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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

국악기

건고 




조선 초기 이후, 조회(朝會)·연회(宴會) 때 사용하던 아악기(雅樂器) 중 타악기의 하나. 지상 높이 4.15m, 지름 1.6m, 길이 1.49m로 한국의 국악기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다. 조회·연회 때 전정헌가(殿庭軒架)에서 음악이 시작될 때와 합주가 끝날 때 쳤다. 구조는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가 바깥쪽을 향해 십자로 놓인 거호(踞虎)라는 대 반침을 세우고 그 위에 긴 북을 가로올려 놓았다. 이 북은 북면 지름 1.2m, 북통 길이 1.6m 안팎으로 붉은 칠 바탕에 모란꽃잎을 그려 화사하게 장식하였다. 북 위에는 나무로 만든 네모 진 2층의 방개(方蓋)를 얹었는데 방개의 네 모서리에는 이삭 모양의 붉은 빛 나는 털의 상모(象毛)를 달았으며, 구슬 달린 오색 유소(流蘇)를 물려 늘어뜨리고 있는 용두간(龍頭竿)을 뻗치게 하였다. 방개 위 맨 꼭대기에는 춤추듯 나는 모양의 백로, 즉 상로(翔鷺)가 연꽃 위에 조각되어 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그림과 설명이 있으며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국립국악원에 보관되어 있다.


교방고






북의 하나. 중국 당(唐)나라의 교방에서 쓰던 북으로, 나발로 된 틀 위에 반룡(蟠龍)이 그려진 북을 북가죽이 위로 가도록 걸었다. 송(宋)나라의 것도 이와 비슷하며, 채로 치면 장구와 비슷한 소리가 난다. 원(元)나라에서는 연악(宴樂), 명(明)나라는 단계악(丹階樂), 청(淸)나라는 합악(合樂)에 썼다. 한편 한국에는 고려 때에 전래된 뒤 당악에 속하여 당의 발고(拔鼓)와 같은 악절의 타법(打法)으로 썼으며, 행진할 때는 앞뒤에 두 사람이 이를 메고 다녔다.


꽹과리






상체의 양어깨를 곧게 하며 허리를 펴고 가락을 치되, 꽹과리를 잡은 팔 겨드랑이를 몸에 붙이고 팔꿈치를 꺾어 꽹과리가 몸 정가운데에 오게 하며, 가슴 정도 높이로 몸과 꽹과리의 사이를 20㎝정도 떨어지게 한다. 채를 잡은 팔 역시 겨드랑이를 붙이고 팔꿈치를 꺾어 채의 방울이 꽹과리 울림판 정가운데에 닿게 한다.



채는 오른손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여 가볍게 말아 쥐고 쇠의 복판 약간 위를(장지와 약지부분) 친다. 왼손의 손가락을 이용하여(장지와 약지) 소리를 막았다 열었다 하여 울림을 조절, 다양한 음색을 낸다.




노고






혁부(革部) 타악기의 일종. 중국 주(周)나라의 문왕 때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에서는 조선 세종 때에 명나라로부터 받아들여, 문묘 또는 종묘의 제례(祭禮) 때 사용해 왔다. 통이 긴 북 2개를 십자형으로 포개어 틀에 매달아 놓고 치는데, 통에는 붉은 칠을 하였고, 북을 칠 때에는 진고(晉鼓)와 쌍이 되어 친다. 북틀 위에는 달 모양을 새겨 희게 칠하였고, 좌우에는 봉의 머리를 그려 유소(流蘇;꾸밈술)를 길게 늘였다. 받침나무에는 두 마리의 작은 범을 십자로 웅크린 모양으로 새기고, 그 등 위에 가자(架子)를 박았으며, 그 가자를 중심으로 하여 북을 매달았다.



노도








국악기 중 피명악기(皮鳴樂器)의 하나. 고(鼓)는 채로 쳐서 소리내는 북인 데 비하여 도는 흔들어 소리내는 북으로, 그 제작연도나 수입경로·용도 등은 노고와 같다. 노도의 구조는 몸통이 긴 작은 북 2개를 서로 엇갈리게 기다란 자루에 끼우고, 양쪽 북 허리에 가죽끈의 귀를 달아 자루를 잡고 흔들면, 귀가 북면에 부딪쳐서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북통은 붉은 칠을 하고, 노고와 함께 인신(人神)의 제향 헌가(軒架)에 편성된다.




뇌고







아악(雅樂)에 사용되는 혁부타악기의 하나. 주(周)나라 문왕(文王) 때에 제작된 것이며, 한국에는 조선 세종 때 명나라로부터 수입되었다. 편고(片鼓;한면에만 가죽을 댄 북) 6개를 기둥 쪽으로 모아 틀에 매단 것으로 북통에는 검은 칠을 하였고 반드시 뇌도와 함께 편성되어 타주된다.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산천서낭제[山川城隍祭(산천성황제)] 등의 제천의식에서 댓돌 아래 마당에 설치하는 헌가(軒架)에 편성되는 악기로, 진고와 함께 음악을 시작하거나 종지시키고, 4자(字) 1구(句) 끝마다 친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제향이 폐지됨에 따라 쓰이지 않고 있다.











북 하나를 긴 장대에 매어 단 것이다. 무거운 추를 매단 끈을 손잡이에 연결하고 손잡이를 돌리면 추가 북통을 쳐서 소리가 난다.












음악의 시작과 끝, 그리고 궁중정재(宮中呈才) 가운데 춤사위의 변화를 지시할 때 사용한다. 박은 길이가 40㎝, 너비가 6㎝ 정도의 나뭇조각 6개의 상단을 연결하여 묶고, 매듭을 달아 장식한다. 묶지 않은 반대쪽을 양손으로 잡아 벌렸다가 오른손을 순간적으로 접으면 소리가 난다 박을 만드는 재료로는 박달나누·화리(華梨)·대추나무 등 단단한 나무가 쓰인다. 박은 신라시대에 당(唐)으로부터 들어와 쓰였으며, 고려 때에는 송(宋)의 신악기(新樂器)와 함께 당악·향악에 사용되었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당부악기(唐部樂器)에 포함되었으나, 향악에도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박을 치는 사람을 집박(執拍)이라고 하는데, 서양음악에서의 지휘자와 같다. 박은 시작할 때 1번, 끝날 때 3번을 친다. 종묘제례악·궁중정재에서는 중간에 박을 친다.




방향








금부(金部) 또는 체명(體鳴) 타악기의 하나. 고려시대 이후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대표적인 당악기로 철향(鐵響)·철방향(鐵方響)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악학궤범》에 의하면 <철편(鐵片)의 모양은 길이가 9치, 나비가 2치로,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가 졌고, 수(數)는 16개이다. 16개의 철판을 겹줄로 엮어 틀에 달아놓고 편종과 편경 대신 쓴다. 강한 쇠붙이로 만든 철편의 크기는 같고 그 두껍고 얇은 차이에 의해서 음이 높고 낮다. 철편 위에 구멍을 뚫어 삼갑진사(三甲眞絲)로 위 아래 두 단에 각각 가로놓인 2개의 가로쇠에 8매씩 붙들어 맨다>고 하였다. 한편 1610년(광해군 2) 간행된 《악학궤범》에 의하면 <좌우 기둥 아래 안팎으로 초엽(草葉)을 붙이고, 새끼호랑이를 만들어 네모진 방대(方臺) 위에 놓고 2개의 틀 기둥을 새끼호랑이 등에 뚫은 구멍에 꽂아 고정시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주법은 양손에 편종과 편경에 쓰이는 각퇴(角槌)를 들고 치는데, 둔탁한 소리를 낸다.












점토로 화로같이 만들어 구은 것이다. 9갈래로 쪼개진 대나무 채(四杖)로 부의 윗쪽 가장자리를 쳐서 소리를 낸다. 소리는 두꺼우면 높고 얇으면 낮아지며 잘 구워야 좋은 소리를 얻을 수 있다. 중국 고대 아악기의 하나이지만 우리 나라에 수입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왕조 세종 때에 박연이 당시에 사용하던 부가 좋지 않아 마포 강가에서 완전한 부 10개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부는 문묘제례악에 쓰이는데, 부를 치는 방법은 한 음이 규칙적으로 4박씩 계속되는 경우 제 1박에서는 쉬고, 제 2박에서는 한번, 제 3박에서는 두 번, 제 4박에서는 굴려서 친다.




삭고






한국 전통음악에 사용된 타악기. 응고(應鼓)와 더불어 건고(建鼓)에 따르는 것으로, 궁중의 조회(朝會)와 연향(宴享)에 사용되었다. 한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116년(고려 예종 11) 이후로, 송(宋)나라에서 보내온 대성아악에 입고(立鼓)·응고와 함께 비고라는 명칭으로 들어왔다. 긴 북통에 고리를 박고 나무틀에 매달아 사용하는데, 해를 그리고 흰색을 칠하여 낮을 상징한다. 응고와 모양은 비슷하나 조금 크다. 오늘날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소고







사당패·선소리패·농악대들이 치는 작은 북. 매구북이라고도 한다. 크기는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지름이 약 20㎝, 높이 4∼5㎝이다. 체테로 만든 통에 개가죽을 양쪽에 대고 개가죽 끈이나 노끈으로 꿰매어 만들며, 채는 1뼘 길이에 손가락만한 굵기의 나무로 만든다. 사당패·선소리패의 소고는 좀 큰 편이고, 농악대의 소고는 지방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사당패에서는 거사(居士)들이 소고를 들고 치며, 선소리패에서는 모가비가 장구를 치고 다른 소리꾼들은 모두 소고를 치며 산타령을 부른다. 농악에서는 대개 4∼5명 이상으로 편성되는 소고잡이가 소고춤이나 상모놀이를 할 때 음향보다는 맵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소리북






판소리에서 고수(鼓手)가 가객(歌客)의 소리에 맞추어 장단을 칠 때 쓰는 북. 고장북이라고도 한다. 여러 북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만들며 북통은 소나무를 깎아서 짜는데 지름 40㎝, 높이 25㎝ 가량 되게 한다. 통의 양쪽에 쇠가죽을 대고 놋쇠못을 여러 개 박아서 맨다. 좋은 소리가 나도록 쇠가죽의 기름을 빼고 안을 깎아낸다. 북통에는 너무 딱딱한 소리가 나지 않게 속에 종이나 헝겊을 바른 다음 그 위에 가죽을 씌운다. 북채는 도장나무나 박달나무 혹은 탱자나무를 지름 2.5㎝, 길이 25㎝쯤 되게 깎아 만든다. 고수는 북을 앞에 놓고 앉아서 왼편으로 약간 당겨놓고 왼손 엄지를 북의 궁편(왼편 가죽) 꼭대기에 얹어 놓고 손바닥을 펴서 중편 가죽을 치고, 오른손에 북채를 쥐고 오른편 가죽과 북통을 친다. 북통은 여러 곳을 치나 흔히 북통의 맨 꼭대기 가운데(온각자리), 북통의 안쪽에서 약간 오른쪽(반각자리), 북통의 꼭대기 오른쪽 모서리(매화점자리)를 주로 친다.











나무로 만든 호랑이의 등 위에 27개의 톱니가 있다. 문묘와 종묘의 제례악에 쓰이는데 음악을 마칠 때 9갈래로 쪼개진 대나무 채로 호랑이의 머리를 세 번 치고 등 위의 톱니를 한 번 긁는 것을 세 번 반복한다.




영고







북통에 노란칠을 한 여덟 개의 작은 북을 원형으로 묶어 틀에 달아 놓아 팔면으로 만들었다. 영도와 함께 지신(地神)의 제사인 사직(社稷)의 강신악 (降神樂)에 편성되었다. 이 북의 8면은 지신제 가운데 영신악의 8성(八成)과 일치하는 숫자이다.




영도






작은 황색 북 4개를 엇갈리게 꿰어 놓았다. 뇌도, 뇌고가 천신의 제향에 사용된데 대하여 영도, 영고는 지신의 제향에 사용되었다. 북면이 8면인 것은 지신 제사의 강신악이 같은 곡을 여덟 번 반복하는 것과 일치한다. 영도도 음악을 시작하기 전에 세 번을 흔드는데 북통 양쪽에 달린 가죽 끈이 북면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영도와 영고도 조선왕조 세종 때부터 사용되었으나 지신의 제향이 폐지된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용고






북의 한 가지. 북가죽의 지름 약 42.4㎝, 북통높이 21.2㎝, 북통둘레 46.96㎝이다. 북통 양편에 고리를 박고 그 고리에 끈을 달아 어깨에 메고 두 손에 2개의 북채를 쥔 채로 위에서 내리치는 것으로, 능행도(陵行圖)에서 보이는 대취타(大吹打) 등에 편성되어 있다. 용고의 제도는 교방고(敎坊鼓)와 거의 같으나 그보다 작고, 북통에 반룡(蟠龍)을 그린 것이 흡사하다. 한편 민속악 가운데 판소리 장단을 치는 북은 용고의 체제와 규격은 거의 같으나 반룡을 그리지 않아 소리북이라 한다. 소리북은 북을 앞에 놓고 앉아서 치는 것이 용고와 다르다.




운라







금부(金部) 타악기의 하나. 구운라·운오라고도 한다. 접시모양의 지름 10.5㎝되는 징[鉦(정)] 10개를 나무틀에 매달아 작은 나무망치로 친다. 틀 아래 자루가 달린 것과 방대(方臺)가 붙은 것 2가지가 있다. 행군할 때는 자루를 왼손에 쥐고 치며, 연례(宴禮) 때에는 이 자루를 방대(대받침)에 꽂아 놓고 친다. 중국 청(淸)나라 때 생긴 것으로서 한국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쓰이기 시작했으며, 음색이 맑고 영롱하여 취타(吹打)나 당악(唐樂) 계통의 음악에 사용되었다.




응고






북의 한 가지. 응비라고도 한다. 아악에 쓰이는 악기로, 마침을 조화시킨다[和終(화종)]는 뜻을 갖고 있다. 건고(建鼓)·삭고(朔鼓)와 함께 전정헌가(殿庭軒架)에 편성되었으며 삭고의 선창에 화응하는 북이다. 고려 예종 11년에 송(宋)나라에서 들여와 조선 말까지 사용되었다. 응고는 작은 북으로 양쪽 가죽면의 지름은 1자 3치이고, 북통의 길이는 2자 2치이며, 가운데 둘레는 5자 4치이다. 가자의 높이는 4자 2치 5푼이고 너비는 2자 7치 5푼으로, 중앙에 달을 그리고 붉은 색칠을 한다.




자바라







무율타악기(無律打樂器)의 일종. 일명 자바라·발·제금(提金)이라고도 한다. 바라는 그 크기에 따라 자바라·요발·동발·향발 등이 있으며 또한 그 용도가 다르다. 바라는 냄비뚜껑같이 생긴 2개의 얇고 둥근 놋쇠판으로 만들며, 놋쇠판 중앙의 불룩하게 솟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꿰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쳐서 소리를 낸다. 불교의식무용의 하나인 바라춤을 출 때 양손에 바라를 들고 춘다. 이 밖에 장구·북·징·꽹과리·방울 등 타악기 및 피리·젓대·해금 등의 선율악기와 함께 무속음악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무속음악에서는 지방이나 때, 굿의 규모에 따라 악기 사용이 들쭉날쭉하지만, 자바라는 주로 서울·서도·동부지방의 무악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장구







한국의 대표적인 타악기의 하나. 장고(杖鼓)나세요고(細腰鼓)라고도 한다. 장구는 서역 계통의 악기로서 1114년(고려 예종 9)에 견송사(遣宋使)로 송(宋)나라에 갔던 안직숭(安稷崇)에 의해서 전래되었다. 처음에는 조정의 당악(唐樂)에 쓰였고, 그 뒤 오늘날까지 속악뿐만 아니라 민속악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장구의 통은 오동나무가 좋으나 소나무를 쓰기도 한다. 북편은 쇠가죽의 백피를 사용하고 채편은 보통 말가죽의 황피를 사용한다. 양편의 가죽은 붉은끈으로 얽어매는데 이를 죔줄[縮繩(축승)]이라 하며, 가막쇠로 가죽과 죔줄을 이어준다. 죔줄은 북편과 채편을 연결하는데 오른편만 축수(縮綬)를 이용하여 소리를 조절하게 되어 있다. 오른손에 대쪽으로 만든 가는 채나 박달을 동글동글하게 깎아 공을 만든 다음 가죽으로 싼 궁채를 가지고 채편을 치며, 왼손으로는 손바닥으로 북편을 친다.




좌고








합주곡의 연주에서 장구 장단의 북편과 동시에 치는 북으로, 연주자가 앉아서 칠 수 있도록 틀에 달아 놓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900년 이전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며, 조선 후기 풍속화 등에 비슷한 모양의 북이 있으나, 현재 전하는 좌고와 같지는 않다. 북통의 지름은 1척7촌, 북통의 너비는 7촌이며, 북통 둘레에 달아 놓은 세 개의 고리로 틀에 건다. 연주자의 전면 좌측 옆에 북을 세워 놓고 북채로 쳐서 소리낸다.




중고






국악기의 하나. 가죽면 지름은 약 75㎝, 통의 길이는 약 67.5㎝이다. 군악(軍樂)에 주로 쓰였고 관왕묘(關王廟) 등의 제향에도 쓰였다. 교방고(敎坊鼓)와 비슷한 악기로서 북통에는 반룡(蟠龍)이 그려져 있고 네 발로 된 틀 위에 올려져 있으며 북의 가죽면이 위로 향해 있어 위에서 내려치게 되어 있었는데, 운두(高)가 교방고보다 높이 있었다. 독제 제향의 아헌무(亞獻舞)에 소금(小金)·대금(大金)과 함께 연주되었고, 종헌무(終獻舞)에는 중고만 쳤다고 한다. 철변두에도 중고만 쳤다. 현재 창덕궁(昌德宮)에 1개가 전한다.




진고






아부(雅部) 악기로 주로 나라의 제사 때 사용하던 대형 북. 북면의 지름 약 105㎝, 통 길이 150㎝. 북종류 가운데 가장 크며 통 둘레에 그림은 없고 붉은 칠만 하였다. 1116년(예종 11) 송(宋)나라에서 입고(立鼓)와 함께 들여와 헌가(軒架)에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이후에 사용되었는데 헌가의 악기로서 음악을 시작할 때와 그칠 때 그리고 매 구(句) 끝에 노고(路鼓)와 동시에 쳤다. 주로 문묘와 종묘의 헌가에서 사용하였고. 종묘제례에서는 아현에 진고 10통을 친 다음 고축삼성 등의 절차로 음악이 시작되었고, 종헌에는 진고 3통으로 시작하였다. 퇴(槌)는 나무로 만들었다.











팔음(八音) 가운데 금부(金部)에 속하는 체명타악기(體鳴打樂器). 금(金)·금징[金鉦(금정)]이라고도 한다. 중국 고대부터 연주되었고 한국에는 고려 공민왕 때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취타(吹打)·종묘악·무악(巫樂)·법악(法樂)·농악 등에 널리 쓰이며 특히 종묘제례악에 쓰일 때에는 징을 대금(大金)이라 부른다. 크고 둥근 놋쇠판에 끈을 달아서 들고 끝을 헝겊으로 감은 징채로 쳐서 소리를 내는데 깊고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색을 지닌다. 북·장구·꽹과리와 더불어 농악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악기로, 농악 장단 첫박에 친다.












나무 상자 중앙에 방망이가 꽂혀 있고, 상자는 대(臺) 위에 올려져 있다. 축은 어와 함께 종묘와 문묘의 제례악에 사용된다. 축은 음악의 시작을 신호하는 악기로서 동쪽에 놓고, 그치는 것을 신호하는 어는 서쪽에 놓는다. 음악을 시작할 때 먼저 특종을 한 번 친 다음 축 세 번, 절고 한 번 치는 것을 세차례 반복한 다음, 다시 특종을 한 번 치고서 합주가 시작된다. 어와 함께 고려 때부터 사용된 이 악기는 지금도 문묘와 종묘의 제례악에 쓰인다.




특경







돌을 깎아 만든 타악기. 특종(特鍾)처럼 1개의 큰 경(특종일 경우는 종<鍾>)을 틀에 매단 것으로 각퇴(角槌)로 쳐서 소리를 낸다. 특종은 음악을 시작할 때 치고, 특경은 음악을 마칠 때 친다. 원래 고대 중국의 악기였으며 한국에는 고려시대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세종 때는 등가(登歌)에 1틀, 헌가(軒歌)에 9틀을 썼으나, 성종 때는 등가에 황종(黃鍾)의 특경 1틀만을 사용하였다. 음색이 맑고 청아한 것이 특징이며, 국악기 8부 중 석부(石部)에 속하는 악기는 특경과 편경(編磬) 뿐이다.


편경






단단한 경석(磬石)으로 만든 16개의 꺾어진 모양의 돌을 매단 것으로, 편종(編鐘)과 짝을 이룬다. 각퇴(角槌:뿔망치)로 경의 긴 쪽 끝을 친다. 고려 예종 11년에 송(宋)에서 편종과 함께 등가에 정성(正聲)과 중성(中聲) 각 한 틀, 헌가에 각 아홉 틀씩 들어왔고, 공민왕 때와 태종 때도 편종과 같이 명에서 들어 왔다. 조선왕조 세종 때 박연이 개량하여 많이 제작했고, 지금도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 낙양춘(洛陽春), 보허자(步虛子) 등에 사용된다.




특종







국악기 중 금부(金部)에 속하는 타악기. 특경처럼 1개의 큰 종을 매단 것으로 특경은 음악을 마칠 때 치고, 특종은 음악을 시작할 때 친다. 조선 세종 때는 등가(登歌)에 1틀, 헌가에 9틀을 썼다. 등가의 1틀의 음정은 황종(黃鍾)이며, 헌가의 9틀의 특종은 각각 9율을 가졌다. 지금은 문묘제례·석전제례악(釋奠祭禮樂)에 편성되어 쓰이며 기준음고를 정하는 구실도 한다.


편종과 같이 제작하여 등가(登歌)에 있어 음악을 일으키는데(시작) 사용되고 있다. 큰 종 하나를 매달았다. 각퇴(角槌:뿔망치)로 수(隧)를 친다. 음악을 시작할 때 먼저 특종을 한번 친 다음, 축(祝) 세 번과 절고(節鼓) 한 번 치는 것을 세 차례 반복하는데, 절고의 끝소리와 함께 특종을 다시 한번 치고 나서 모든 악기가 합주를 시작한다. 조선왕조 세종 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이 악기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과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에 쓰인다.




편종










아악기에 속하는 금부(金部) 타악기. 중국 고대 은(殷)·주(周)나라 아악기이며, 한국에는 1116년(예종 11)에 송(宋)나라의 《대성악(大晟樂)》과 함께 들여왔다. 그 밖에 공민왕 때에도 명(明)나라에서 보내온 적이 있으나, 병란(兵亂)으로 일부 흩어지고, 그 부족되는 수만큼 다시 사들였다. 그 뒤 1405년(태종 5)과 1406년에도 들여왔고, 1429년(세종11)부터 주종소(鑄鍾所)를 두어 본격적 편종 주조를 하게 되었다. 편종 제도는 16개의 종을 8개씩 아래위 2단으로 나무를 매달아 놓고 각퇴(角槌)로 친다. 종의 음정은 한때 종의 크기에 따라 조정하던 일(宋의 인종 때, 1425년)도 있었으나, 지금은 살 두께에 따라 정하고 있다. 즉 살이 두꺼울수록 음이 높고, 얇을수록 낮으며, 아랫단 맨 오른쪽 황종(黃鍾;C)부터 윗단 맨 오른쪽 협종(夾鍾;d)까지 차례로 반음씩 높아지는데 웅장하며 날카롭다. 이것을 아악에서는 12율(律) 4청성(淸聲)의 음역이라고 한다. 치는 법은, 종의 정면 아래쪽에 있는 둥근자리(隧)를 오른손 각퇴로 치는데, 예전에는 아랫단은 오른손으로, 윗단은 왼손으로 쳤고(아악), 속악은 치기 편하도록 양손을 고루 사용하였다. 편종의 틀은, 중앙에 구멍이 뚫린 방대(方臺;틀받침)와, 그 위에 놓인 역시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나무사자(木獅子) 한 쌍에다 꽂아 고정시킨다. 틀의 위쪽 양면에는 용머리가 부각되어 있고, 5개의 나무공작[木孔雀(목공작)]·색사유소(色絲流蘇)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풍물북










주로 농악에 사용되는 북으로서 장고와는 달리 북편, 채편의 가죽 구분이 없다. 통은 나무로 만들며 북 양쪽에는 둥근 쇠고리가 달려 있어 농악 연주 때 여기에 끈을 달아 어깨에 매고 친다.




가야금






한국 고유의 현악기의 하나. 가얏고라고도 한다. 거문고가 다소 고답적(高踏的)인 데 비하여 다분히 서민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주법도 한결 쉽다. 가야금의 기원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세기에 가야국(伽倻國)의 가실왕(嘉悉王)이 당나라의 악기 쟁(箏)을 보고 만들었으며, 악사 우륵(于勒)으로 하여금 12곡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중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삼한(三韓)시대에 이미 한국 고유의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1975년 경주 황남동에서 발굴된 토기 목항아리[長頸壺(장경호)]에 새겨진 가야금 주악도(奏樂圖) 등으로 보아 가야금은 삼한시대부터 사용된 민족 고유 악기가 가실왕 때 더욱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가야가 망하게 되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투항하였으며,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은 그를 국원(國原;지금의 충주)에 두고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의 3명을 그의 제자로 삼아 가야의 음악을 계승케 하였다. 이들은 스승이 가르쳐 준 12곡의 음악이 번차음(繁且淫)하다 하여 이를 5곡으로 추렸는데, 그 후 이 5곡은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채택되었으며, 가야금은 신라에 널리 퍼져 노래와 춤의 반주악기로 사용되었다. 가야금의 형태는 오동나무로 만든 공명판 위에 명주실로 꼰 12개의 줄을 세로로 걸고, 줄마다 기러기발을 세워 버티게 하였다. 종류는 법금(法琴)가야금과 산조(散調)가야금의 2가지가 있는데, 전자는 아악(雅樂) 또는 정악(正樂)에서 사용되는 전통적인 가야금이며 후자는 민속악 특히 산조에서 사용되는 것으로서 19세기 말경 빠르고 다양한 산조음악의 출현과 함께 만들어져 널리 보급되었다. 가야금의 연주법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가야금의 상단을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하단은 비스듬히 밖으로 나가게 놓는다. 오른손의 첫째·둘째·셋째손가락으로 줄을 뜯거나 퉁기면서, 왼손은 둘째·셋째손가락을 모아서 그 끝으로 기러기발 바깥쪽 부분을 눌렀다 놓았다 하며 소리를 낸다. 음색이 맑고 우아하여 아악과 민속악에 널리 사용된다.




거문고










가야금·비파와 함께 한국 3현악기의 하나. 앞면은 오동나무로, 뒷면은 밤나무로 만든다. 현은 거문고를 무릎에 두었을 때 몸쪽에서부터 차례로 문현(文絃)·유현(遊絃)·대현(大絃)·괘상청·괘하청·무현(武絃)의 6줄이다. 대현이 가장 굵고, 문현·무현·괘상청·괘하청·유현의 차례로 가늘어진다. 또, 유현·대현·괘상청의 3줄은 16개의 괘 위에 얹고, 문현·괘하청·무현의 3줄은 그냥 기러기발로 버틴다. 연주법은 거문고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해죽(海竹)으로 만든 단단한 술대[匙(시)]를 잡아, 현침 가까운 데를 술대 끝으로 내리치거나 거슬러 쳐서 소리낸다. 왼손은 새끼손가락을 문현 위에 붙이고, 약손가락은 유현, 가운뎃손가락은 대현을 각각 누른다. 그러나 대현에는 약손가락을 쓰지 않고 유현에는 가운뎃손가락을 쓰지 않는데, 집게손가락만은 두 줄에 모두 쓸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처음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어 왔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아나 그 성음과 타는 법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나랏사람으로서 능히 그 소리를 알고, 탈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후하게 상을 주겠다 하였더니, 이때에 제이상(第二相)인 왕산악(王山岳)이 그 본모양을 그대로 두고, 제도를 많이 고쳐서 아주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 겸하여 곡조 100여 곡을 지어 이를 타자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하고, 뒤에 말을 줄여서 그저 현금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산악의 거문고는 그 뒤 신라사람인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에 들어가 이를 배우기 50년, 그동안 새로 30곡을 지어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그는 또 이를 귀금(貴金)에게 전하였다. 그러나 귀금이 나중에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은거하여 나오지 않으므로, 신라 진흥왕이 거문고의 비법이 끊어질까 두려워하여, 이찬(伊飡) 윤흥(允興)을 남원공사로 임명하여, 귀금(貴金)의 거문고를 전수케 하였다. 이에 윤흥은 도임하여 안장(安長)·청장(淸長)의 두 소년을 귀금에게 보내어 그의 거문고의 도를 닦게 해서 귀금은 마침내 비전(秘傳) 3곡을 전하여 주었다고 한다. 현재 거문고로 연주되고 있는 곡은 《여민락(與民樂)》 전 10장 중 1∼7장까지로, 《보허사(步虛詞)》 《취타(吹打)》 《가곡(歌曲)》 등의 정악과 《거문고산조》 등의 민속악이 있다.













울림통 위에 7현이 올려져 있다. 줄이 일곱이어서 칠현금(七絃琴)이라고도 부른다. 줄을 떠받치는 안족이 없어 줄이 느슨하고 소리가 미약하다. 안족이 없는 대신 금에는 검은 복판 한편에 흰 자개 13개가 박혀 있는데, 이것을 휘(徽)라고 한다. 왼손으로 줄을 짚을 때에는 이 휘가 있는 곳을 따라 잡는다. 금의 음악은 예로부터 통속적이 아니고, 사대부에 의하여 간사함을 버리고 마음을 바로 잡기 위한 수양으로써 연주 되었다. 고려 때부터 조선왕조 초기까지 문묘제례악에 사용되다가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당비파










탄현악기(彈絃樂器)의 하나. 기록으로 보아 한국에 이 악기가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 때이며, 중국에서 들어왔다. 그러나 그 기원은 서방아시아계일 것이라는 견해가 여러 기록들의 종합에 의해서 입증되고 있다. 이 악기의 구조는 4현·12괘로 목이 위끝에 가서 구부러지고, 뒷면에 담환(擔環)이라는 놋쇠 고리에 담조아(擔條兒)라는 홍진사(紅眞絲) 끈을 걸어 어깨에 맨다. 연주법은 가슴에 비파를 안고 왼손으로 목 밑을 쥐어 손가락으로 괘를 짚은 다음 오른손으로 발목(撥木)을 쥐고 탄다. 한편 이 악기의 조현법(調絃法)은 하조(下調)·계면조(界面調)·평조(平調)·상조(上調)의 4종류가 있으며 줄의 굵기도 여러 가지이다. 뜯는 방식에도 많은 변천이 있어,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가야금과 같이 손가락으로 연주한다.




대쟁










한국 현악기(絃樂器)의 하나. 쟁은 13현인데 비해 대쟁은 15현이다. 대쟁은 중국 속악에 쓰이던 악기로 1114년(고려 예종 9)에 들어온 송(宋)나라의 신악 가운데에는 4개의 쟁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111년에 들어온 송의 아악 대성악 가운데에는 쟁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1114년에 들어온 것으로 전한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지용당악(只用唐樂)>이라 이른 것처럼 대쟁은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까지 당악에만 사용되어 오다가 현재는 악기만 남아 있을 뿐 거의 쓰이지 않는다. 긴 오동나무통에 명주실로 만든 줄을 걸고 가운데를 기러기다리[雁足(안족)] 모양의 주(柱)로 받쳤으며, 주법은 가야금처럼 오른손으로 타고 왼손으로 주의 뒤를 짚어 소리를 낸다. 음성은 낮은음 <황종>에서 중청성 <황종>까지의 2옥타브 20음의 넓이를 지녔으며, 음색은 가야금과 비슷하나 낮은음이 무겁고 웅장하다.




수공후










공후는 고구려시대에 사용되었던 악기로 서양 악기의 하프와 비슷하다. 수공후는 세워져 있는 공후라는 뜻으로 울림통 위에 스물 한 개의 줄이 세워져 있다.




소공후










작은 공후라는 뜻으로 휘어진 부분이 울림통으로, 그 위에 열세 개의 줄이 연결되어 있다.













사부(絲部) 현악기의 하나. 중국 고대의 악기로서 금(琴)과 더불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 길이 7자 2치, 나비 1자 8치이며 줄의 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한국의 슬은 25줄이다. 앞면은 오동나무, 뒷면은 엄나무로 만들고, 4면의 가장자리를 검게 칠하고 앞·뒷면에는 구름·학·비단 등의 무늬를 그려넣었다. 집게손가락으로 떠서 연주하며, 사용하지 않는 가운데 윤현(閏絃) 양쪽의 줄을 동시에 떠서 화음을 낸다. 주(柱), 즉 안족(雁足)은 담괘 쪽으로 물려 세우는데 제1현의 주가 가장 크고 점점 작아진다. 고려시대 제향아악(祭享雅樂)의 등가(藤袈)·헌가(軒袈)에 쓰였고, 조선시대에는 등가에 쓰였다. 슬은 금과 함께 연주됐다.




아쟁






사부(絲部) 찰현악기(擦絃樂器)의 하나. 고려 때 들어온 당(唐)악기로 고려 때에는 당악에만 편성되었고 조선 초기 이후로는 향악에도 쓰였다. 7줄로 되어 있으며 줄을 문질러 연주하고, 거문고와 같이 운두가 얕고 상자식으로 짜서 만든다. 활은 개나리 가지의 껍질을 벗겨 송진을 칠하여 쓰는데, 말총으로 만든 활에서 얻는 소리보다 다소 거칠기도 하나 저음을 내며 장엄한 음빛깔이 특징이다. 본래 조현법(調絃法)은 《악학궤범》에 3가지가 그려져 있으며, 현재는 당악계 음악을 연주할 때의 평조와 향악을 연주할 때의 평조·계면조 등 3가지 조현법이 있다.



양금









타현(打絃)악기의 하나. 구라철현금(歐邏鐵絃琴)·천금(天琴)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다리꼴로 된 상자모양의 오동나무 판면 위에 2개의 긴 괘를 세로로 질러 고정시키고, 괘 위에 14벌의 금속줄을 가로로 얹은 다음, 대나무를 깎아 만든 가는 채로 줄을 쳐서 충격음을 얻는데, 별다른 기법은 없다. 줄은 주석과 철의 합금으로 만들며, 보관할 때는 줄을 보호하기 위해 화리(華梨)를 붙인 오동나무 뚜껑을 덮는다. 본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 회교음악에 사용되던 악기였는데, 10∼12세기 로마제국 시대 십자군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지고 1580년 서양선교사 마테오 리치에 의해 중국에 소개되었으며, 다시 조선 영조 초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 도입된 사정은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과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의 기록에 보인다. 양금은 즉시 향악의 음정에 맞추어 조현(調絃)되고 풍류방에서 정악연주악기로 사용되는 등 그 보급속도가 빨라 국악편성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도 <영산회상(靈山會上)> 등 관현합주와 가곡반주에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단소와의 병주(竝奏)는 음색의 영롱함 때문에 율객(律容)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서양에서는 쌍채를 썼으나 한국에서는 음악이 완만하고 또 화음을 쓰지 않기 때문에 외채만 사용한다.




와공후










고대 중국·한국·일본에서 쓰던 발현악기(撥絃樂器)의 하나. 줄이 공명통(共嗚筒)과 횡가(橫架) 사이에 수직 혹은 대각선으로 이어져 있다. 일본에서는 <백제금(百濟琴)>이라고 한다. 공후의 종류로는 와공후·수공후·대공후·소공후가 있다.




와공후


중국계의 와공후는 한국의 거문고와 비슷한 것으로서, 목이 굽은 모양이 봉황(鳳凰)의 형상이라 하여 봉수공후라고도 한다. 빗모양의 괘(줄받침)가 10여 개 있고, 줄은 13현이며, 학자에 따라서는 금(琴)과 슬(瑟)의 유사계(類似系)인 치터(zither)족으로 다루고 있다.




대공후


23현으로 소공후와 같은 모양이나 크기가 크다. 하주(下柱)를 허리에 꽂고 탈 수 있게 되어 있다. 백제 때 일본에 전한 것이 현재 일본 나라현[奈良縣(내량현)] 쇼소원[正倉院(정창원)]에 보존되어 있다.




월금










발현(撥絃)악기의 하나. 완함(阮咸)·진비파(秦琵琶)·진한자(秦漢子)라고도 불린다. 4현과 5현이 있는데, 통구지방의 삼실총(三室塚)과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소개되는 것은 모두 4현이며, 무용총(舞踊塚)의 것은 5현인데, 줄감개 3개는 아래로 2개는 위로 되어 있다. 향비파의 공명판은 타원형이고 당비파는 불룩하나, 월금은 원형인 점이 각각 다르며 줄받침은 당비파보다 하나 더 많은 13개이다. 줄은 자현(子絃)·중현(中絃)·대현(大鉉)·무현(武絃)의 4줄이다. 음색은 향비파·당비파·월금 모두 대동소이하며, 타는 법도 거의 같다. 주로 연악(宴樂)에 사용되어 왔으나,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해금






팔음(八音) 중 사부(絲部)에 속하는 찰현악기(擦絃樂器). 계금·깡깡이라고도 한다. 국악기를 만드는 8가지 기본 재료를 모두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공명통에서 주아(周兒)까지 명주실로 만든 2현을 걸고, 이를 활대로 마찰하여 소리를 낸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1114년(예종 9) 중국 송(宋)나라로부터 들어와 고려 때부터 당악(唐樂)과 향악에 함께 쓰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향악에만 사용한다고 씌어 있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개방현(開放絃)을 그대로 조율하며 줄을 당기지 않고 짚어 연주하였으나, 그 뒤 줄을 당겨쥐고 조율 및 연주를 하게 되어 농현(弄絃)이 자유로워지고 표현력이 풍부해졌다. 20세기에 들어와 산조음악의 발달과 함께 독주곡인 해금산조가 등장하여 독주악기로서도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향비파






사부(絲部) 현명악기(絃鳴樂器). 오현(五絃)·오현비파·직경비파(直頸琵琶)라고도 한다. 삼국시대 말부터 조선 말기까지 궁중에서 쓰인 대표적인 향악기이다. 당비파(唐琵琶)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주로 향악연주 때 사용되었는데, 5현에 10개의 괘가 있고 목과 머리가 곧게 연결되어 있다. 거문고처럼 술대로 타며 복판에 대모(玳瑁)가 붙었고, 통 앞면은 오동나무, 뒷면은 밤나무를 재료로 썼다. 연주자는 왼손가락으로 줄과 괘를 짚고 거문고 같이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고 줄을 쳐서 연주한다. 《세종실록》 권132에 처음으로 기록되고 《악학궤범》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