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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전원 이야기

비가 오면 걱정이다

2008/08/07 (목) 09:14

 

농사꾼의 아들로 자랐지만 책임질 일이 없다보니 비가 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그냥 시원스레 후려치는 빗발이 좋아 문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며 쓸데없는 감상에 젖곤 했다. 천둥이라도 치면 속이 후련했다. 번갯불이 부엌까지 들어와 지나가는 걸 보기도 했는데, 사방으로 찢어지는 노란 불을 바라보는 것도 짜릿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마당에 텃밭에 과일나무나 채소를 기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비가 두렵다.
올해는 위험지역이다 싶은 곳에 심은 다알리아 네 포기가 뿌리가 썩었는지 시름시름 앓고 있다. 몇 년째 기르고 있는데 올 장마에 뿌리를 상한 모양이다. 물이 잘 빠지는 자리에 심었어야 하는데, 그걸 간과했다. 뿌리가 굵은 식물은 물이 잘 빠지는 곳에 심어야 하는 법인데 보기 좋은 곳에 심는다고 한 것이 그만 다알리아에게는 사지에 심어놓은 결과가 되고 말았다. 작년에는 그 자리에 심었던 해바라기가 죽었는데 올해도 똑같은 사고가 일어났다.
 
또 비가 오면 채소고 과일이고 다 버린다. 오죽하면 포도를 비가림 재배를 하고, 배를 봉지에 씌워 기르겠는가. 이 비는 산성비라서 나쁜 것만이 아니라 더 골치아픈 것은 바이러스 매개체라는 사실이다. 비가 한번 내리면 멀쩡하게 잘 자라던 채소나 잘 익어가던 과일도 곰보가 되어 썩기 시작한다. 탄저병이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바이러스가 달라붙어 채소나 과일을 못살게 군다.
 
시골이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보려고 고향친구한테서 구기자 다섯 그루를 얻어다 마당에 심었는데, 잘 익어가다가도 비만 내리면 죄다 썩어버려 참 속상하다. 구기자 때문에 내가 중학교 다니고 고등학교 다녀 그 시절을 추억한답시고 기르는 중인데, 그 시절처럼 주렁주렁 열리지는 않고 시커멓게 썩은 것만 달리니 정말 답답하다. 작년에는 단 한 알도 수확하지 못했다. 황당했다.
올해는 하는 수없이 바이러스를 방제하는 약을 구해다 화훼용 분무기로 조금씩 뿌리는데, 그때뿐 또 비가 오면 썩는다.
 

얼마 전에 고향 청양에서 나이 드신 군수님이 찾아오셨길래(난 글에 존칭을 잘 하지 않는데 우리 고향 어르신이고 중고등학교 선배시라 도리가 없다) 이 문제를 여쭸더니 그러잖아도 농약을 안치면 농사가 안되고, 농약을 치면 친환경이 아니니 어쩌니 해서 비가림 재배를 권장하는데, 그러면 시설비가 너무 많이 들어 농가 소득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걱정하셨다.

그렇다고 구기자 다섯 그루 때문에 나까지 비가림 시설을 할 수는 없고 장마철에만 바이러스를 방제하는 약을 칠 수밖에 없다. 벌레 죽이는 농약은 절대 안하지만 일단 눈에 안보이는 탄저균을 방제하는 거라니 해보는 것이다. 장마철이 끝나 햇빛이 좋기 시작하면 탄저균도 힘을 쓰지 못한다니 이제부터는 잘 익은 구기자를 구경할 수도 있을 것같다. 
 
이렇게 해도 우리 구기자는 친환경에 속할 것이다. 장마철이 아니면 약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농약이 뭔지, 비료가 뭔지 모르는 우리집 채소들에 비하면 격이 한참 떨어진다. 우리 채소들은 친환경의 차원을 넘어 순환경이니 말이다.
 
비가 와서 나쁜 것은 주로 감자나 고구마 같은 구근식물, 열매가 달리는 식물이다. 브로콜리도 망했다. 감국도 너무 빽빽하게 자라서 그런지 장마철에 통풍이 안좋아 그런지 아랫대가 많이 썩어 보기가 좋지 않다. 들깨도 잎에 얼룩이 많았는데 요 며칠 햇빛이 좋다 보니 새로 나는 잎은 아주 좋다. 고추도 비가 오면 좋을 게 없는 작물이다. 토마토는 장마철에 가장 잘 열리고, 가장 잘 자라는데, 빨리빨리 따주지 않으면 역시 잘 썩는다. 햇빛 좋은 요즘은 괜찮은데 벌써 늙어버려 생산 능력이 떨어진다.
비가 와서 좋은 것도 있다. 오이, 호박, 가지, 미나리 같은 건 무조건 좋아한다. 봉숭아, 부추도 비를 좋아한다. 특히 천둥치는 날 내리는 비는 질소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풀이며 나무들이 아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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