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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

채제공 뇌문비를 보면서 <우리말>을 위로하다


어제 저녁 6시경, 내가 식중독으로 밥을 못먹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살뜰한 친구들이 전복죽을 사주겠다 하여 밖에 나가 기다리다 위의 표지판을 보았다.


채제공선생뇌문비?

(영어로) 채제공의 기념비?

채제공이 그림을 그렸나?


한자 가르쳐야 우리나라가 살고, 한자 안가르치면 얼마 못가 망할 거라고 악담 퍼붓는 '한자중독자'들의 게거품이 잠시 생각났다. 뇌문비를 한글로 적나 한자로 적나 못알아 먹기는 똑같다. 어차피 사전 찾아야 알 것같으면 한글 뇌문비를 찾는 게 빠르지 한자 誄文碑를 찾는 건 귀찮고 따분하다. 옥편 뒤져 언제 文을 찾겠는가. 부수 찾고 쭈욱 내려가며 뒤적거리면 나오기는 나온다. 또 옥편은 낱자로 돼 있지 단어로 나오질 않는다. 낱자를 찾아 들어가야 단어가 나온다.(물론 쉬운 방법이 있다. 대부분의 한자 중독자들이 갖고 있는 일본어대사전을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일본어 못하는 한국인이라 일본어대사전을 갖고 있지 않다.)


여기서 잠깐, 한글전용론자들에게도 한 마디 서운한 걸 적는다. 무조건 한글로만 적으면 되는 줄 착각하고 한자어를 한글표기로만 적는 것 역시 또다른 폭력이다.


오늘 잘 아는 스님이 페이스북에 공청회 자료를 동영상으로 올려주었는데, 발표하는 교수들이 '부처는 홈리스였다.' 부처는 이노베이터였다'고 말하는 걸 듣고 동영상을 꺼버렸다. 난 이런 데서 딱 걸리면 한 걸음도 더 못나간다. 좋은 우리말이 많은데 굳이 쓸 필요가 없는 외국어를 쓰는 건 지식인들이 저지르는 죄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뇌문비란, 임금이 지은 제문을 새긴 비석이다. 그러니 <채제공 선생의 뇌문비>라는 설명은 틀렸다. 채제공 기념비라는 영어 번역은 얼토당토 않다. 채제공은 뇌문을 쓴 적이 없다. 주어와 목적어도 모르는 이들이 갖다붙인 엉터리 제목이다.


정확히 적자면 <정조 이산이 채제공 선생을 기리며 쓴 글>이라고 하면 된다. 글을 돌에 새겼으니 비라고 해야겠지만 그건 설명으로 덧붙여도 된다. 돌이 서 있으면 비석이지 굳이 거기에 비라고 붙일 이유가 없다.

<정조 이산이 쓴 채제공 선생에게 보낸 편지>라고 하면 종이에 썼는지 비단에 썼는지 가죽에 썼는지는 설명으로 보충하면 된다. 중요한 건 정조 이산이 채제공의 생전 공덕을 기리는 조문을 썼다는 것이다. 이 조문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채제공의 무덤 옆에 돌을 세워 새겨놓은 것이다.


*** 나는 여기서 굳이 제문을 뇌문이라고 쓰는 사람들의 의식을 인정할 수가 없다. 제문은 굳이 한글로만 적어도 아, 죽은 사람을 기리는 글이구나 알 수 있지만 뇌문은 사전을 찾아봐야 한다. 게다가 더 자주 쓰이는 뇌문(雷門)이란 한자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정조 이산이 채제공을 뭐라고 찬양했는지 궁금해서 원문을 찾았다. 하지만 문화재를 담당하는 경기문화재연구원이나 기타 어디든 서체는 해서체요, 비석의 크기가 어떠니, 재질이 비대석은 화강암인데 비신은 오석이니, 가로세로 어떻다느니 소재지가 어디니 하는 잡다한 정보만 나온다.

<경기도문화재연구원의 채제공 뇌문비 해설>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 마디로 정조 이산의 제문 내용이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냥 뭔지도 모르고 뇌문비가 있다, 이 정도로 자랑만 하고 끝이다. 링크조차 안걸어준 걸 보니 원문은 본 적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용인시를 검색해봐도 무덤 오르는 돌계단을 정비했다는 등 역시 엉뚱한 보도자료만 늘어놓는다.


한 가지 더, 이 표지판을 세운 용인시 공무원 머릿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종의 정신을 나무라고 싶다. 사실 이 비석은 채제공 묘지 아래에 있다. 묘지와 비석의 번짓수가 같다. 그런데 위 표지판에는 채제공 묘지는 설명이 없고, 오직 뇌문비만 있다. 알량한 공무원의 뇌로는, 아마도 임금의 제문이 신하의 무덤보다 더 중요하다 판단해서 그런 것같다. 이런 추정이 안맞기를 바란다. 채제공 같은 위대한 분이 용인에 잠 들어 계시고, 이 분이 용인땅에 남긴 발자취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겨우 뇌문비라는 암호문 하나 적어놓은 것으로 공무원의 일을 다 했다고 자만하면 안된다. 


두 가지를 찾아 적는다.

첫째 뇌문은 제문 혹은 조문이라고 하면 된다.

원래 살아 있는 사람의 행적이나 행실을 기리는 글은 찬()이라고 한다. 그래서 칭찬이란 말이 나왔다. 그러니까 누굴 말로 기리면 칭이고, 글로 기리면 찬이 된다. 합쳐서 칭찬이다. 

요즘은 그냥 글이라고 하면 된다.


이에 비해 죽은 사람의 행적이나 행실을 기리는 글은 뢰()하고 한다. 옥편에는 <뇌사 ()>라고 나온다. 뇌사(誄詞)도 한자어다. 우리 옥편이 대개 이런 수준이다.

이런 뜻은 조선시대 주자왈 공자왈 이발기발, 입으로만 살던 고루한 선비들이 정한 것이고 한글 세대인 우리가 따를 필요가 없다. 이런 걸 갖고 요즘 애들이 무식하니 어떠니 잔소리하는 그 사람이 무식한 것이다.


힘이 없어 이제 정조가 채제공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지은 제문을 옮긴다.

이것도 찾다찾다 지쳐 용인문화원장을 지낸 이인영 선생께 여쭈니 <용인학대사전>에 나온다고 알려주셔서 겨우 구했다. <용인학대사전>은 엄청난 분량의 용인관련 백과사전인데 이 선생께서 혼자 만드셨다. 시에 출판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평생 비석이나 걸레질하고, 무덤의 풀이나 뽑을 공무원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신 것같아 안타깝다.

힘이 없어 번역문을 손대지 못했다. 눈에 띄는 오자와 띄어쓰기만 고쳐 올린다. 나중에 다듬겠다.


<정조 이산이 채제공 선생을 기리며 쓴 글(正祖御製誄文)>


의정부 영의정 규장각제학 화성부유수 장용외사 사시(賜諡) 문숙공(文肅公) 장례 일에 각신(규장각 소속신하)을 보내어 그 혼령에게 영결하니 이와 같도다.-


松喬上悚 소나무는 곧게 위로 솟아있고

山巀脚窂 산은 깎아지른 듯 우뚝 하다.

卿式似之 경의 품식이 곧 이와 같으니

判不桔橰 결코 시속을 따라 부앙하지 않았네

挺然獨任 우뚝이 홀로 자임하더니

義三秉一 군사부를 한 결 같이 섬기는 의리였네

木天編史 학사로서 비각(秘閣)에서 역사 를 편수할 적에

手握弗律 손에는 직필을 잡았네

斧鉞狐鼠 사특한 무리를 형벌로 응징하 니

日星忠藎 해와 별 같은 충신이었네

蜀訛易驚 변경은 유언비어에 놀라기 쉬 우매

巴賓不贐 공물(貢物)을 보내오지 않으니

泂辨廓闢 환하게 분별하고 확실히 밝혀 서

返我鄒魯 우리를 추노로 돌아오게 만들 었네

知申膝席 승지로서 임금 앞에 무릎을 꿇고

血涕如雨 피 눈물을 비처럼 흘렸네

自持寸丹 스스로 단심(丹心)을 지녀

質諸天神 천신에게 물을만 했으니

萬育莫奪 만 사람의 힘센 장사도 뺐지 못하고

百劫無磷 백겁의 세월에도 닳아 없어지지 않았네

盖卿稟賦 경이 타고 난 품성은

俊爽英特 뛰어나고 영특했으니

寧驥櫪伏 차라리 마판에 엎드린 천리마가 될지언정

不駒轅促 끌채 밑의 망아지는 되려 하지 않았네

薄雲氣槪 구름에 닿을 기개였고

呑潮局量 조수를 삼킬 국량이었네

發之於文 문장으로 발휘하니

忼慨瀏亮 강개하고 드높았네

莊精列液 장자의 정수요 열자의 진액이며

馬髓班筋 사마천의 골수이고 반고의 근골일세

燕南歌筑 촉을 치며 부르는 연나라 노래

抗隊新飜 호위하는 군대를 새로 갖췄 네

篋雖魏盈 이간하는 글이 상자에 가득해 도

杼不曾投 결코 의심하지 않았네

予匪顯鏡 나는 현경이 아니었으나

卿實虛舟 경은 실로 허주였으니

萬籟歸窺 만뢰는 근원으로 돌아가고

三品出鑪 삼품은 화로에서 나왔네

起來樊巖 번암에서 일어나

坦履康衢 강구의 탄도(坦道)를 걸었네

嗟卿巷遇 아 경이 군주를 만나니

寧考則哲 영고의 밝으신 안목이었네

特置經幄 특별히 경연에 두었으니

知自簪筆 잠필로부터 알아주었네

若龍於虞 우나라의 용처럼

出納王命 왕명을 출납하고

若僑於鄭 정나라의 교처럼

潤色辭令 국가의 사령을 윤색하였네

口嘗御藥 입으로는 임금의 약을 맛보고

手綴天章 손으로는 제왕의 문장을 지었 네

魚魚雅雅 위의가 정돈되고 엄숙하니

赤芾蒼珩 적불과 창형이었네.

知卿用卿 경을 알고서 경을 등용하니

予篤自信 내 돈독히 스스로 믿었네

有謨必采 좋은 계책이 있으면 반듯이 채택하니

取卿抱蘊 경이 쌓아온 역량을 취함이었네

有牘必詡 간독이 있으면 반드시 칭찬하 니

嘉卿秉執 경의 굳은 뜻을 가상히 여김 이었고

有事必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니

喜卿諧洽 경의 해박한 식견을 기뻐함이 었네

有唱必醻 시를 읊으면 반드시 화답하니

愛卿風韻 공의 풍류와 운치를 사랑함이 었네

一號負荊 가시나무를 등에 지겠다고 한 번 부르자

擧世廉藺 온 세상이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로 여겼다네

太阿如水 태아검(太阿劍)의 서슬이 빛나니

疇敢弧車 누가 감히 활을 겨누겠는가?

策名立朝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에 선 것이

五十年餘 오십여 년 남짓이니

淸華要膴 총화의 요직

奚適不宜 어디 간들 마땅하지 않았으리

度支中權 호조와 병조

藝苑樞司 예문관과 중추부였다네

延登奎閣 규장각에 올랐다가

接武江漢 강한에 자취를 이었으니

煌煌六節 빛나는 부절 지니고 지방으로 나감은

藩留及閫 유수와 절도사의 직책이었네

乃立之相 곧 재상으로 세운 것은

不卜不夢 점을 친 것도 꿈을 따른 것도 아니었네

捍流屹石 거친 물결에 버티는 암석이었고

支厦巨棟 대하(大廈)를 지탱하는 큰 동량이었네

澤漉群黎 은택이 수많은 백성에게 미치고

祿仁九族 복록은 구족에 미쳤건만

桃門韋布 부귀한 집안에서 위포를 걸치고

塊庭襏襫 재상 집안에서 도롱이를 입었네

西樓七分 서루의 칠분이

上應壽星 위로 수성에 응하니

鶴髮象笏 학발과 상홀에

尙有典型 오히려 전형이 되었다네

爰宅于華 이즈음 화성에 현륭원을 조성하여

靑繩路臨 청승 길에 임하니

采采春路 봄 이슬이 성하게 적셨는데

手指松陰 손으로 소나무 그늘을 가리켰네

大耋元朝 일흔 나이로 정월 초하룻날

聽漏起居 이른 아침 기거의 반열에 나왔는데

渥顔炯眸 윤택한 안색 밝은 눈동자로

端拱穩趨 단정히 양손 맞잡고 안온하게 추정하였네

卿期八齡 경은 여든을 기약했고,

予謂百歲 나는 백세를 누리리라 하였건만

西來一氣 서쪽에서 이른 한 기운이

敢肆垂沴 감히 어긋나 요기를 퍼트렸네

間起人物 세상에 드물게 나는 인물이었건만

卿亦乘箕 경 또한 기미(箕尾)를 타고 떠나고 말아

朝無老成 조정에 노성한 대신이 없으니

國其何爲 나라의 일 장차 어찌할 것인가

且聞孝親 또한 듣건대 어버이에게 효성스럽기로

罕如卿者 경 만한 이가 드물었다는데

今焉己矣 이제는 그만인지라

有淚一灑 눈물만 한결 같이 뿌릴 따름 일세

春杵遽撤 나라사람들 슬퍼 방아를 문득 그쳤건만

凡杖未錫 나는 아직 궤장을 내리지 못하였네

不與人亡 사람과 함께 없어지지 않는 것은

滿架牙軸 서가에 가득한 문고이니

徵付剞劂 인쇄에 부쳐

將壽其傳 장차 오래토록 전하려네

親製誄文 친히 뇌문을 지으니

五百餘言 오백여 마디의 말일세

歷鋪平素 평소의 일을 두루 서술하니

予筆無愧 나의 글에 부끄러움이 없네

寄語弘遠 아들 홍원에게 이르노니

毋忝毋貳 선친을 더럽히지 말고 한결 같이 따를지어다.


己未三月二十六日기미년(정조 23, 1799) 36



* 난 정조의 문체반정론을 매우 싫어한다. 적당히 사대하고, 중국 글을 군데군데 박아 품위있게 적으라는 그의 주장을 배격한다. 그는 중국인이 쓴 어문 조각이나 고사를 박으면 별처럼 빛난다고 보았겠지만 나는 기미나 검버섯처럼 죽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정조 이산은 이 조문에서도 중국 고사를 여러 번 인용했다. 이 나라에는 인용할 인물도, 역사도 없는 것처럼 영혼을 저버렸다.

요즘 유학갔다가 온 이들 중에 일반 독자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그 나라 지명, 인명, 역사 따위를 목청 높여 외치는 오만과 다를 바가 없다.

* 제문에서 정조 이산은 인간 채제공을 칭찬한 게 아니고 자신에게 충성한 신하로서 다른 신하의 모범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문이나 조문이 으레 찬양 일색이지만 48세의 젊은 왕이 70세의 노신하에게 거들먹거리는 듯 쓴 문체가 영 거슬린다. 김정은 앞에에 서서 머리 조아리는 김정일의 친구들쯤이랄까. 

* 대개 왕이 내린 제문은 내용과 상관없이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내렸다>는 사실만 강조된다. 언제나 그렇다. 지금도 대통령이 꽃을 보내주었느냐 아니냐로 기사 쓰는 언론과 비슷하다.

- 장자의 정수 열자의 진액, 사마천의 골수 반고의 근골, 촉을 치며 부르는 연나라 노래,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 태아검(太阿劍)서슬, 정나라의 교, 적불과 창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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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용인시가 <채제공 선생 뇌문비>를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로 고쳤다. 

한꺼번에 다 고쳐치길 바랄 순 없고, 그나마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