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발인할 때 동네 아저씨가 명정에 <학생부군~>이라고 쓰길래 내가 다시 쓰라고 요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거 빼고 바로 함평이씨 OO의묘라고 써달라 했지요. 그랬더니 동네 어른들이 난리가 났어요. 고금에 이런 법은 없다, 이러면서요. 학생은 벼슬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우리 아버지는 일제 식민지에 태어나서 벼슬에 나갈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니 빼라, 이러는데 유교 관습이 남아 있던 터라 어른들에게 내 말이 먹히질 않더라구요. 함평이씨 대신 함평이공이라고 쓰고, 거기 덧붙는 부군도 벼슬 명칭입니다. 우리 집안에서 공이나 부군 명칭을 받은 분이 몇 분 계시지만 그런 관습 버리자, 이런 뜻인데 안됩디다.
사실 할머니 제사 때 <유인 경주김씨~>라고 적는 신주도 제가 유인을 빼자고 말해도 형이 안뺍니다. 유인은 조선시대 9급공무원 부인을 가리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벼슬없이 죽은 사람의 부인에게 붙일 수 있도록 허용된 거지요.
하여튼 내 마음대로 안되더라구요.
사실 따지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여성에게도 성명이 주어지지만 이름을 불러서는 안되기 때문에 별도의 호칭이 붙습니다. 남자는 성 다음에 公이 들어가지만 여성은 다릅니다.
우리 할머니를 경주김씨라고 할 때의 씨(氏)도 양반가 여성이라는 자랑이거든요. 이름이 따로 있는데도 이름 대신 씨가 들어가는 겁니다. 대개 향리나 중인은 성(姓)이라 하고, 평민은 조이(召史;소사로 읽지 않는다)라 했으니 우리 할머니는 양반가 여성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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