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은 큰아들 주치를 잃은 뒤, 그 주치와 늘 다투던 둘째 차가타이를 제치고 셋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삼았다.
오고타이는 어느 날부터 술에 취하기 시작했고, 제국 곳곳에서 불러들인 여자들을 품고 살았다.
이에 그의 형 차가타이(차가타이칸국의 칸)가 그의 영지가 있는 먼먼 시르다리야강에서 달려와 알현을 청했다. 형이라도 대칸인 동생을 보려면 알현을 청해야 한다.
이윽고 차가타이는 주위를 물리고 오고타이칸을 만난다.
최근 박근혜의 난정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경제가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 마침 재출간하려고 윤문하던 중에 이 부분을 발견하고 여기 옮긴다. 전 10권본의 7권 부분이다.(해냄출판사 8권본에서는 6권에 들어있다)
=================================================
오고타이칸은 자신이 대칸이라는 사실보다 칭기즈칸의 아들이자 후계자임을 더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푸른군대를 몰고 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끈질기게 저항하던 고려의 항복도 받아냈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때부터 오고타이칸은 좋아하던 술을 마음껏 마시고, 세계 각지에서 밀려드는 미인들을 두루 감상하면서 한가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오고타이칸이 여섯 달 동안 계속 잔치만 벌이고 있을 때였다. 그가 황음방탕하게 지내면서 제국을 돌보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은 형 차가타이가 시르다리야강에서 달려와 알현을 청했다. 차가타이는 주위를 물리고 단독으로 오고타이칸을 만났다.
“오고타이.”
차가타이가 대칸에 대한 존칭 없이 동생 오고타이를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술에 취해 벌건 얼굴로 히죽거리던 오고타이칸은 정색을 하고 자세를 고쳐앉았다. 차가타이가 대칸이란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할만했다.
차가타이는 호르드에 들어와서는 신하의 입장으로 내내 꿇어앉아 있었지만, 시종이며 여자들이 모두 물러간 뒤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고타이칸의 높은 의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 오고타이칸은 겁에 질렸다. 벌렸던 두 다리도 오므렸다.
“혀, 형님.”
오고타이칸은 차가타이가 그의 신하가 아니라 예전의 무서운 형, 아버지 칭기즈칸 앞에서도 주치와 싸우던 그런 형임을 깨닫고는 바짝 긴장했다. 게다가 차가타이는 오고타이칸의 친형인 만큼 고위급 체르비처럼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다.
“오고타이, 네 아버지가 누구냐?”
“혀,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오고타이칸은 얼른 대칸만이 앉을 수 있는 화려하고 웅장한, 보석이 가득 박혀 있는 의자에서 내려와 형 차가타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네 아버지 이름도 잊었느냐?”
“아니오, 형님. 우리 아버지는 칭기즈칸이십니다.”
“그렇다. 너는 누구냐?”
“예, 형님. 저는 셋째아들로 아버지의 유업을 받들어야 할 대몽골제국의 칸입니다.”
“바로 그렇다. 그런데 너는 아버지가 다 잡아놓으신 금나라를 거저 정복하고는 혼자 잘한 것처럼 우쭐거리고, 마치 아버지에 대한 의무를 다한 것처럼 방종을 일삼고 있다. 대칸이 된 너는 사사로운 향락을 포기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도 네가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걱정하셨지만, 이토록 방종할 줄은 미처 모르셨을 것이다. 나는 네가 그저 여자나 몇 명 끼고 며칠 폭음하겠지 상상했다. 그런데 이게 뭐냐? 수백 명, 수천 명을 모아놓고, 카라코룸이 떠들썩하도록 벌써 반년 동안이나 흥청거렸다. 나 차가타이는 아버지의 제국을 <대야사>로 다스릴 의무를 지고 있다. <대야사> 앞에서는 누구나 동등하다. 네가 앞으로도 대칸의 소임을 게을리 하겠다면 이 자리에서 목을 내놓아라. 아니라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유일하게 살아 있는 너의 형 차가타이게 맹세해라.”
오고타이칸은 무릎을 꿇고 차가타이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며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좋다, 오고타이. 아버지께서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사셨다. 너더러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지는 않겠다. 다만 정복지를 제대로 관리해라. 변경을 기습적으로 탈취한 남송과 살리타이를 죽인 고려를 멸망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이 다음에 아버지를 뵙지 못할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예, 형님. 반드시 남송과 고려를 응징하겠습니다.”
“좋다, 오고타이. 앞으로 술은 하루에 석 잔만 마셔라. 또다시 대칸의 본분을 잊고 폭음을 일삼는다면 그때는 네 목을 치겠다. 약속할 수 있지?”
“예, 형님. 사실 저는 칭기즈칸의 아들이란 게 너무나 벅차고 힘듭니다. 차라리 칭기즈칸의 손자나 증손자만 되었더라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술을 마시면서도 아버지가 나타나 무섭게 혼낼 것만 같고, 전쟁터에 나가서도 왜 꾸물거리느냐고 바로 옆에서 호통치시는 것만 같습니다. 수많은 계집들과 즐기면서도 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자나깨나 아버지의 얼굴이 어른거려 도무지 제가 누구인지 모를 때도 많습니다. 저한테는 아버지가 너무 커다란 산 같습니다.”
“내가 대칸이 되었어도 너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생각해라. 타타르족에게 할아버지를 잃고 황량한 고원에 내팽개쳐진 우리 아버지, 타이추트의 키릴투크에게 쫓겨 생사의 고비를 넘던 우리 아버지, 메르키트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뒤 절치부심하던 우리 아버지, 토릴칸과 자무카에게 쫓겨 사지(死地)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오신 우리 아버지를 말이다. 먹을 게 없어 들쥐를 잡아먹고 살던 어린 시절의 우리 아버지, 유산이라고는 비쩍 마른 말 몇 필과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치는 동생들뿐이었다. 그러나 너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강한 푸른군대가 있다. 온 세상이 네 말 한마디에 벌벌 떨고 있다. 먹고 입을 것은 지천이다. 무엇이 두려우냐? 너한테는 형인 내가 있고, 장성한 네 자식들이 있다. 부디 좌절하지 마라.”
“형님, 아버지를 극복하는 게 어렵기는 하지만 어쨌든 형님 말씀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네 자리로 돌아가 앉아라. 그리고 야율초재와 참모들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약속해라. 그래야만 이 형의 진노가 풀릴 것이다.”
형 차가타이한테 혼쭐이 난 오고타이칸은 야율초재 등 참모들을 호르드로 불러들여 차가타이가 요구한 대로 공식 참회를 선언했다.
이제는 차가타이도 다시 신하의 위치로 돌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오고타이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가타이는 오고타이칸의 신하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방종해 왔다. 잔치는 오늘로써 끝내고 앞으로 술은 하루에 석 잔씩만 마시겠다.”
차가타이는 동생 오고타이칸에게 절을 하고 그의 영지로 돌아갔다.
차가타이가 돌아간 뒤 오고타이칸은 잔치를 다시 열지 않고 고려전과 남송전을 구상했다. 술만은 어쩌지 못하여 프랑스인 금 세공사를 불러 특별히 큰 잔을 만들라고 시켜, 양동이처럼 큰 잔으로 하루에 석 잔씩 마셨다.
“석 잔은 석 잔이니까 형님의 말을 어기는 건 아니다.”
오고타이칸은 곱지 않게 바라보는 야율초재에게 그렇게 변명했다.
- 왼쪽은 몽골의 영기, 오른쪽은 칭기즈칸
- 왼쪽부터 성인본(8권), 청소년본(3권), 소년본(1권)
'이재운 작품 > 천년영웅 칭기즈칸 시리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칭기즈칸의 송곳 전법 (0) | 2018.05.17 |
---|---|
이순신의 편지? (0) | 2017.07.02 |
유목민족에게는 형제보다 더 강한 안다와 너커르가 있었다 (0) | 2016.12.18 |
<칭기즈칸의 편지>에 관한 오해 (0) | 2016.11.03 |
칭기즈칸 표기법 (0) | 2015.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