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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전원 이야기

고구마를 심으며

2008/06/06 (금) 20:57

 

고구마를 심어야 할 철이 왔다.

원래 생명체는 영생을 해야 하는데, '하늘나라'라면 모르겠지만 지구의 환경 조건이 그렇지 못하다 보니 늙고 병든다. 그래서 고안해낸 영생법이 생식이다. 자기 자신을 최대한 작게 복제해 다시 살려내는 것이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다 이렇게 한다.
 
고구마를 선택했다. 고구마의 생식법은 뿌리다. 가을에 서리가 내리면 줄기가 말라죽기 때문에 부득이 뿌리로 생식할 수밖에 없다. 꽃이 핀다는데,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씨로 번식한다는 얘기는 못들어봤고, 뿌리로 번식하는 게 유리한 모양이다.
작년에 대여섯 박스를 수확했는데, 봄이 되어 이 모든 고구마의 유전자를 누굴 통해 전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가장 실하게 생긴 놈을 하나 골랐다. 그러고는 화분에 심었다. 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4월 중순이 되어 땅을 갈고, 거름을 편 다음 비닐을 씌웠다. 고구마는 본디 열대작물이라 비닐을 씌워주면 더 잘 자란다.
 
고구마 한 알에서 나온 줄기를 떼어 다섯 이랑에 다 심었다. 고구마는 하난데, 수십 개의 생명체로 나뉘는 것이다.
원래 고구마는 무엇이고, 지금 저마다 고개를 쳐들고 자라는 새 고구마순은 무엇인가.
저 많은 고구마순은 다같이 한 몸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제는 다른 몸이 되었다.
내년 봄이 되면 이 중에서도, 한 포기가 아니라 한 포기에서 맺힌 뿌리 중 하나만 선택되어 또다시 밭을 덮을 것이다.
 
인류가 수십 억 명이라지만, 결국 이 고구마 같은 것은 아닐까.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무수히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인가, 우리가 나인가.
고구마란 종이 있고, 사람이란 종이 있을 뿐인가.
 
어쨌든 고구마는 씩씩하게 자란다. 앞으로는 손을 안대도 된다. 10월까지 기다렸다가 캐기만 하면 되니, 농사 참 쉽다. 심기만 하면 하늘이 알아서 다 지어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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