여 교과서를 들춰보았더니, 어떤 놈들이 이런 교과서를 썼는지 참 나쁜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이 나쁜 게 아니라 어휘가 나쁘다. 분명히 알아들을 만한 우리말이 널려 있건만 왜 이 교과서 저자놈들은 저만 아는, 혹은 학술지나 논문에나 나오는 어려운 한자 어휘를 멋대로 써갈겨대는지 정말 모르겠다. 국어교육은 교육부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저는 저 배운대로 어려운 한자어 마구 섞어써서 학식을 자랑해보겠다는 심보인지는 모르겠는데, 참 나쁜 놈들이다. 이 교과서 저자놈들이 이렇게 된 것은 비단 그들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굳이 너그럽게 이해를 해주자면 무식해서 그렇다. 즉 제 분야나 잘 알지 언어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보니 이렇게 된 것같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한글전용시대 아닌가. 옛날 내 시대처럼 옥편을 통째로 외우거나 5천자나 만 자를 외워보겠다고 몸부림하는 시절이 아니잖는가. 앞서도 썼듯이 한자를 모르고 쓰는 우리말 한자어는 암호문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영어 어휘를 배우느라 고생인데, 그 쉬운 우리말을 하자는 데도 꼭 영어처럼 죄다 새로 외워야 하게 됐다.
나는 책을 읽을 때 혁명이라는 말을 보면 革命이라고 머리속에서 한자어가 떠오른다. 교과서 저자놈들도 비슷한 연배일 테니 마찬가지일 것이다. 방적기, 방직기 두 가지가 나와도 그 차이를 나는 쉽게 안다. 한자어가 금세 떠오르기 때문이다. 면직물이라고 해도 안다. 구축함이라고 해도 알아듣는다. 내연기관이라고 해도 금세 뜻을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딸은 전혀 모른다. 이걸 번역해서 말해주고, 그걸 외우라고 다시 시켜야 한다. 이게 얼마나 큰 낭비인가. 그럴 바에야 영어로 가르치지 이럴 이유가 없다.
오늘도 "편재가 뭐야? 지역 편재가 심한 게 뭐냐고 묻는데?" 한다. "한 곳에 치우쳐 있는 것이란다"라고 설명해주니 그제서야 "석유를 말하는군." 하고 알아듣는다. 처음부터 "어느 한 지역에 많이 나는 것은?"이라고 물었으면 이런 번역 과정 없이도 우리 딸이 답을 알았을 것이다. 이게 뭐하는 짓이냔 말이다. 차라리 영어로 시험문제를 내는 게 낫겠다. 아깝게도 일요일 오전을 딸 사회책에 나오는 한자어 해석해주는데 다 써버렸다. 단지 어휘만 해석해주면 알아듣는 걸 이게 뭐냔 말이다. 내용을 설명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해석해달라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내 딸같이 평범한 아이도 말뜻만 알려주면 내용은 다 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우리말과 글을 사랑한다면 쉬운 말을 자꾸 써야 한다. 논문이라고, 저술이라고, 시험이라고 굳이 어려운 말을 써야 권위가 서는 게 아니다. 이미 한자는 우리 생활에서 비켜나 있다. 그렇다면 한자를 쓰지도 못하고 그냥 발음만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려 한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다. 지식인들부터 자주 쓰지 않는 한자어를 사용하지 말고, 쉬운 우리말로 바꿔 쓰는 노력을 해야 한다. 교수, 판검사, 고위 공무원들이 저희들 어려서 한자 공부한 생각만 하고 자꾸 어려운 한자를 일부러 골라 쓰는데, 크게 잘못된 것이다. 훗날을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무심코 쓴 글이 불과 몇십년 뒤에 마치 지금 읽어보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독립선언문"을 읽는 것같을 것이다. 독립선언문을 쓴 사람들도 세상 변할 줄 모르고 '자에 아 오등은..." 그렇게 쓴 것이다.
내 주장이 틀리다고는 말하지 말기 바란다. 김용옥 식으로 건방지게 말하자면, 난 웬만한 교수들보다 한문을 더 잘하지만 안쓰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다.
-----------------------------------
신문보면서 몇 군데 적어보았다. 이따위 언어생활을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느니 차라리 외국어를 가르치는 게 효율적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 상감마마 원기 회복엔 타락죽이 최고
- 한국인 인질 적신월사에 넘겨
- 침략과 저항의 도식은 가능한가
- 해에게서 소년에게
- 모두 발언해주세요
- 25년간 봉직해왔습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참 답답한 마음이 든다. 물론 한국인은 웬만큼 우리말 공부를 해야 되지만, 안써도 되는 말을 이렇게 쓰니 아이들이 더 힘들어 한다. 한자도 안쓰고 타락죽이라고 하면 대체 뭔줄 아는가. 이 기사를 읽어보니 기자놈도 타락죽이 뭔지 모르는지 끝내 안나온다. 나처럼 한자를 아는 사람은 눈치껏 '아, 낙타젖을 말하는군.' 하고 넘어가지만 아이들이 어디 그럴 수 있는가. 최남선이 쓴 해에게서 소년에게도 그렇다. 저 해가 하늘에 떠있는 해인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저 해는 바다다. 바다 해를 한자 없이 멋대로 적은 것이다. 게다가 문법도 일본어 문법이다. 그래서 친일파 작가들의 해악이 은근히 무섭다. 아직도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고 하잖는가. 그런 말은 우리말이 아니다. '내가 살던 고향'이든지 다른 표현을 찾아야 한다.
'이재운 작품 > 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선인과 당선자 (0) | 2008.12.16 |
---|---|
기자들의 돈 계산법 (0) | 2008.12.16 |
신사임당이 아니라 사임당 신씨다 (0) | 2008.12.16 |
중국 지명 인명 표기에 대한 내 생각 (0) | 2008.12.16 |
확포장 개보수? (0) | 2008.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