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20 (일) 13:56
감자를 캔 자리를 지켜보았다. 속살이 드러난 그 자리에 뭘 할까 생각하던 중에 이런저런 심란한 일이 많이 생겨 어디 멀리 떠나 몇 달이나 몇 년쯤 지내볼까 상상을 해보았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차일피일하다보니 감자 캔 자리는 직사광선을 받으며 일광욕만 즐겼다. 거기 사는 지렁이며 달팽이한테 미안해서라도 뭔가 심어 그늘을 만들어주고, 땅속에도 영양분을 공급해주어야겠는데 영 의욕이 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 늙은 개 도조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는 걸 바라보다가 열무라도 심기로 했다. 열아홉살 노인개를 두고 내가 가긴 어딜 가겠는가. 도조가 하늘로 가기 전에는 그 무엇도 사치다. 친구를 만나 두 시간 이상 떠드는 것도 미안한 일인데, 어찌 감히 몇 달 몇 년을 상상했는지.
축분 두 포대를 폈다. 태풍 갈매기가 지나가면 오늘이나 내일쯤 열무하고, 쑥갓, 상추를 심어야겠다. 그래서 다음달에 크든작든 뽑아서 먹든지 나눠주든지 하고, 한 열흘 땅을 쉬게 한 다음 배추와 무를 심어야겠다. 배추는 50포기쯤 심고, 무는 30개쯤 목표로 심어야겠다. 11월이면 친구들을 불러 김치를 담글 수 있을 것이다.
몇 달 앞을 내다보며 계획을 세울 수 있어서 기쁘다. 내일을 설계할 수 있는 자유, 생각할수록 고마운 일이다.
물처럼 공기처럼 늘 있는 줄 알고 살아왔지만 알고보니 내일이란 비싼 휘발유보다 값어치있고, 어설픈 사랑보다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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