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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전쟁은 우리 마음대로 하거나 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거의 역사소설만 25년간 써왔다.

어떤 작가는 역사소설을 쓰면서 큰 주제는 관심없고, 백성들 한 명 한 명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고 하는데, 나는 큰 주제에 더 관심이 많다. 역사소설을 많이 쓰다보니 개인의 삶이든 운명이든 그 시대의 큰 사건에 영향을 받고, 불가항력으로 휩쓸리는 걸 많이 보았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삶은 양념처럼 들어갈 뿐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가려고 노력하다보니 사건을 일으키는 주인공, 보조인둘 등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좀 잔인하게 비유하자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백성은, 특히 평민이나 천민은 국제 정보나 궁중 정치에 관련된 정보는 완전히 차단된 별도의 공간에서 별도의 삶을 살았다. 삼성이라는 회사에 다니더라도 말단 조립라인에 있는 직원은 최종의사결정권자인 이건희 씨나 이재용 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거의 알 수 없고, 종은 주인이 조정에 나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글도 그런 차원에서 일부러 써야겠다고 생각하여 적는 것이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다섯 가지 큰 사건을 놓고 오늘날 우리 국민이 처한 시대 상황을 비유하며 북핵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내겠다.


1.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고려 말,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이민족 국가 원이 세력을 잃고, 한족 중심의 반란군이 명을 세웠다.

우리나라는 중원에 붙어 있는 맹장이나 췌장 같은 한 장기 같아서 중원의 변화에 민감한 영향을 받는다. 이 지리적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고려 조정은 망해가는 원나라 세력들이었다. 국민경제니 개인의 삶은 두번째, 세번째 문제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친명파가 생기고, 기존의 친원파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에 최영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은 "철령 이북은 원제국의 땅이었던 만큼 반환하라"는 명나라 창업자 주원장의 요구에 화가 나서, 마침내 1388년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을 출정시켜 요동의 명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했다. 이것이 요동정벌이다.


물론 요동정벌군을 꾸리기 전에 고려 조정에서는 주전파와 주화파가 대립했다. 실질적으로 중원과 요동을 장악한 명과 직접 싸우지 말고 영토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자는 주화파가 결국 밀렸다. 우리나라는 주전파와 주화파가 대립하면 역사적으로 반드시 주전파가 이겨왔다. 국민성이 완고해서 화해나 타협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육이오 전후에는 능력도 주제도 안되면서 북진통일만 외쳤고, 박정희 정권도 북한과 싸워이길 능력이 안되는 상황에서 멸공통일만 부르짖었다. 주전파 주장이 더 잘 먹히기 때문이다.


결국 원나라를 초원지대로 밀어내고 올라온 명군을 상대로 전쟁을 하기로 한 최영은 이 결정 하나로 망해버렸다. 정도전과 더불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친명파 이성계는 명나라와 싸울 수 없다는 명분을 걸어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 백성 개개인의 삶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런 대사건에 휘말려 느닷없이 목숨을 잃은 사람이 굉장히 많다. 개경에 장사하러 왔다가 쿠데타군에 휩쓸려 죽은 사람도 있고, 최영의 부하 중 누군가에게 엊그제 시집왔다가 그날로 노비가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최영이 황금을 돌같이 보든말든 요동정벌군을 일으키면서 그의 인생은 끝이 난 것이다. 그것도 성리학 중심의 신진사대부는 그러잖아도 '오랑캐' 원나라보다 '공자, 맹자, 주희의 나라' 명나라를 더 좋아하는데, 그런 세력의 리더나 다름없는 이성계에게 군권을 준 순간 게임은 끝나버린 셈이다.


2.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0년동안 지리한 전쟁에 시달리던 일본을 처음으로 통일해냈다.

다만 지방세력을 움켜쥐고 있던 영주들이 히데요시의 힘에 눌려 항복하기는 했으나 틈만 보이면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여지가 충분했다. 

이런 이유로, 적을 장악한 뒤에 볼모를 잡든 어떤 형식으로든 그 적의 힘을 빼놓는 건 기본 상식에 속하는 전법이다. 


몽골군은 남송을 점령한 뒤 60만 명에 이르난 남송 군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리한 일본 정벌을 시도했다. 일본을 정벌해야겠다는 의지보다는 그렇게 하여 반란군이 될지 모를 남송군을 소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연합군으로 징발된 고려군도 마찬가지다. 원종과 쿠빌라이칸이 굳게 손을 잡았다 해도 사령관 살리타이가 전사하는 등 몽골군을 괴롭혀 온 고려군을 그대로 두지는 못한다. 그래서 고려군과 남송군을 일본에 갖다 버리는 전략을 쓴 것이다.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 영정이 만리장성 축조에 나선 것도 같은 이치이고, 1945년 9월 미군이 인천항에 들어와 맨처음 한 일이 상해임정 등 광복군의 존재를 무력화시킨 것도 같은 전법이다. 병법, 전법도 모른 채 해방됐으니 우리 세상이다, 이러면서 덜렁덜렁 들어와봐야 소용이 없다.


이처럼 도요토미가 무슨 말을 지껄였든 그는 일본 내정을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핵심을 본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그는 이 판단 하나로 결국 도요토미 이후의 일본을 약 250년 정도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간 통신사가 일본의 침략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일본군은 어차피 쳐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쟁은 나지 않는다며 녹슨 창칼을 방치하고, 늘어진 활시위를 던져놓은 채 음풍농월하며 시나 짓다 벼락을 맞은 것이다.


3. 병자호란


백두산 인근 간도 지역에서 발흥한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요동의 서쪽 끝 산해관으로 밀어내고 요동, 요서(지금의 동북3성)를 차지했다.

이어 그의 아들 홍타시는 북경을 치기 위해 나섰다. 그러기 전에 위로는 몽골을 달래고, 아래로는 조선을 달래야 할 형편이었다. 몽골은 연합하자는 여진족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조선은 거부했다. 홍타시는, 만일 저신들이 북경을 치기 위해 요동을 비운다면 조선군이 언제든 들이칠 수 있다고 걱정했다. 물론 당시 조선군 주변머리로 요동을 칠 수 있는 힘은 없지만 적어도 대사를 앞둔 홍타시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조선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싸웠다. 홍타시와 손을 잡자, 소중화인 우리가 오랑캐하고 어떻게 손을 잡나, 홍타시 손을 잡는 건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다, 등등 주전파와 주화파가 격렬하게 토론했지만 사실 이런 토론 자체가 무상한 일이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데 조선은 결국 오답을 내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완고한 성리학자들이 장악한 조선 조정은 주전파들의 목소리로 넘쳐났다. 결국 싸우기로 했고, 그들의 무능은 곧 드러났다.

* 인조 시대 서인 정권 : 정몽주로부터 이어진 성리학 사상으로 무장한 굉장히 완고한 세력


다행인 것은, 인조 이종이 비록 3고9배라는 치욕적인 항복을 했지만 죽음은 면한 것이다. 다만 공동 정부를 구성한 몽골과 달리 조선은 이후에도 힘을 빼놓으려는 청나라의 압박이 그치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볼모 등으로 요동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4. 일제식민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은 한반도와 만주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중국을 장악하려고 계획한 것보다 더 먼저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러시아 역시 만주와 한반도를 갖고 싶었다. 당시 미국도 한반도를 갖고 싶었으나 일본과 싸우는 게 부담스러워 필리핀으로 방향을 돌렸다.

조선이 무슨 생각을 하든 일본, 러시아는 조선을 장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대원군 이하응, 명성왕후 민자영, 고종 이재황은 헛된 망상이나 하고 앉아 있었다.

이 세 사람이 꿈속에서 헤매는 동안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하응은 전봉준을 시켜 동학란을 일으켜보았지만 오히려 일본군이 조선에 진군하는 빌미만 주고, 이때문에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청나라가 일본에 지는 상황이 생겼다. 청일전쟁이라도 안났으면 시간이라도 벌 수 있고, 그 사이에 개혁할 기회를 얻었을지도 모르는데 이 무능한 우물안 개구리들이 몰락을 재촉한 것이다. 그뒤에 의병이 일어나든 독립군이 결성되든 다 때늦은 몸부림이다.


5. 육이오전쟁


1945년, 미국은 핵폭탄 두 발로 일본을 항복시키기는 했지만, 그만큼의 위력을 보인 게 소련군의 만주작전이다. 핵폭탄이 일본에 투하되기 전에 시작된 소련군의 만주작전은 소련군 약 157만명이 동원되어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 약 71만명을 순식간에 제압한 대사건이다. 일본군은 약 8만 명이 전사하고 무려 64만 명이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이 포로들은 육이오전쟁이 끝난 뒤에 풀려났다.

미국은 소련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혼비백산했다. 이들은 결국 일본군을 전범 A, B, C만으로 분류하여 소수를 처벌하고, 나머지는 내버려두었다. 핵폭탄을 발명한 뒤 세계 유일의 강대국이라고 믿고 있던 미국에게 갑작스런 적 소련이 생겼기 때문에 어떡하든 일본을 끌어들여 소련을 방어해야 했던 것이다. 미군은 일본을 점령하는 즉시 일본을 소련에 대항하는 개로 기르기 시작했다.

이때문에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 일본군이 경계를 서고, 이 일본군 경계병이 조선인을 향해 발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복군은, 적어도 미군이 보기에 조선이 해방되는 동안 조선주둔 일본군에게 총 한 발도 쏘지 않은 유명무실한 집단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소련군의 만주작전 범위는 북한 지역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때 소련군으로 소속을 바꾼 북한 출신 광복군들이 만주작전 및 북한 해방작전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 지도자가 김일성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일본군을 몰아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더구나 소련은 세계최강국으로 우뚝 선 미국에 대항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한반도는 매우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 포기할 수 없었다.

1948년 남북에 각각 다른 정부가 들어서자, 소련은 다른 구상에 들어간다. 동유럽을 쳐서 빼앗고 싶었다. 독일군이 하던 방식대로 동독을 발판으로 동유럽을 장악하고 싶었다. 히틀러처럼 유럽 전역을 차지할 욕심을 줄여 그대상은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 유고, 알바니아였다. 이후 육이오전쟁이 일어나고, 그 사이에 소련은 동유럽국가와 중앙아시아국가들을 차례로 공산화시키는데 성공했다. 히틀러의 꿈을 그가 이룬 것이다. 미국이 일본과 남한을 지키기 위해 국력을 허비하는 사이 소련은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차지하는 전략적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국제적인 상황을 당시 김구나 이승만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이승만이 아무리 북진, 북진 외쳐도 한번 후퇴한 미군은 더이상 38선을 넘지 않았던 것이다.

소련이 만주작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나라는 통일이 됐을 수 있고, 일본은 혹독한 처벌을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소련이 일본을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이란 이렇다.

그래서 나는 전쟁 중에 겪는 한 개인의 아픔보다는 본질에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한다.

전쟁의 실체를 모르고는 개인의 삶도 무의미해진다. 

나는 항상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다. 


* 아래는 내가 전쟁을 소재로 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