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일요일이면 어차피 어머니를 뵈러 내려가지만 지난 일요일 어머니 눈빛이 풀린 것이 두려워 막내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용태를 물었다.
괜찮단다. 동생은 등산 중이란다. 걱정스럽다고 하니, 어머니 위중한 게 어디 하루이틀이었느냐며 걱정말란다. 그래도 눈빛이 풀린 게 마음에 걸리고, 0660코드인 어머니에게 12월 S60은 면역력을 떨어뜨릴 수 있어(바이오코드 이론에 따르면) 불안했다.
하루 종일 6차 촛불집회 뉴스로 귀가 따갑다. 그래도 나는 영어로 쓰기 시작한 새 소설을 쓰다가 1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늘 하던대로 능엄다라니를 읽으면서 어머니가 좀 더 버텨주시기를, 어쩔 수 없다면 고통스럽지 않게 어서 새 몸을 받아 행복하시기를 기도했다. 이 기도는 지난 8월 2일 전주 모악산에 가서 드린 이래 늘 해온 것이다.
- 지난 8월 2일, 전주 모악산으로 가서, 나의 스승이신 붓다와 보살과 화엄성중들께, 그리고 조상들과 아버지께 "어머니께서 너무 고통스러우니 아프지 않게, 놀라지 않게 살그머니 모셔가 달라."고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자 하늘 가득 조개구름이 나타났다. 이 구름은 해발 6000미터 지점에 형성된다.
오전 3시 7분, 휴대전화 벨이 잠깐 울리다 꺼졌다.
군 경험이 있는 남자라면 작은 소리에도 잠이 깨는 법이다.
휴대전화를 눌러 누가 발신했는지 살폈다.
막내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밖에 없다. 어머니가 위독하거나, 그 이상이거나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이다. 그렇다면 위독을 넘어서는 상황이 아닌가 불안하다.
조금 기다리다 두번째 전화를 걸었다. 동생이 전화를 받는다.
"문자 봐."
대답이 간단하다. 그로써 끝이다.
위독하면 어서 내려와 임종하라고 말하겠지만, 그런 말이 필요없다면 그건 어머니가 하늘로 가셨다는 의미다.
손끝이 떨린다. 메시지함을 열어보니 단체문자가 3시 4분에 이미 들어와 있다. 그래놓고 동생이 벨만 울린 것이다.
- 어머니께서 2시 50분경 돌아가셨습니다.
내 고개가 툭 떨어진다.
이 나이가 되도록 어머니와 나 사이에 끈질기게 이어져온 마음의 탯줄이 끊어지는 듯한 충격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하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다.
하루하루가 위독했으니 오늘 가신들 내일 가신들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나날이 3년 내내 이어졌다.
딸은 휴양림 펜션에서 친구들과 자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 먼저 내려가고, 딸은 버스나 다른 차편으로 내려와야 한다.
먼저 목욕을 했다. 어머니를 보내자면 세수할 시간도 없을 테니 일단 목욕재계하여 상주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 수염도 말끔히 깎았다. 그런 다음 별군이(말티즈 12개월령, 경추장애견) 소변을 보게 하고, 언제나 준비된 가방, 별군이 물건을 챙겨 천안으로 향했다.
양성쯤 가는데 동생이 전화를 걸어온다.
- 어디쯤이야?
- 양성이다. 40분은 더 걸릴 것같다.
- 알았어. 어머니는 병실에서 안치실로 옮겼어. 기왕이면 형이 어머니를 뵌 다음에 청양으로 출발시킬게.
- 알았다.
천안시립의료원에 이르니, 막내동생이 혼자 기다리고 있다.
그때까지 막내 혼자 슬픔을 혼자 지고 있다가 나를 만나니 그나마 숨이 트이는가 보다.
곧 그곳 상례원 담당자가 나온다. 어머니를 보여주겠단다.
서랍이 열리고 환자복을 입은 어머니가 누워계시다.
여태 달고 있던 콧줄(음식을 위로 직접 투입하는)과 코에 늘 걸치고 있던 산소호흡보조기가 제거된 상태다.
이마에 손을 대니 아직 따뜻하다. 늘 입을 벌리고 계셨는데 지금은 다물고 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이모와 입 언저리가 똑같다.
이모는 열세 살 차이 언니건만, 유전자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87세, 피부는 곱다. 3년간 햇빛을 잘 보지 못해서 그런 것같다.
어머니도 지금 어머니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동생이 말한다.
2시 30분경, 정기 검진을 돌던 간호사가, 산소포화도가 너무 떨어진 걸 보고 간병인에게 가래를 빼는 석션을 해달라고 요청했단다. 간병인이 석션을 하려는데 심장박동이 떨이지길래 급히 응급실로 연락하고, 이어 낌새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간병인은 연락책인 막내제수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그래도 막내제수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만큼 위중한 것으로는 보지 않고 회사원이라 늘 잠이 부족한 막내동생은 자게 두고, 혼자만 병원으로 달려간 모양이다. 막내는 병원까지 약 15분 거리에 산다.
이때 응급의가 올라와 조치를 하다가 결국 바이털사인이 꺼진 모양이다.
막내제수가 병실에 들어서니 응급의가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단다.
막내제수가 어머니 아프다고, 가슴뼈가 부서진다고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냥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 사이 막내를 호출하였다.
공식적으로 임종은 막내제수만 한 셈이다. 아들이 다섯이지만 아무도 어머니를 배웅하지 못했다.
사망진단서는 바로 발급되지 않았다. 아마도 응급의는 인턴이나 레지던트인 모양이다.
전문의라면 그 자리에서 사망진단서를 떼줄 수 있었을 텐데 월요일 근무 시간에나 과장이 나와 떼줄 수 있다더란다.
그때 동생이 도착하여 막내제수는 장례 절차를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막내제수가 보람상조 회원으로 가입한 상태라 그쪽에 연락하여 어머니를 고향 청양으로 모셔야 한다.
동생이 병실을 지키는 사이, 다른 환자들에게 미안해 어머니를 일단 안치실로 옮겼다.
그러고 나서 내가 도착한 것이다.
운구차를 기다리는 동안 상례원 직원이 커피를 뽑아주어 마셨다.
상례원을 둘러보니 빈소 두 곳이 차려져 있고, 상주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불이 꺼져 있다.
고요하다. 요즘은 화투 치는 사람조차 없는 모양이다. 저 집 귀신들은 심심해서 어쩌나 싶다.
복도를 둘러 보니 돌아가신 부모를 돌이켜 생각하는 글을 새긴 조각작품이 보인다.
내 마음이 그 마음이라 휴대전화로 찍었다.
- 자식을 위해선 가난도 무지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자식을 위해선 슬픔도 아픔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자식을 위해선 갈증도 배고픔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자식을 위해선 더위도 추위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자식을 위해선 거칠고 검은 손이 오히려 자랑이셨던 우리 어머니,
그 어머니가 지금 우리 곁을 떠나가려 하십니다.(일부 자구 수정)
막내제수가 서류 등을 챙겨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고, 오전 4시, 보람상조 운구차가 도착했다.
1시간 안치실 사용료가 5만원이라고 해서 지불하고, 어머니는 병원복을 입은 채 운구차로 모셨다.
막내제수는 어머니에게 새 옷을 입혀드리고 싶다 했는데, 보람상조 직원은 어차피 청양에 도착하는대로 어머니를 씻기고 화장해야 하니 지금은 그대로 출발하는 게 낫다고 한다. 그러자고 했다.
막내는 내 차에 타고, 어머니는 보람상조 직원이 혼자 운전하는 운구차에 누우셨다.
가족이 누가 같이 가는 건 줄 알았는데 그쪽 직원은 혼자 간단다.
늘 하는 일이라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구급차라면 가족이 함께 탈 수 있는데, 상조회사 운구차는 시신만 딱 올라갈 수 있는 공간 밖에 없다.
청양농협장례식장을 목표로 잡고 다들 출발했다.
그 사이 막내가 형제들에게 운구차가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1시간 이내에 도착할 테니 기다렸다가 어머니를 영접하라는 문자다.
막내는 제 자동차를 아파트에 두고 내 차로 옮겨탔다.
그 시간만큼 운구차가 먼저 갔다.
내 차가 청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안치실로 옮겨져 옷을 갈아 입고 기본 화장을 마친 뒤였다.
둘째네와 네째네가 미리 와 기다리다가 어머니를 맞아들였단다.
우리가 도착해서야 기본 화장을 마친 어머니를, 장례원 측이 신원확인을 위해 유가족을 불러들였다.
그새 어머니 얼굴이 깨끗해졌다.
그런 중에 큰형이 부랴부랴 도착했다.
냉장실에 어머니를 모시기 전 가슴에 아미타불, 지장보살, 인로왕보살 그림 석 점을 올려드렸다.
지난 1월 29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18호 이수자 신진환 블화장이 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
발원문이다.
어머니 가슴에 발원문과 불보살 그림을 얹으니 내 마음이 편해진다.
이어 장례식장 측과 기본 계약을 하고, 곧 보람상조 매니저가 여러 장의 계약서를 각 항목마다 설명하며 합의를 해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람상조 직원들이 장례절차를 진행한다는 풀옵션 방식이다.
가족들은 조문객을 맞이하기만 하면 된다. 빈소 관리부터 조문객 대접 등 거의 모든 절차를 그들이 이끌겠단다.
우리는 오라면 가고, 가라면 오고, 절하라면 하고, 술 올리라면 올리기만 하면 된다.
빈소도 착착 마련되었다.
계약 옵션에 따라 생화가 배치되고, 내가 2009년 8월 2일, 부여 만수산 무량사에서 찍은 어머니 사진을 영정으로 모셔 놓고, 우리 오형제가 어머니 모시고 수미산 가는 불화를 옆에 놓으면서 빈소는 저절로 완성되었다.
- 그림은 무형문화재 48호 양선희 단청장이 어머니 만수무강을 위해 2016년 4월 24일에 그려준 작품 "어머니, 우리 함께 수미산 구경가요"다.
5형제가 부모님을 업고 수미산을 도는 모습이다. 수미산 ; 불교에서 세상의 중심에 높이 솟아 있다는 상상의 산. 황금, 은, 유리, 수정으로 이루어졌다. 신성한 부처님들이 사는 곳이다. 흔히 티벳의 카일라스산을 수미산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sumeru.
- 2009년 8월 2일은 어머니의 건강 상태가 좋고, 막내동생의 딸 명원이 재롱이 한창일 때였는데, 사실은 내 딸이 아파서 일부러 바람쐬러 간 것이다. 이 나들이의 주인공은 내 딸이었는데 그만 어머니가 주인공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픈 손녀딸 위해 각원사, 향천사, 불국사 등 몇 군데 사찰을 함께 다니셨다.
손녀딸 병 빨리 나으라던 그 마음 고이 간직한다.
3일장 중 조문객을 맞을 수 있는 시간은 이틀 뿐이다.
멀리서 찾아올 조문객 사정 생각하면 천안에 빈소를 차리면 좋은데 어머니 친구들과 함평이씨 집성촌인 청양의 우리 친척들을 생각해서 그리 모셨는데, 역시 잘한 결정이다.
나는 웬만하면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더러 연락이 돼도 너무 머니 오지 말고 조전이나 보내라고 했다.
그러면 화환을 보내주고, 기어이 찾아온 분들에겐 정말 미안했다.
하지만 100여 명쯤 되는 동네사람들은 이틀 내내 아침에 나와 저녁에 돌아갔는데, 빈 식장 하나를 추가로 빌리니 그 방에서 하루 종일 놀아주셨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마치 이동 경로당처럼 하루 종일 나누셨다.
자식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좋다.
또 보람상조에서 보낸 4명, 막내동생 회사에서 보낸 2명, 농협에서 보낸 2명까지 서비스 요원이 모두 8명이나 되다 보니 가족들은 각자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이 서비스 요원들이 거의 모든 걸 챙겼기 때문에 우리 상주들은 손님이 오는대로 맞이하고, 각자 자기 조문객들과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친척들도 모두 오랜만에 만나는 분들이기 때문에(6촌 이상의 친척들은 애경사나 있어야 얼굴을 본다) 아이들 이야기, 유학가서 무슨 박사를 따왔다, 어느 회사 다닌다, 대학에 강의 나가는데 방학만 되면 애인이 있는 이탈리아로 튄다, 우리 집안 유일의 아이돌 해일로는 동남아시아 공연 떠났다, 등등 온갖 집안 소식을 나눈다.
고향 후배, 선배들도 20년 전, 30년 전, 40년 전 얘기로 꽃을 피우고, 더러 애틋한 옛 이야기로 서로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어머니는 주무시다가 돌아가시고, 87세로서 약간 서운하기는 하지만 투병 시간이 길어 그럭저럭 호상이라고 판정을 받았다.
조문객들도 눈치 안보고 웃고 소리 치고, 열심히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어주었다.
다 고맙게 보인다.
별실 여기저기 나누어 앉아 화투를 쳐주는 고향 후배들도 다 예뻐보인다.
- 지난 10월 말, 내 딸 기윤이가 할머니하고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때만 해도 의식이 매우 또렷하여 기윤이가 하는 말에 일일이 반응하셨다.
어머니는 증손자 건우가 면회오는 걸 가장 좋아했다. 어찌나 좋은지 "아~ 아~" 큰소리를 지르시곤 했다.
그렇게 축제같은 이틀이 지나고, 오늘 오전 어머니를, 아버지가 계신 유택을 열어 함께 모셨다.
보람상조에서 어찌나 정성스럽게 모시는지 상주인 내가 몸둘 바를 모를 정도다.
물론 돈을 내니 그렇게 해주는 것이겠지만, 손길 하나하나 어찌나 정성스러운지 이런 서비스는 정말 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 하늘은 맑게 개고 햇살이 내리쬐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파란 하늘이다.
- 왼쪽은 앞산으로 묘지에서 바라보이는 풍광이다. 오른쪽이 뒷산으로 등뒤에 해당한다.
- 아버지가 먼저 마련하신 유택이다. 이 봉분을 헐고 아버지의 왼쪽에, 앞에서 보기에 오른쪽에 어머니를 모셨다.
아버지 묘소는 풍수 공부하는 사람들이 버스 타고 와서 답사하는 곳이다. 물론 나는 풍수를 일절 고려하지 않는다. 둘째형의 간절한 노력으로 마련한 유택일 뿐이지만 내게 매우 낯익은 능선이 보이고, 내가 살던 땅이라 더없이 정겹다.
보람상조에서는 높은 산에 큰 천막을 치고 야외 임시 식당을 차렸다. 동네사람들이 모두 올라와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술과 떡과 차를 마셔주었다.
상주라고 특별히 애태울 것도 없이 친척들과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시며 어머니의 생전 이야기를 나누면 되었다.
시끌벅적한 가운데 산일 하시는 분들이 어머니를 정성껏, 그리고 편안히 모셨다.
전같으면 동네 남자들이 달려들어 땅을 만졌는데 지금은 그저 열심히 먹고 마셔주기만 하면 된다.
또 음식 마련도 예전에는 부녀회 몫이었는데 이분들 역시 맛있게 먹어주는 것으로 우리 상주들을 기쁘게 해주셨다.
이렇게 하여 우리 어머니는 하늘로 가셨다.
어머니가 평생 바라시던 대로 열심히 살아 어머니의 아들이었음을 자랑으로 여기게 하고 싶을 뿐이다.
어머니는 전에 내가 밀리언셀러 작가로 유명세를 탈 때, 소설가가 뭔지도 모르고, 아들이 대학에서 뭘 전공했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이재운이 엄마야." 이렇게 동네사람들한테 자랑하셨단다.
하늘 가서도 내 아들이 이재운이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하고, 한 눈 팔지 않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뜻을 새기겠다고 약속 드렸다.
혹시라도 부처님께서 내 마음을 알아들으시고, 내 소원을 이뤄주실 수 있다면, 부처님이 아니고 신장이라도 그러실 수만 있다면, 다른 이라도 그러실 수 있다면 우리 어머니가 건강한 몸으로 환생하시어 좋은 교육을 받아 훌륭한 호모 사피엔스로서 한 인생을 다시 사실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란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이 쓴 책이 150권이나 되는데도 단 한 권 읽지 못한 채 가신 것을 비통하게 생각한다. 그러니 부디 아버지 어머니 모두 새 하늘에서는 큰 인연을 맺어 평생 공부하시를 간절히 바란다.
- 어머니 영정은 49재를 위해 천안 각원사로 옮겼다. 막내 부부의 원찰이다. 어머니의 투병은 주로 천안에서 이뤄졌는데 막내 제수 씨가 거의 매일 병원에 찾아가 살폈다. 우리 어머니는 딸을 하나도 낳지 못해 늘 섭섭해 하셨는데, 딸보다 귀한 며느리를 얻어 말년의 복을 누리셨다.
발인날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더니 삼우제 날에도 하늘은 역시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우리 어머니 투병기
* 이 노래를 작곡한 강인구 씨는 내가 존경하는 후배 음악인이다. 그에게 감사드린다.
* 도신 스님은 서산에 계실 때 내 친구 혜승이와 함께 찾아뵌 적이 있다. 그 마음이 너무 고와 스님 노래를 즐겨듣는다.
이 노래 <엄마>를 부르는 도신 스님 마음이 내 마음이다. 난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시기 전이라도 한번쯤 "엄마!" 하고 불러볼 걸 하는 후회가 든다.
- 어머니, 하늘에 계시다가 자식 생각나거든 이 노래 들어봐요. 이승 일 다 잊고 어머니 길 씩씩하게 가요.
끈질기게 악착같이 공부하여 어서 해탈해요. 이 아들이 먼저 해탈하면 어머니를 뵈러 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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